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기차여행, 그 느림의 미학을 찾아서

2014.08.11 13:40:00

주말을 맞아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하는 여행은 늘 가슴이 설렌다.

오전 여덟시. 숙소를 떠난 우리부부는 부산역에서 9시19분발 S트레인 제4871호 열차에 올랐다. 향긋한 경유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련한 옛 추억에 잠길 무렵 스피커에서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이 열차는 9시30분 부산역을 출발하여 구포, 진영, 창원, 마산, 진주, 북천, 하동, 순천 그리고 종착역인 여수엑스포에 도착합니다. 고객님들의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을 위해 저희 직원 일동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내 멘트가 끝나자 기차는 드디어 그 육중한 몸을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시속 60킬로미터 정도로 차분히 굴러가는 기차는 더없이 편안했다. 철로를 스치는 바퀴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정겹다. 눈을 지그시 감고 차창 밖으로 끊임없이 스쳐지나가는 평화로운 산야를 흥미롭게 감상한다. 때 이른 6월의 불볕더위가 이곳 구포 접경으로 접어들자 이미 저만치 뒷걸음질을 치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세상은 온통 청량한 색깔들로 가득하다.

아, 좋다! 좋다는 말 이외에 어떤 형용사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좌석을 잡은 손은 가볍고 엉덩이는 들썩여진다. 창가에 앉은 아내는 풍광이 바뀔 때마다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다.


그랬다. 남도로 가는 길은 정말 경치가 수려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과 수평선이 겹쳐지며 푸른 녹음을 만들어내고 그 녹음은 다시 뭉게구름이 되어 능선을 타고 피어오른다. 산과 들은 녹음의 구름이요 바다는 녹음의 양탄자다. 겹쳐지고 포개어진 산야는 다시 하나로 흐르고 흘러서 남해로 집중된다. 세상의 그 어떤 솜씨 좋은 화가가 저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비릿한 남도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여행객은 불현듯 신선이 되고 시인이 된다. 일찍이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남도를 일컬어 지상의 낙원이라 하였거늘,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산골 물 차가운 소리 대밭에 감싸이고
봄 기미는 뜨락의 매화가지에 감도네.
아름다운 가락이 이 속에 있으련만 달랠 곳 없어
여러 번 일어나 어정거리다 마네.
산의 정자엔 도시 쌓아둔 책은 없고
오직 이 화경과 수경뿐이라네.
새 비가 내린 귤숲은 자못 아름답구나.
바위 샘물을 손수 떠서 찻병을 씻네.
약 절구질 잦아지니 번거로운 곰팡이는 없건만
드물게 달이는 차 풍로엔 먼지만 있네.
다산 정약용의 ‘동다기(東茶記)’ 중에서

‘처음’이란 단어는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첫사랑이 그렇고, 첫 출근이 그렇고, 첫 만남이 그렇다. 하루를 여는 신 새벽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신선함이 코끝을 간질인다. 과연 남도의 S트레인은 어떤 모습으로 이처럼 설레는 여행객의 마음을 끝까지 충족시켜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기차는 바야흐로 마산으로 접어들고 있다. 연꽃잎처럼 이어진 산봉우리 사이로 흰 운무가 춤을 춘다. 운무는 푸른 봉우리만 외로이 남겨두고 아득히 멀어져간다. 하지만 이내 또 한 무리의 운무가 야금야금 봉우리들을 먹어치운다. 숨고 도망치며 숨바꼭질을 반복하던 산봉우리는 이제 흰 구름으로 가득하다.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 것이 봉우리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다. 문득 조선시대 이매창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걸어서 백운사에 오르니
절이 흰 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저 흰 구름을 쓸지 마소
마음은 흰 구름과 함께 한가롭다오.

잠시 기차 안에 있는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사이 기차는 진주시내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큼지막한 돌에 “하늘이 내린 살아 숨 쉬는 땅! 진주”라 새겨진 이정표가 우리를 반긴다.


시원하게 뚫린 철로를 따라 우리의 거침없는 진군은 계속된다. 이름 모를 산야초들이 아기자기하니 정겹다. 선현들도 이 길을 걸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신비감이 들며 모든 경치가 아름답고 정겹게 보인다.

우리 부부는 기차에서 내려 잠시 역사(驛舍)에 핀 구절초 한 송이를 말없이 바라본다. 이름 없는 들꽃이지만 저 처연한 자주색의 자태가 이 고장을 대표하는 듯하다. 어떤 꽃들은 웃고, 어떤 풀들은 생글거린다. 그랬다. 남도는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소중한 역사가 깃들어 있는 듯하니 과연 절경의 고장답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 드디어 북천에 도착했다. 역사(驛舍)에서 바라다 보이는 저 곳이 바로 북천이란다. 북천은 코스모스와 메밀꽃이 유명하다더니 정말 곳곳에 코스모스 바람개비가 세워져 있다. 참으로 수려한 풍광이다. 비췻빛 강물이 둥그런 원을 그리며 북천을 감싸며 흐르고 또한 내륙에는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잠시 눈을 감고 가을철의 북천을 상상해 본다. 외국에 널리 자랑해도 될 천혜의 휴양지라 해도 결코 손색이 없겠단 생각이 든다.


아내와 나는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켜고 다시 열차에 올랐다. 같이 동행한 사람이 말하길, 조금만 더 가면 하동이고 이어서 순천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라고 했다. 칙칙폭폭 기차여행도 이제 종착역을 달리나 보다.

S트레인을 탄 여행객들은 대부분 초행길인 모양으로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모여든 듯하다. 기차가 움직이자 사람들은 이내 깊은 상념에 잠긴다. 기차에서 만난 첫사랑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또래들과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갔던 추억을 생각하는 것일까. 각자의 마음속에 추억하나씩을 품고 기차는 또 그렇게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내가 손에 들고 시집에서 시 한편을 읽기 시작했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

10여분을 순천역에 머물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여수엑스포역으로 가기 위해 다시 기차에 올랐다. 엑스포에 가면 각종 공연도 볼 수 있다는 안내인의 친절한 설명에 아내는 어서 가자며 나를 채근했다.

아내의 채근하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오늘밤에는 아내와 함께 여수 엑스포에서 아늑한 의자에 누워 밤이 새도록 아름다운 공연을 감상하며 사랑과 그리움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김동수 교사/수필가/여행작가/시민기자/EBS Q&A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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