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방과 할망이 되어 제주 생태길 걷기

2015.12.15 14:55:00




효돈천의 아름다운 풍경
‘제주도’와 ‘관광’ 이 두 단어의 공통점은 바로 신비감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얼굴을 보는 것을 ‘觀光’이라 했다. 즉 임금의 얼굴을 보는 것은 빛을 보는 것처럼 신비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주 또한 억만년의 역사를 간직했으며 난대림과 상록활엽수가 우거져 있고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각종 기암괴석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신비감에 빠져들게 한다. 때문에 해마다 연휴가 되면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제주도에 다녀갈 정도라고 하니 제주도는 분명 우리에겐 신비의 섬이자 축복의 엘도라도인 셈이다.

10월의 넷째 금요일. 나는 우리 아파트 승강기 안에 붙어 있던 제주효도관광여행단 모집신청서에 기꺼이 서명을 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정 경비를 지원해주고 또 단지 내 여러 상가들에서 조금씩 찬조를 해준 덕분에 우리는 경로당 어르신들을 모시고 비교적 싼 가격에 제주생태관광길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 여행단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해안에 위치한 성산일출봉이었고, 그 다음이 서귀포 효돈천이었다. 효돈천은 우선 천천히 걷기에도 좋고 제주의 살아있는 자연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더구나 효돈천은 얼마 전 환경부에서 국가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고시하였고, 또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도 선정되었기에 꼭 한번은 걸어보아야 할 귀중한 곳이었다. 특히 이곳은 하례1리 주민들이 직접 트레킹 프로그램을 짜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어 누구든 편리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효돈천은 아직 일반인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이 아니어서 주로 가족단위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는 곳이다.

우리 여행단이 도착한 날은 마침 단체관광객들이 많아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젊은 연인끼리 다정한 부부끼리 또 우리처럼 단체관광객들이 효돈천을 걸으며 추억과 낭만을 쌓고 있었다. 문득 어느 신문기사의 제목이 떠올랐다. ‘제주 둘레길에서 느림의 미학을 즐기다’ 이 신문의 제목처럼 제주도 효돈천은 인위적으로 만든 관광지가 아니라 옛길을 찾고 마을과 마을을 잇던 길을 다시 연결한 철저히 자연친화적인 곳이었다. 그러기에 돌멩이 하나, 풀잎 한 포기에도 절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고 마을 주민들의 웃음과 눈물이 서려 있었다.

효돈천 천변 자락의 주민들과 만나다

아름다운 효돈천에서 만난 할망과 하르방들의 환한 얼굴 이면에는 의외로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제주 4·3사건과 그 와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벽장 속에 숨어 공포에 떨어야했던 어린 소년과 남편을 잃었던 젊은 새색시의 눈물이 묻어 있고, 동네 처녀 춘자의 웃음과 동네 총각 상철이의 달리기, 만철이의 삼각관계가 한 순간에 멈추던 날의 기억들과, 아이를 낳지 못해 남편의 방에 씨받이를 들여보내 놓고 밤마다 숨죽여 울던 제주아낙의 한숨도 묻어 있었다.

