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호국보훈의 달 특집
지난밤에 내린 봄비로 진충사 가는 길의 풍경은 갓 세수를 끝낸 아이의 얼굴처럼 해맑고 싱그럽다. 시원하게 뚫린 국도 29번과 77번을 달리다보니 오른편에 큼지막한 글씨로 ‘진충사’라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진충사로 접어드는 대요리의 고샅길이다. 아늑하게 펼쳐진 그 길을 800여 미터쯤 따라가다 보니 평화로운 마을길과 잘 어울리는 진충사가 나타났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사람은 없고 짙붉은 철쭉만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진충사(振忠祠)는 조선시대 명장이었던 정충신 장군(1576~1636)의 영정과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사당이다.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으며, 조선 인조 14년(1636) 8월에 왕명에 의해 건립된 사당이다. 그만큼 정충신 장군의 업적과 충성심을 높이 샀다는 증거일 것이다. 건물은 본당, 내삼문, 동재 겸 유물전시관, 서재, 외삼문, 내담장(길이 150m), 외담장(길이 80m)로 구성돼 있는데, 사당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에 팔짝지붕 겹처마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적비 1기, 홍살문 등이 있다. 사당 내에는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비롯하여 투구, 갑옷 같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75년 정충신 장군의 투구를 도난당한 이후 현재는 진충사에 모셔져 있던 유품 다섯 점을 장군의 종손가로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다.
진충사는 조선 인조 14년(1636)에 건립되었다가 영조 13년(1737)에 중수 된 건물로 그동안 몇 차례 보수와 이전이 있었다. 정조 24년(1800)에 정충신의 5세손인 곡성현감(谷城縣監) 정세홍에 의해 당진군 정미면 신시리로 이전되었다가 광무(光武)1년인 1897년 2월에 9세손 정재칠에 의해 지곡면 대요리 740번지 종손가 옆으로 다시 이건(移建)하여 73년 간 봉안해 오다가 1970년에 지금의 자리로 신축 이전하였다. 때문에 건물을 보는 순간 고전적인 느낌은 덜한 편이다. 사당 본당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가 쓴 ‘진충사’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 왼쪽부터 정충신 장군의 갑옷과 초상화
장군은 어느 날 권율 장군의 심부름으로 장계를 가지고 의주 행재소에 있는 이항복을 찾아갔다. 이항복은 첫눈에 정충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는 학문과 무예를 닦으라고 권유했다. 이항복은 정충신을 집으로 데려가 사서를 가르쳤고 그해 가을에 무과에 급제했다. 훗날 정충신은 이항복이 유배를 가게 되자 함께 따라가서 아버지처럼 모시며 은공을 갚았다고 한다.
인조 2년(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서울 길마재에서 전멸시켜 진무공신 1등이 되어 금남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당시 많은 공신들이 반군들의 몰수된 전답과 노비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으나 정충신 장군만이 오불관언하는 것을 보고 당시 장군의 상사였던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이 임금에게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전하, 이번 공신 가운데 오직 정충신만이 그 공적이 크면서도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사옵니다.”
이에 인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반군의 총수였던 이괄이 소유했던 마힐산 국사봉 일대의 토지 약 45만평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이로 인해 장군은 유택(幽宅)으로 국사봉을 택하였다. 장군은 생존 시에 아들 빙과 민을 대동하고 유택을 친히 잡아 놓고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반드시 이 자리에 장사지내도록 당부’한 곳이라고 전한다. 장군의 유언대로 사후에 이곳에 유택을 마련하고 진충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팔도부원수로서 청나라를 무찌르고, 1630년 평안북도에서 일어난 ‘유흥치의 난’을 평정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장군은 체구는 비록 작았으나 대범하고 청렴결백했으며 지혜와 안광이 샛별 같아서 무리들을 위압하는 조선시대의 명장이었다고 전한다.
정충신 장군의 인물됨을 나타내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정충신이 평안병사로 있을 때였다. 청나라와 우호 조약을 맺어야 하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잔혹한 오랑캐라는 소문이 있어서 선뜻 사신으로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정충신이 자진해서 청나라 사신으로 갔다. 청태조는 조선 사신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 보자마자 이렇게 일갈했다.
“너희 나라에 아무리 사람이 없기로서니 너같이 작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단 말이냐?”
그러자 정충신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조선에서는 예의를 갖추는 나라에는 대인(大人)을 사신으로 보내지만, 힘만 믿고 예의가 없는 나라에는 소인(小人)을 사신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청태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조선에서는 나를 도적이라고 한다던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훔쳤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정충신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천하를 훔치는 것보다 더 큰 도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청태조는 껄껄 웃으며 정충신을 정중히 상석으로 모셔 환대했다고 한다. 그의 사람됨을 단박에 알아본 것이다.
정충신은 무장이면서도 평소 꾸준히 저술에 몰두해 ‘만운집’, ‘금남집’, ‘백사북천일록’ 같은 명저를 남기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눈앞에 둔 1636년 5월 4일 한양 반송방(般松坊)에서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61세로 생을 마감했으니 아깝도다 시호를 충무(忠武)라 했다.
정충신 장군의 묘소는 진충사의 정 반대편에 있다. 진충사에서 800미터 정도 떨어진 마힐산 국사봉 중턱에 부인과 함께 나란히 쌍분으로 잠들어 있다. 2개의 봉분 중앙 전면에 묘비가 서있고 그 앞에 혼유석과 양옆으로 각종 석물이 세워져 있다. 부장품으로는 평상시 장군이 입던 갑주와 투구, 장검이 함께 묻혀있다.
장군은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작은 공은 이미 역사에 기록된 바이니 죽은 뒤에 문자로 공적을 찬양하거나 시호를 청하거나 비와 석물을 세우지 말고 다만 쓰던 그릇만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정말 그의 유언대로 무덤에는 공적비가 없다가 최근에서야 후손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매년 양력 4월 25일에 시민(市民)과 유림(儒林)이 모여 제향을 지내고 있다.
현지 교통
서산버스터미널에서 대산 행 시내버스를 이용 지곡 대요리 승강장에서 하차하여 진충사까지 걸으면 약 20분 정도가 소요됨.
고소고도로
1.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 → 운산 → 32번 국도 → 서산 → 지곡 → 대요리 → 진충사
2. 경부고속도로 천안I.C → 22번국도 → 예산(45번 국도) → 해미 → 서산 → 지곡 → 대요리 → 진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