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시인의 잔잔한 독백

2011.10.01 11:29:00

내가 읽은 시집 1: 최재형 시집 <당신에게로 가는 길>

내 서재에는 300여권은 족히 넘을 시집들이 있다. 베스트셀러 시집부터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인들의 시집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 시집들을 대부분 나는 한번씩 읽었다. 다 읽지는 않았더라도 몇 작품씩은 읽어서 그 시집의 성격은 다 파악하고 있다. 시집 중에는 한번 들춰본 후로 다시는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있고 몇몇 작품집은 수시로 읽곤 한다. 그런데 10여년 전부터 제일 많이 관심이 가는 것은 칠팔십 대 시인들의 노년 시집들이다. 그런 시집들은 젊은 시인들의 작품 보다 훨씬 울림의 폭이 깊고 넓어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칠팔 년 전 나는 다음과 같이 시를 쓰기도 했다.

70대의 시인들

나는 근래 70대 시인들의 시집을 자주 읽는다
그것은 최재형 시집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우연히 읽게 된 이후부터다
이후 나는 신동집 시집 <귀향. 이향><누가 묻거든><송별>
조병화 시집 <외로운 혼자들><후회 없는 고독><낙타의 울음소리>등
만년의 작품들을 자주 읽으며 깊은 감동에 젖는다
이 시집들을 읽으면 한결같이
탐스러운 열매들이라는 생각이다
젊은 날의 시들은 꽃이거나 무성한 수목이랄까
바야흐로 인생 원숙기의 황금빛 열매들
최후의 승자와도 같이 겸허하고
화려한 수식도 기교도 없는 자기 고백
장엄하도록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들이다
70대를 살아보지 못한 시인들의 시에서는 볼 수 없는
향기와 빛깔과 혜안이 번뜩인다
인생의 참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다
젊은 시인들의 오만과 광기
현란한 수식 엄살과 기교엔 식상한다
나는 한동안 더 70대 시인들에 심취하리라
인생과 문학의 좋은 본보기를 거기서 볼 것 같다
<필자의 졸시 전문>

최재형 시인에 대해서는 10대 적 일기장 한 페이지에서 '감꽃'이라는 작품을 한 편 읽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1990년 대 초 서울의 이름 없는 한 출판사에 들렀다가 그곳 젊은 사장이 주섬주섬 자사 출판 작품집 몇 개를 집어주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최재형의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10대 적 읽었던 '감꽃'의 시인을 떠올리며 책을 펼쳤다. 시인의 연보를 훑어보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

1917년 평남 안주서 출생
193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여름 산> 당선
8.15해방 후 10여 년 간 작품 활동 중단
1.4후퇴 시 월남
1960-1982, 20여년 간 시작 활동 중단
1983년부터 시작활동 재개
1986년 시집 <세월의 문> 간행
1989년 8월 10일 시집<당신에게로 가는 길> 간행

나는 아무 데나 몇 군데 들추어서 읽다가 그만 그 책의 매력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당시 나는 사십대였고 시인은 70대의 노인이었는데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매료시켰을까. 시 <아버님 생각>을 보자.

떠날 때가 가까워진 탓이겠지
자식들과는 자꾸 멀어지고
앞서 간 사람들 생각만
더 간절해지는 것은

오늘은 또 유난히
아버님 생각이 난다
나는 지금
늙은 내 얼굴에서
아버지 얼굴을 대하고 있다
역사의 슬픈 그늘이
숙명처럼 드리워져 있던
그 옥안…

남북으로 헤어진 지 사십 년
끝내 나를 만나지 못한 채
당신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을까

고향으로 가듯이
나도 이제 곧
당신 뒤를 따라갈 참이다
당신의 그 얼굴대로 늙어서
피차 못 다한 그 한은
저승에서라도 만나
다시 들어봤으면

자식들은 두고 가도
슬플 게 없다
그들도 차례차례
세월 따라 다 떠나올 것을
내가
당신을 찾아가듯이 그렇게

이세상은
한 길밖에 없다.
- 최재형, <아버님 생각> 전문

이 시에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70대 노인의 꾸밈없는 심정의 표출 외에 무엇이 있나.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주장하는 사상도 없고 시적인 기교도 없다. 시인의 명성을 높이 사 작품을 읽는 것도 아니다. 70대 노인의 등골처럼 까칠한 언어들로 짜여져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 시를 읽고 받는 감동은 크다. 이 짤막한 시 속에 남북 분단의 민족의 근대사가 있고 이승과 저승으로 이어지는 삶의 유한성이 나타나고 삼대에 걸친 가족사와 가족애가 있지 않은가.

