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영랑을 만나다(문학 기행)

2012.10.22 09:24:00

경기도 국어과 선생님들과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남도 강진까지 가서 영랑과 가을을 이야기하고 왔다.

여행은 늘 날씨가 문제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가을을 만끽 할 수 있다고 한다. 내심 반가움, 기대감이 솟는다. 토요일 아침부터 마음도 바빴다. 먼 길에 혹은 단풍철에 도로 사정을 걱정해서다.

그래도 남도까지 멀리 가는데 달랑 영랑만 만날 수도 없다. 가는 길에 백양사에 들른다. 주차장에서 절 입구까지는 선생님들과 걷는다. 말씀을 나누지 않아도 모두 행복한 얼굴이다. 요즘 대세가 힐링(healing)이라고 하는 것처럼, 팍팍한 생활에 찌든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백양사 절간을 둘러보고, 주차장에서 점심을 한다. 옛말에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고 한다. 가을볕을 피하지 않고 주저앉아 밥 한 그릇을 비운다.



백양사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순천을 거쳐 강진에 도착한다. 토요일이어도 차가 많지 않다. 영랑 생가는 강진군청과 담하나 사이로 있다. 주변도 깔끔하다. 영랑의 고향은 강진으로 언제가 대학 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노래도 나왔다. 그리고 영랑의 생가가 널리 알려진 것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이다. 유 교수는 이 책에서 남도답사 일번지로 영랑이 살다 간 집을 꼽았다. 영랑 집에 들어서자 문화 해설사가 우리를 반긴다. 국어 선생님들에게 안내하려니 부담이 된다고 하면서 막상 시작하니 청산유수다.

이 집은 주위 환경이 도시화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초가집을 고수하고 있다. 그가 떠난 후 몇 차례 집주인이 갈리면서 일부 원래 모습이 바뀌기도 했지만, 1985년에 강진군에서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다. 동백나무 몇 그루가 집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둘러선 그의 생가에는 복원된 초가 안채와 마루 가장자리에 나지막한 난간을 두른 사랑채가 있다. 초여름이 되면 마당 가운데 모란이 핀다고 하는데 오늘 보는 나무는 가을 탓에 앙상하게 있다.

김영랑(金永郞, 1903-1950)의 본성명은 김윤식이다. 전남 강진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강진 공립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을 하고, 3․1운동 때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출옥 후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수학.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귀국 후, 정지용, 정인보와 함께 ‘시문학’ 동인지를 발간했다. 예술적 최고의 미(美)인 순수미를 추구해 ‘북의 소월, 남의 영랑’이란 칭호를 받는다. 1948년 가족과 함께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때 9월28일 서울 수복의 기쁨에 거리로 나왔다가 숨어있던 북괴군 포탄에 복부를 맞아 48세라는 짧은 나이로 숨졌다.

영랑은 열네 살 때, 휘문 의숙 재학 중이었는데, 부모들이 정해 준 김 씨가의 열여섯 된 규수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소생도 두지 못한 채, 어린 아내와 사별하게 되었다. 비록 부모가 정해준 혼인이었지만, 영랑은 아내의 죽음에 실의를 느끼다가, 스물두 살에 젊은 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최승일과 사귀면서, 그의 여동생 최승희를 알게 된다. 최승희는 후에 무용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는데, 이때는 숙명여고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둘은 열애에 빠져 결혼 단계까지 같지만,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영랑은 개성 호수돈 여고 출신이며, 여고 교사인 김귀련 여사와 중매결혼을 하고 고향에서 살면서 5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영랑은 한국 근대시사에 소월과 함께 서정시의 극치를 보인 시인으로 평가를 받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들도 대부분 맑고 아름다운 가락으로 내면의 순수한 감정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영랑은 성격도 여성적이고, 수줍음이 많고 소박한 촌색시 같아서 언제나 남과 이야기 할 때, 얼굴이 불그레해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미당 서정주 선생이 회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영랑은 열일곱 살 때(휘문고보 3년) 기미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적 거사에 적극 가담합니다. 구두 속에 독립선언서를 깔아 감추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창씨개명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도 영랑은 ‘내 집은 김 씨로 창씨 했소’하면서 거부했고, 삭발과 신사참배는 물론, 국민복을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지조를 지켰다.

영랑은 1930년대 시인으로서 문학사에 남지만, 1930년대 ‘시문학파’ 창시자라는 데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당시 카프(KAPF)에 반발하여 문학에서 정치색이나 사상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였다. 이때 창간한 잡지가 ‘시문학’이다. 여기에는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등이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조화에 의한 자유시를 썼으며, 시는 언어예술임을 내세워 언어의 조탁에 힘써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랑 생가 앞에 ‘시문학파 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는 귀중한 자료가 많다. ‘시문학’ 잡지 창간호부터 당시 발행되던 잡지가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은 강진군의 적극적인 행·재정적 뒷받침을 받아, 참신한 기획력과 다양한 문학 프로그램을 마련해 지역민들의 깊은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고 한다. 9인의 시문학파 동인 중 매월 한 명을 선정 시인의 삶과 예술세계는 물론 유가족들로 하여금 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시인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여행은 일상을 건너는 다리이다. 여행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메마른 삶을 촉촉하게 한다. 나는 수업 중에 영랑의 삶을 학생들에게 많이 한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영랑을 교과서에만 가르쳤다는 반성이 인다. 이제는 영랑이 살았던 모습까지 회상하며 뜨겁게 이야기해 줄 수 있듯 하다. 시의 감동도 깊을 듯하다. 이번 여행의 체험이 마음으로 가르칠 수 있는 계기가 될듯하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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