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무릇이 유혹하는 불갑사와 불갑산 산행

2014.09.22 10:16:00

요즘 날씨가 선선하여 나들이하기에 제격이다. 9월 16일 청주행복산악회에서 불갑산 산행을 다녀왔다. 영광의 불갑산은 올해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아름다운 상사화! 그리움이 번진다’를 주제로 상사화 축제를 여는 우리나라 꽃무릇 최대 자생지다.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가 우리나라 3대 꽃무릇 군락지다. 성주산자연휴양림 입구와 같이 최근에 조성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역사가 깊은 사찰 주변에 군락지가 있는 것은 꽃무릇 알뿌리의 쓰임새 때문이다. 옛날 사찰에서 경전을 묶거나 탱화 천을 바를 때 독성을 지닌 알뿌리를 갈아 풀에 섞어 발라 좀이 슬거나 벌레가 꼬이는 것을 막았다.

시골집 앞마당이나 산기슭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꽃이지만 꽃무릇인지 상사화인지 이름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꽃무릇이 필 시기가 되면 지자체마다 어김없이 축제를 여는데 용천사와 선운사에서는 ‘꽃무릇 축제’, 불갑사에서는 ‘상사화 축제’라고 하여 헷갈리게 한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가 없어 상사병에 걸리는 것은 같지만 석산이라고 하는 꽃무릇과 상사화는 꽃의 모양, 색깔, 개화시기가 뚜렷하게 다르다. 그래서 불갑사의 꽃무릇을 상사화라고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꽃무릇이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그 무덤에서 피어난 꽃이라거나 절집을 찾은 아리따운 처녀를 짝사랑하던 젊은 스님이 시름시름 앓다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전설 때문에 통상적으로 꽃무릇을 상사화로도 부르는 것은 아닐까.


7시 집 옆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중간에 몇 번 정차하며 여러 명이 통로에 앉아야 할 만큼 회원들을 태운 후 영광으로 향한다. 행복산악회는 오가는 길에 입이 즐거워 더 행복하다. 운영진에서 떡과 과일은 물론 커피까지 타서 자리로 배달한다.

석암님과 두런두런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호남고속도로 벌곡휴게소다. 화장실에 다녀와 오줌싸개상이 있는 연못으로 가니 물위에 무지개가 떴다. 셰익스피어가 ‘무지개에 다른 색을 첨가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던가. 아침에 무지개를 보니 오늘 하루가 그냥 더 행복하리라는 상상을 한다.


서해안고속도로 고인돌휴게소에서 정차했던 관광버스가 길가에서 분재처럼 멋진 조경수 소나무들이 눈길을 끄는 지방도를 달려 10시 50분경 불갑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꽃무릇이 주차장 주변까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여 놨다.

불갑산(높이 516m)은 주봉이 연실봉이고, 산의 아늑한 형상 때문에 산들의 어머니를 뜻하는 모악산으로 부르다 백제시대에 불교의 불(佛)자와 육십갑자의 으뜸인 갑(甲)자를 딴 불갑사가 아래편에 지어지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차장의 화장실 뒤편이 등산로 초입이다. 11시경 길게 줄을 이루며 불갑산 정상 연실봉을 향해 출발한다. 초입부터 무리지은 꽃무릇이 반긴다. 발걸음을 멈추고 상사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꽃대 하나에 잎도 없이 아기손바닥만한 꽃을 올려놓았다.


불갑산 산행은 초입부분의 오르막이 힘든 코스다. 우리네 인생살이처럼 산행에서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힘에 부친 사람의 산에 왜 왔는지 모르겠다는 불평과 처녀들의 산에서는 애인은 줘도 물은 주지 않는다는 농담도 들려온다. 11시 40분경 길이 사방으로 뚫린 덫고개의 정자에 도착해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한다.




