월요일이던 4월 25일. 1년에 한 번 평일에 맞이하는 자유를 뭔가 색다르게 누리기로 했다. 마음 맞는 직원 다섯이 아침 8시 서해를 향해 출발했다. 이번 여행지는 당진상주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청주에서 교통편이 불편했던 서산마애삼존불상과 개심사 등 서산시에 위치한 문화재다.
자가용 한 대로 이동하니 기동력이 좋다. 막 이틀 연휴가 끝난 평일이라 도로가 한가하다. 부강을 지나면서 도로변으로 펼쳐지는 금강의 물줄기를 실컷 바라봤다. 차가 부지런히 서쪽으로 달리는 동안 차안에서 대화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급할 게 없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여행이었다. 당진상주고속도로 고덕IC를 빠져나와 서산마애삼존불에 도착할 때까지 차량통행이 적은 시골길을 달렸다. 산과 들판이 놀이터였던 어린 시절이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농촌풍경을 가슴에 담으며 느림의 묘미를 만끽했다.
운산면의 고풍저수지 앞에서 좌회전하면 가까운 곳에서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을 만난다. 마애삼존불은 용현식당 앞 산기슭에 있어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관리소를 지나면 큰 바위의 아랫부분에 부조로 조각된 삼존불이 백만불짜리 미소로 맞이한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백제시대 최고의 걸작이다. 그동안 불상을 가리고 있던 보호각이 철거되고 만나니 더 반갑다. 높이 2~3m의 개성이 뚜렷한 세 불상이 세상을 다 품은 듯 포동포동한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자연스러운 생김새와 편안한 미소가 보면 볼수록 자주 만나는 우리네 이웃 같다. 우리 일행도 마음을 열고 크게 웃었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위치한 계곡은 중국과 교류하던 시절 백제의 도읍지였던 부여로 가는 길목이었다. 용현자연휴양림 쪽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보원사지를 만난다. 보원사지는 용현리 상황산 북쪽에 있던 절터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 당간지주, 5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가 자리를 지킨다.
마애삼존불을 나와 고풍저수지 방향으로 좌회전해 서산 방향으로 간다. 숙용벌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하면 목장지대와 한우개량사업소 주변의 벚꽃들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운신초를 지나 개심사 방향으로 좌회전한 후 목장지대 사이에 있는 신창저수지를 지나면 개심사 주차장이다.
주민들이 농산물을 팔고 있는 상가 끝에 몇 년 전에 세운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이 뭐 그리 중요하랴. 개심사의 진짜 분위기는 작은 돌덩어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두 개의 돌에 마음을 씻는 동네와 마음을 여는 절 입구를 뜻하는 '세심동(洗心洞), 개심사입구(開心寺入口)'가 써있다. 산속에서 이보다 좋은 말을 어떻게 만나겠는가?
개심사는 수덕사의 말사로 651년(의자왕 11)에 창건되었을 만큼 역사가 깊어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영산회괘불탱화·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고, 가공하지 않은 굽은 소나무를 건축자재로 사용한 종루나 심검당이 볼거리다. 심검당의 벽면을 보고 있으면 기둥의 나무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세상엔 속은 채우지 않고 겉만 화려하게 포장하면서 크기를 키운 것들이 많다. 하지만 개심사에서는 고즈넉한 연못과 작은 앞마당, 낮은 축대와 자연스러운 돌계단 등 공간에 어울리는 아담한 크기의 건물들만 만난다. 이렇게 작고 소박한 건축물들이 자연과 어울리는 모습에 정이 간다. 일주문을 나서며 지역민들이 파는 버섯을 산 후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해미읍성은 개심사에서 차로 15분 거리이고,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에서도 가깝다. 읍내리 소재지에 위치한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은 원형이 잘 보존된 읍성으로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기 위해 건립되어 병마절도사가 청주읍성으로 옮겨가기까지 230여년간 충청도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졌던 곳이다. 3년 이내 무너질 경우 책임을 지도록 맡은 구역에 고을 명을 새겨 넣는 실명제 실시로 튼튼하게 성을 쌓은 읍성은 밖에서는 수직의 석성이나 안에서는 비스듬한 토성이다.
성문에 들어서면 수령 300여년의 회화나무(기념물 제172호)와 옥사가 눈에 들어온다.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채를 철사줄로 매달아 고문했던 회화나무 가지에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옥사에서 나오면 매주 둘째, 넷째 일요일에 전통난장공연이 펼쳐지는 민속가옥과 동헌 사이에 올해 처음 조성한 유채 꽃밭이 노란색 향연을 자랑한다. 시간이 나면 뒷산에 있는 송림과 성벽을 따라 걷는 것도 좋다.
차안에서 간간이 주전부리를 했던 터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오랫동안 구경에 빠져있었다. 요즘 활발히 거론되고 있는 청주읍성 복원과 그 당시 이곳에 와 성을 쌓은 청주사람들을 생각하며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30여분 거리의 남당항으로 달렸다. 마침 남당항 못미처 어사리선착장 부근의 황금어장(011-9929-6197)이 단골인 일행이 있었다. 마음씨 좋은 주인 내외는 멀리서 찾아온 단골을 반갑게 맞이했다.
마음이 편하면 음식도 맛있다. 실비로 푸짐하게 나온 주꾸미와 새조개를 실컷 먹었다. 배부르면 세상만사 다 귀찮다. 먹는 것만 남는 게 아니다. 여행지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것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그래서 계획했던 여행지는 다 돌아봐야 한다.
해안도로와 서산A지구방조제를 달려 20여분 거리의 간월암으로 갔다. 간월암은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창건하고 이곳에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찰이다. 어리굴젓으로 유명한 부석면 간월도리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암자 간월암 입구의 수령 200년생 사철나무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는데 바닷바람이 거세지고 날씨마저 흐려진다. 즐거운 여행은 떠날 때의 기분 그대로 떠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간월도에서 2시간여 달려온 차가 청주에 도착하며 직원들과 오순도순 자유와 여유를 누린 느림여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