이처럼 천변길을 걷다보면 많은 사람과 사연들을 만날 수 있어 마치 이야기책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제주 효돈천길. 바람이 불어도, 햇살이 따가워도 나는 아내의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발길이 가는대로 우리 부부는 그렇게 천변길을 조용히 음미하며 걸었다. 제주는 사시사철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없건만, 특히 가을 추수를 앞두고 있는 제주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때문에 해마다 가을에는 바쁜 일손을 놓고 가을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제주도를 찾는 것이리라.
효돈천으로 들어가는 마을입구
효돈천은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모두가 그림이고 저마다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지만, 오랜 여행 탓에 다 볼 수는 없어 그나마 힘이 조금 덜 드는 효돈천 산책로 470미터를 통과해보기로 했다. 걸서악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웃소를 거쳐 남내소를 지나 망장포와 예촌망, 우금포를 구경하고 최종적으로 쇠소깍에 집결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걸서악을 출발하여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길을 따라서 얼마쯤 내려가자 곧이어 바닥이 훤히 보일정도의 맑은 물이 나왔다. 손으로 물을 한 움큼 쥐어 마셔보았다. 찌르르 내장까지 냉동시키는 차가운 맛에 화들짝 놀랐다. 마치 천연사이다가 있다면 이런 맛이 아닐까 할 정도로 물맛이 좋았다. 예로부터 하례리 주민들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 걱정 없이 지냈다고 했다. 바로 지근거리에 이처럼 맑은 효돈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육지는 가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이렇게 맑고 깨끗한 물이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니 부러웠다. 아주 먼 옛날에 천상의 선녀가 하강하여 이곳 효돈천에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사실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효돈천 옆 울타리엔 요즘은 보기 어려운 탱자나무가 둘러져 있어 오가는 길손을 반기고 있었다. 아마도 탱자나무의 역할은 효돈천을 오염시키려는 사악한 것들을 경계하려는 벽사의 의미가 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탱자나무를 감상한 뒤 한참을 내려가니 고사리를 비롯한 양치식물들이 마치 어서 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었다. 잠시 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천변을 따라 걷다보니 넓은 숲길이 나오고 중간 중간 마을로 내려갈 수 있는 소로도 나타났다. 효도천은 이렇듯이 고립되어 있지 않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소통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천 효돈천 남내소의 아름다운 물줄기
잠깐 동안 길을 헤매다 숲속을 지키고 있는 주목을 만났다. 수령이 몇 백 년은 족히 되었을 텐데 아직까지 베어지지 않은 게 신기했다. 나무꾼도 이 주목나무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꾼은 주목을 베려다 다음과 같은 노래 한 구절이 떠올라 포기했을 것이다.오동나무를 베자하니 순(舜)임금의 오현금(五弦琴)이라.

살구나무를 베자하니 공부자(공자)의 강단(講壇)이라.
소나무가 좋다마는 진시황(秦始皇)의 오대부,
잣나무가 좋다마는 한고조(유방) 덮은 그늘이라.

결국 나무들의 쓸모가 너무 많아 베지 못하고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주목을 살려주었을 것이다.

나무들 가득한 울울창창한 숲길을 빠져나가자 얼마 전 모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도 소개된 곳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휴대폰을 꺼내 검색을 해보니 사실이었다. 특히 제주도 방언을 사용한 인터뷰 내용이라서 더욱 실감이 났다.

"효돈천에서 혹시 목욕했던 곳은 따로 이수과?"
"목욕했던 곳은 먹는 물 바로 거기서 150미터 정도 위로 올라가다보면 커다란 물통이 이서"
"거기서 물이 솟아나는 거에요?"
"아니 솟아나는 건 아니고 비가 내려서 내가 치면 그 물이 한참 오랫동안 고여 이서"
"목욕했던 데는 지명이 이수과?"
"응"
“삼춘 그럼 얘기는 여기까지 다 끝났구얘. 이제 개인적으로 물어볼게 있는데 여기 어른와가지고 설쳠신디 막 옛날얘기들 물어봤잖아예. 근데 막 생각 안남쪄 안남쪄 해도 계속 캐묻고 영하난 어떵하우꽈"
"난 막좋다 옛날 것도 기억나고 살아난 거 생각나도 막 좋다"
"기특하우꽈"
"잘햄쪄"

휴대폰으로 인터뷰 내용을 읽다보니 어느새 제주의 석양이 구름에 묻힌다. 제주의 석양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다. 이곳에 오면 오직 애잔한 사랑과 행복만이 있을 뿐이란 듯, 석양은 제주의 바다와 어선과 바람과 갈매기를 친구삼아 황홀한 탱고를 추었다. 때론 해발 180미터의 평평한 능선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자그락 자그락 조개껍질이 부서지는 넓은 갯벌에서 스텝을 밟기도 했다.

아, 그대 이름은 황홀한 제주로구나

우리 부부는 다시 걷던 길을 재촉했다. 늦가을, 건강한 몸으로 이 길에 서서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이래서 사람들은 앞 다투어 제주를 찾는 것이리라.