시는 기교만으로는 안 된다.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동은 진실에서 우러난다. 70대 노시인이 들려주는 잔잔한 이야기엔 그냥 넘길 수 없는 몇 가지 진실이 감지된다. 우리가 모두 늙어 시인의 나이가 되면 시인처럼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진리이다. 먼저 떠난 부모를 따라 사랑하는 가족을 세상에 남겨두고 자신도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 절명의 과제 앞에 시인이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실로 장엄하 기까지 하다. 시인의 후대에게 그것은 고귀한 교훈이 되어 삶의 지침이 된다. 이 시집에는 연작시 두 편이 실려 있는데 <돌밭에서> 28편과 <공원 벤치에서> 22편이다.

나는 그 사이
식구 하나를 또
산에 갖다 묻고 왔다

이 참에 나는
나를 한 절반쯤 미리 묻어버리고 싶었는데
뉘우침 하나도 파묻지 못한 채
그냥 산을 내려왔다
나머지 시간을 마저 채우려고

한 세상을 죄스럽게 살다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떠나가는 인생을
다시 한번 아프게 확인했다
언젠가는 나를 또
산에 갖다 묻고 씁쓸하게 돌아설
내 식구들을 생각하면서

어차피 세월은
우리를 하나씩 다 데려간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도 돌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어쩌면 저 돌들도
무엇인가 본래의 제 것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에 잘못 온 것이 아닐까
내가 그런 것처럼

나도 대화 대신
눈을 감아보자
저 돌들이 하듯이

나는 이 세상에 와서
누구를 만나고 가나
-최재형, <돌밭에서·28> 전문

이 독백도 시인만의 독백이 아니다. 시인은 물론 자기의 심정을 혼자 옮겨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 진리가 담겨진 모든 인간의 독백이다. 누가 이 독백을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결국 아내마저 산에 묻고 단독자임을 아프게 깨닫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인생의 마지막 고비에 돌밭에 와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시인에게서 우리는 바로 우리의 미래상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다.

벤치에
혼자 앉아 있으면
문득
함께 살던 식구들 생각이 난다
지금은
내 곁을 다 떠나가고 없는
그 식구들이

아내는 산에 갖다 묻고
자식놈은 분가해서 나가 살고
딸년들은 모두
제 짝을 만나 남의 식구가 돼 가고
나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어쩌다 한 자리에
모일 때가 있으면
이미 그들은
이전의 내 가족이 아니다
인제는 다들
내 마음 밖에서 살고 있다

이제 내게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세월이 마지막으로 내놓는
절박한 문제가 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노인들은
서로 말하지 않는다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
있을 뿐이다

나도 지금
그들과 마주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다
-최재형, <공원 벤치에서·9>전문

이 노시인은 아내와 아들 딸과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을 것이다. 즐겁고 슬픈 일, 온갖 험한 일 다 겪으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고 '손에는 수갑을 차고'(공원 벤치에서·1) 일생을 살다가 '수갑을 차고 살 때는/그런 이치조차 미처/ 느껴볼 겨를이 없었는데…'(공원 벤치에서·1)이제 수갑에서 풀려나 보니 '세월이 마지막으로 내놓는/ 절박한 문제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나는 아니라고 하겠는가. 자녀와 함께 살면서 다복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시인이 지금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노인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잖는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노후의 삶을 시인은 미리 잔잔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최재형 시인을 기억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낯선 시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름 없는 한 출판사에서 나온 노시인의 시집이 나의 애독서가 되어 항상 나의 곁에서 잔잔하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
최일화 시인/2011.8 인천남동고 정년퇴직
ⓒ 한국교육신문 www.hangy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 문의 : 02) 570-5341~2 광고 문의: sigmund@tobeunicorn.kr ,TEL 042-824-9139, FAX : 042-824-9140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등록번호 : 서울 아04243 | 등록일(발행일) : 2016. 11. 29 | 발행인 : 문태혁 | 편집인 : 문태혁 | 주소 : 서울 서초구 태봉로 114 | 창간일 : 1961년 5월 15일 | 전화번호 : 02-570-5500 | 사업자등록번호 : 229-82-00096 | 통신판매번호 : 2006-08876 한국교육신문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