덫고개에서 위쪽으로 200m 올라가면 우리나라의 마지막 호랑이가 살던 불갑산 자연동굴이 나온다. 안내판의 ‘불갑산 호랑이 유래’에 의하면 1908년 2월 불갑산에서 서식하던 호랑이가 농부에게 잡힌 것을 일본인 하라구찌가 당시 논 50마지기 값인 200원에 사들여 동경 시마쓰제작소에서 표본 박제한 후 목포유달초등학교에 기증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고 노적봉에서 만난 일행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법성봉에 올라 불갑사와 저수지 방향의 들녘과 산봉우리들을 바라본다. 투구봉은 나뭇잎이 가려 조망이 나쁘다.


수확의 기쁨으로 세상이 모두 들뜬 이맘 때 불갑산의 가을이 붉은 빛으로 물든다. 높은 산길에도 꽃무릇이 지천이다. 한참동안 꽃무릇과 벗하며 산길을 걷다가 나무계단과 암봉을 오르면 평범한 산길에서 장군봉을 만난다. 이곳에서 노루목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산길이 이어진다.


산길에서 위험한 길과 안전한 길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난다. 어느 산이든 위험한 길의 풍경이 더 멋지다. 위험한 길로 가면 암릉이 만든 산길이 멋지고 조망이 좋아 동쪽 방향의 풍경과 연실봉이 가깝게 보인다.

108번뇌를 소멸시키고 참된 진리를 행해 오르는 108계단과 도리천(33천)의 연화대(연실봉)로 오르는 통천(通天)계단을 지나면 불갑산의 정상 연실봉을 만난다. 조망이 좋지만 정상 표석을 배경으로 추억남기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서 편히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다.

정상에서 옛날 추억 속의 아이스케키를 판매하고 있는데 통에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요.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라는 문구가 써있다. 이곳에서는 아이스케키를 사먹는 것도 예술이다.




하산하다 구수재에서 용천사 1.03㎞ 표지판을 만난다. 또 하나의 꽃무릇군락지 함평의 용천사가 지척에 있지만 약속 시간 때문에 들리지 못하는 게 아쉽다. 불갑사가 가까워지자 꽃무릇군락지가 나타나 산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사찰 뒤쪽 산자락 구석구석에 군락지를 이룬 꽃무릇의 선홍빛 자태가 유난히 곱다. 저수지 주변이 온통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황홀경이라 가을은 꽃이 귀한 계절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안도현 시인이 "세상 사람들아, 꽃무릇을 보지 않고 가을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나는 가을꽃인 꽃무릇 앞에서 일장춘몽인 인생살이를 생각했다.



저수지 끝에서 만나는 불갑사는 백양사의 말사로 384년 마라난타가 창건하였다거나 백제 문주왕 때 행은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져 창건시기가 분명하지 않다. 고려 후기에는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 만큼 번창했지만 여러 차례 중창을 거치면서 절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다. 현재 대웅전(보물 제830호)을 비롯하여 팔상전, 칠성각, 일광당, 명부전, 만세루, 범종루, 향로전, 천왕문(전남유형문화재 제159호) 등이 있다.




사찰을 나서 주차장으로 가는 해탈교 주변까지 꽃무릇군락지가 이어진다. 꽃무릇의 고운 자태를 뒤로하고 백수해안도로로 갔다. 칠산 앞바다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 16.8km의 백수해안도로는 대한민국 아름다운 길 100선 중 9위에 선정되고, 국토해양부가 주관한 제1회 자연경관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바닷물이 온통 붉은 빛으로 변하는 해질 무렵에 백수해안도로가 황홀해지는데 오늘은 날씨가 받쳐주지 않는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정이 넘치는 뒤풀이를 하고 노을전시관을 둘러봤다.

국내 단 하나뿐인 노을전시관은 백수해안도로 주변 서해안의 낙조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곳으로 노을 전망대, 3D 입체영화, 노을배경 사진 찍기, 세계의 노을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나도 1000원 내고 멋진 노을배경 추억사진을 남겼다.

5시경 노을전시관 앞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서천공주고속도로 부여백제휴게소에 들르며 부지런히 청주로 향한다. 처음 출발지에 도착할 때까지 시내를 돌며 회원들을 내려주는 서비스도 최고다. 시간을 맞추기라도 한 듯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정확히 오후 9시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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