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은 황구라, 나도 구라맨

2012.12.06 18:06:00

소설가 황석영이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고등학교(경복고) 재학 시절 등단을 했지만, 자퇴와 가출, 자살시도, 막노동,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참전 후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대하소설 장길산은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북, 해외 체류, 수감 생활 등 현대사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가 최근에 다시 ‘여울물 소리’를 출간하면서 신문 인터뷰를 했다. 여기에서 그는 별명을 ‘황구라’라고 소개했다. 50년을 넘게 소설가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작품의 양이나 깊이로 보아도 이야기꾼을 뜻하는 ‘구라’라는 별명은 제격이다.

감히 비교하기도 불경스럽지만, 나도 별명이 ‘구라’다. 직장에서 구라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내가 거짓말을 자주 한다고 동료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황석영과 나의 별명은 같지만, 의미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즉 황석영은 소설가의 필력을 칭찬한 것이고, 나는 입으로 해대는 말을 두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대뜸 나의 직장 생활을 낮잡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애칭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여기에는 나름대로 설명할 부분이 있다. 나는 근무지에서 제법 나이가 있는 축에 든다. 그러다보니 젊은 선생님들이 가까이 다가서기 꺼린다. 그래서 내가 먼저 신소리를 하고 다닌다. “차림새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웃는 모습이 햇살 같다. 목소리가 흐르는 냇물처럼 맑고 청아하다.”라고 말을 한다. 할 말이 없으면 “같이 근무하고 있어서 좋다.”라고 하거나, 심지어 “이렇게 잘 생긴 분하고는 처음 근무해본다.”라며 친근감을 나타낸다. 학기 초에 인사이동으로 인해 학교 선생님들은 서먹서먹하다. 그때 내가 이렇게 말하고 다니면 마음의 벽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그런데 내 말이 간혹 과하기도 했는지, 직장 동료들이 별명을 붙였다. ‘구라’였다. 즉 내 말에 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단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거짓말이 아닌, 격려와 칭찬의 말을 한다.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특징을 잡아내 아름다운 말로 표현해 준다. 지극히 자연적인 감정을 기반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다시 변명하지만 인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애초에 거짓과 진실의 판단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삶의 모습은 통찰력에 의해서 발견된다. 특히 우리의 삶은 믿음과 의지에 의해서 구현되기도 한다. 나도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무한한 신뢰의 그늘에서 컸다. 믿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것이 힘이 되었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데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가치 지향이 나를 키웠다.



난 ‘구라’라는 별명이 좋다. ‘구라’는 ‘구라(口羅)’처럼 들린다. ‘구라(口羅)’라는 말처럼, 입에서 비단처럼 잘 뽑아주면 돈도 안 들이고 호감을 얻는다. 더욱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다보면 문제를 지적하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면 아이도 멀어진다. 이때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장난이 심한 아이에게 활발해서 좋다고 칭찬해 보라. 이내 듬직하게 다가온다.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도 이 방법이 좋다. 강의에 앞서 방문한 학교가 아름답고 말한다. 실제로 아름답기도 하지만, 학교에 들어서서 든 느낌을 섬세하게 표현해 주면 모두 좋아한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으면 “오늘 선생님들의 얼굴이 화사해 보입니다. 눈빛을 보니 배우겠다는 에너지가 내재돼 있어서 기대가 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순간 의자 뒤에 등을 대고 억지로 앉아 있던 선생님들도 내가 준비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보려고 고개를 든다.

나는 비록 문단의 말석에 앉아있지만, 명색이 작가다. 늘 아름다운 언어를 빚어내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구라(口羅)’를 치면서 사는 운명을 안고 있다.

우리의 삶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타인은 남처럼 느껴지지만, 내 삶의 중심축이다. 서로 말을 섞으며 감정을 나누면 애정이 확대되고 마침내 정신이 풍요롭다. 우리의 삶이란 진리가 될 만한 모습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처럼, 그 모습의 일면을 창조하는 말을 해라. 우리의 삶에서 냉철하고 객관적인 말이 상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가 만드는 따뜻한 거짓말이 우리를 더 감동하게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힘들다고 한다. 일이 힘들어서 일까. 아니다. 인간관계가 어렵기 때문이다. 혹시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타인들과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향해서 구라를 쳐라.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같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옆 사람은 물론 내 마음도 한없이 따뜻해진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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