하례리 중간마을을 지나니 가을 추수를 앞둔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제주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정경은 딱 10월 한 달 정도만 볼 수 있는 축복이라고 한다. 어느 날 땅 주인이 추수를 해버리면 이토록 풍요로운 들판도 쓸쓸한 늦가을 정경으로 급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길의 백미(白眉)는 중간마을을 가기 전 만나는 꼬불꼬불한 논둑길을 걷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인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이 길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들판마다 가득 찬 황금물결의 풍요로움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넉넉함이 묻어났다. 그래서 가을날 제주의 둘레길을 걸을 때에는 무척 조심해야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경치에 눈이 멀고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에 감각이 멎고 제주의 따뜻한 인심에 심장이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효돈천 가는 길에 만난 제주인심만큼이나 아름다운 하례마을.
하나하나 쌓아올린 돌담들에서 멀리 보이는 한라산까지
보이는 것마다 절경이로세.  (필자의 졸작 시 중에서)

멀리 사신(蛇身)처럼 굽이진 남내소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긴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다시 쉬엄쉬엄 길을 오른다. 이제 나타날 소(沼)가 남내소이다. 남내소는 효돈동과 하례리를 따라 바다로 향하는 효돈천 중간에 위치한 물웅덩이를 말한다. 남내소는 고개물, 댁물, 산이물보다 수량이 풍부하고 규모가 훨씬 큰 웅덩이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더불어 남내소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고 했다.

효돈천에 고귀한 양반집이 있었다. 그 집에는 양반의 딸과 머슴의 아들이 함께 살았다. 어린 시절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워낙 신분의 차이가 크다보니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양반집 딸은 혼기가 차자 부모님의 강요로 시집을 갔다. 사랑하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날 머슴은 남내소에 뛰어들어 그만 자살을 하고 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머슴의 시신은 물 밖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들은 양반의 딸은 남내소에 와서 머슴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그렇게 하길 백 일째 되는 날, 드디어 머슴의 시체가 떠올랐는데 시신이 전혀 썩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걸 본 양반집 딸도 남내소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는 슬픈 전설이다.

그러고 보니 남내소 주변의 삐죽삐죽 솟은 바위들이 언뜻 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처럼 보여 흥미로웠다. 남내소 밑으로는 긴소, 웃소, 알소가 이어지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비경들이다. 이런 연못에 슬픈 전설 하나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노란 감귤이 주렁주렁, 감귤체험의 감동과 재미 
길을 걷고 또 걷는다.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가 나를 자연 상태의 나무로 착각했는지 모자에 앉았다. 나는 고추잠자리를 머리에 이고 제주의 바람과 억새와 뭉게구름을 침구 삼아 함께 걷는다.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인 것처럼 물아일체의 완벽한 경지에 빠져든다. 얼마를 걷다보니 저 멀리로 감귤체험농장이란 흰색 팻말이 나타났다. 제주에서 감귤농장치고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감귤을 채취하고 있었다.

이곳 농장에서는 누구든 사전에 미리 신청만 하면 감귤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직접 딴 싱싱한 감귤을 한 입 베어 물자 알싸한 향기와 함께 시크름한 단맛이 입안에 번졌다. 싱싱해서 그런지 감귤 맛이 육지보다 유난히 좋았다.
망장포 언덕에 서서 왔던 길을 반추해보았다. 자연의 숨겨진 보물들이 하나둘 그 진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주는 돌덩이 하나, 나무 한 그루도 모두가 절경이 되고 예술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다. 천천히 느림의 미학으로 자연을 관찰하며 걷다보면 우리가 평소 발견하지 못했던 멋진 풍경들과 조우하곤 했다. 빠르게 걷는 사람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들. 느리게 쉬엄쉬엄 걷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는 특별 보너스인 셈이다.

또한 제주의 생태길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길이기도 했다. 멀리서 제주 하르방과 할망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들어 인사를 보냈다. 반가운 화답이 돌아왔다. 이처럼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있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는 인간의 길. 그 길이 바로 제주의 생태길이었다.

어느새 우리 일행은 하례리 효돈천 탐방로의 종착역에 도착했다. 이제 우리의 여로(旅路)도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또는 동료와 함께 인생을 논하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 길. 그 길에서 제주의 삶을 보았고, 제주의 역사를 보았고, 제주의 사랑을 만났다. 제주의 모진 비바람만큼이나 힘겹고 혹독한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온 작은 영웅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길은 제주 역사의 길이요 우리 어머니들의 눈물의 길이며 치유의 길이다.

우리도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 이 길에서 얻은 교훈을 이정표 삼아, 여전히 울고 웃으며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 길을 걸었던 우리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제주역사로 기록될 것을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
김동수 교사/수필가/여행작가/시민기자/EBS Q&A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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