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에 발견하는 삶의 경이로움

2011.10.23 11:43:00


김종길 시집 ‘해거름 이삭줍기’

오늘은 노시인의 시집을 읽어보기로 한다. 김종길 시인이다. 시인은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와 문과대학장을 지낸 영문학자이며 시인이다. 2008년 시집이 출판되자마자 읽었던 시집인데 이 독후감을 쓰기 위해 다시 읽었다. 시인은 1926년생이니 올해나이 여든여섯이다. 이 시집은 시인의 나이 83세이던 2008년 출간되었다.

우리 문단에도 이제 80대의 현역이 여러 분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고령에도 꾸준하게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원로시인들을 보면 후배시인들도 직간접적으로 많은 격려를 받게 되고 또한 새삼 창작에 대한 자극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의 작품이 노년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는 생각이다.

시는 젊음과 패기로써만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체험에서 우러나는 지혜가 녹아있어야 감동적인 시가 쓰여 진다고 생각한다. 이 시집의 발문에서 평론가 유종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체의 허장성세를 거부하고 교언영색을 멀리한 채 감정과 어사의 절제를 도모하여 정갈하면서 과부족이 없는 은은한 여운과 원숙한 고담의 경지를 지키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고전적 간결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경이의 발견은 어릴 적의 나날을 지배하지만 그것을 질서지어 줄 구성능력도 그것을 발설할 어사능력도 어린이는 갖고 있지 못하며 오직 질문을 통해 그것을 드러낼 따름이다.(중략)…… 삶을 위한 성년기의 고되고 바쁜 숨결은 경이를 발견할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여생이 결코 오래지 않다는 무자각의 자의식이 다시 경이의 재발견으로 유도되는 것이다."

경이의 발견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그럼 시를 통하여 시인은 어디에서 삶의 경이를 발견하고 있는지 보기로 한다.

은행 가는 길 1

은행 가는 길
나는 보도를 걷고 있는데
비둘기들은 보도와 차도의 경계선에서

누가 뿌린 것도 아닌 먹잇감을
열심히, 잽싸게
쪼아 먹고 있다.

사람이나 비둘기나
이 세상에서 먹잇감을 얻는 것은
한갓 우연인가, 아니면 무슨 필연인가?

나도 말하자면 먹잇감을 얻기 위해 가는 길인데
문득 떠오르는 부질없는,
그러나 기실 거창한 물음

-김종길, '은행 가는 길 1' 전문

우리가 매일같이 흔히 보는 거리의 비둘기 풍경이지만 시인은 거기서 놀라운 경이를 발견하고 있다. 비둘기나 시인이나 먹잇감을 얻어야 하는 것이 한낱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여겨지다가도 사실상 거창한 물음이라면서 생존의 절박한 문제를 새삼 환기시키고 있다.그리고 비둘기의 몸짓 하나를 삶의 가장 무거운 주제와 연결시켜 시의 중량감을 한껏 높여놓고 있다. 바로 이런 생활 주변의 사물이나 풍경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 그것이 바로 시인의 힘이고 사회적 역할이기도 하다.

겨울 숲에서 .1

나무들이 웅기중기
앙상하게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는 죽어서 쓰러진 것도 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봄이 오면 나무들은 잎과 꽃으로
또 한 번의 삶을 시작하리라.

그리곤 녹음의 여름. 단풍의 가을이 지나
겨울이면 이렇게 헐벗은 채
매서운 추위를 견딜 것이다.

이처럼 나무들은 철따라 차림새를 바꾸며
해마다 한 개의 연륜을 더한다.
허나 사람에겐 연륜이 없다.

인생에도 네 계절은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해마다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한 번만 펼쳐지는 것.

그러니 인생에도 연륜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 따라 크기가 다른
한 개의 동그라미

크기야 어떻든 나무처럼
반듯하기만 하면 좋으련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김종길, '가을 숲에서 1' 전문

우리는 위 시에서 우리가 매일 의구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얼른 깨달아 파악하지 못했던 새로운 발견의 경이를 보는 것이다. 나무와 사람의 차이점을 명쾌하게 구분해 놓은 점이다.'그러니 인생에도 연륜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 따라 크기가 다른/ 한 개의 동그라미'라는 해답은 아무나 도출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 인생을 자연의 4계절에 비유해왔다.

그러나 막연하게 자연과 인생이 다를 것 같은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는데 시인은 일언지하에 사람의 연륜을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한 개의 동그라미'로 집약시키고 있다. 시인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경이를 접하고 된다. 이런 깨달음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요, 삶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과정이다. 이런 일상에서 발견하는 경이는 시집 전체에 일관되어 있다. 시인은 가랑잎 한 잎에서도 인생의 진리와 경이로움을 찾아내고 있다.

가랑잎 한 잎

나의 아침 산책은 대개
수유리 01번 마을버스 종점 맞은 편,
커피자판기 옆에 놓인 벤치에서 끝난다.

봄철에서 가을철까지는 그 주변에
담배꽁초며 빈 담뱃값, 종이컵, 맥주캔 등이 나뒹굴고 있어
그 전날 밤 그 벤치에서 젊은 애인들이나 실직한 젊은이들이
밤늦도록 노닥거리거나 한숨지우며 연신 담배만 피운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오늘 새벽엔 기온이 영하 4.5도로 떨어져
그 벤치에 먼저 온 사람도 없고,
간밤에는 젊은이들도 오지 않은 듯
그 주변도 말끔히 정돈된 대로다,

그러나 그 벤치는 오늘 아침 비어있지 않다
거기엔 언제 떨어졌는지 가랑잎이 한 잎
나보다 먼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 옆에 말없이 걸터 앉는다.

생각해 보면 나 또한 한 잎 가랑잎
머잖아 흙으로 돌아갈 필경에 흙이 될 것을,
오늘 아침엔 길가의 추운 벤치 위에 잠시,
한 잎 가랑잎과 자리를 함께해보는구나.

-김종길, '가랑잎 한 잎' 전문

얼마나 신선한 발견인가. 간단해 보이는 시 속엔 계절의 추이가 나타나 있고, 젊은이들의 생활의 단면이 보이고, 삶의 무상함이 깊은 울림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찮은 담배꽁초와 가랑잎 한 잎에 시선을 주는 시인의 섬세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리고 이 시집 속의 시를 볼 때 80대의 노시인이지만 조용히 집에만 머물러 있는 시인이 아니라 강릉, 하남, 안동, 태백산, 황지 등 국내 뿐 아니라 교토, 뉴욕, 앵커리지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시로 쓴 것을 볼 수 있다. 시는 가만히 앉아서 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시상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William Wordsworth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무지개

워즈워드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노라면
내 마음 뛰누나나
어릴 때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진 뒤에도 그러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죽으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의 하루하루가
모두 순진한 경건으로 이어가기를 

*참고: 이 시의 원제목은 ‘무지개’가 아니나, 편의상 그냥 ‘무지개’로 한다.

이 시엔 늙어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 가슴이 뛰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워즈워드가 얼마나 감동을 느끼는 삶을 갈망했는지를 보여준다. 자연에서 그런 경이로움을 찾아내고 감동을 받는 삶이야말로 바로 시인의 삶일 것이다. 김종길 시인의 시의 소재는 주로 자연이다. 시인은 일제 말 고된 노역에 시달리면서 ‘그래도 어디나 자연은 있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의 시 거의 전편이 자연과의 교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최일화 시인/2011.8 인천남동고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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