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저녁, 한 아이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 아이는 2학년 ○반의 한 남학생이었다. 문자에서 그 아이는 기말고사 영어 공부를 하던 중,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 있다며 그것에 대해 한 번 더 설명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사실 그 문장은 워낙 복잡해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수업시간 여러 번 반복하여 설명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일부 아이들이 이해가 안 간다며 교무실을 찾아와 재차 물어보곤 했던 문장이기도 했다.
전 교과목 성적이 상위권인 그 남학생은 여타 과목보다 영어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늘 고민이 많은 아이였다. 그리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수업 시간 활동 참여도가 그다지 많지 않은 아이였다. 가끔 질문을 던지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오히려 질문한 내가 더 미안한 적도 있었다.
월요일 저녁,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 녀석이 교무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에 쥔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선생님, 어제 말씀드렸던 문장입니다."
녀석은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빨리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설명을 다하고 난 뒤, 다른 궁금한 사항이 없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머뭇거리며 속에 담아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 놓았다.
그런데 그 아이의 가장 큰 고민은 성적이었다. 최선을 한 만큼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시험 때가 되면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외운 내용도 문제지만 받으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영어 시험에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래서 영어를 포기할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고 하였다.
특히 가고자 하는 대학이 영어 성적이 필수인지라 합격을 위해서는 최소 석차 ○등급까지 올려야 한다며 본인의 심정을 허심탄회 이야기했다. 그리고 영어 성적을 올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감수하겠다며 좋은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녀석의 안타까운 마음은 충분히 이해 가지만 기초가 없어 아예 영어를 포기한 학생(일명 영포자)들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상황이었다. 사실 영어를 포기한 대부분 아이들은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 자거나 딴짓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쑤이다. 물론 모든 영포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반드시 영어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인지 수업시간 그 녀석의 집중력은 남달랐다. 그리고 녀석의 교과서는 수업시간 배운 내용으로 빼곡히 적혀 있어 가끔 교사인 내가 놀랄 때도 있었다.
매시간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정도로 녀석은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난 아이들 면전에서 이 아이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그 아이는 칭찬에 수줍어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스승의 날 내게 쓴 편지에서 자신 또한 수업시간 몰래 존 적이 많았다며 용서를 구한 적이 있었다.
우선 영어 교사로서 이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기로 하였다.
영어 시험을 망치면 대학에 합격할 수 없다는 지나친 강박관념이 그 아이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강박관념이 결국 시험 내내 그 아이를 공황상태로 만들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먼저 생각하여 지레 짐작 겁을 먹은 것이 분명한 듯했다. 그리고 영어에 대한 자신감 결여 또한 제 실력을 발휘하는데 큰 장애가 된 것이 분명했다.
우선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에 수업하기 전 아이들 앞에서 그날 배울 영어 지문을 큰소리로 읽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만든 문제가 머릿속에 오래 남는 만큼 하루에 배운 내용을 토대로 문제를 만들어 올 것을 주문했다. 단 문제는 인터넷에서 배겨오거나 타인이 낸 문제를 절대로 표절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처음에는 내 요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영어 성적 올리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나의 단호한 답변에 녀석은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어 성적을 올릴 수 있는 해답을 찾았다는 생각에서인지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가벼워 보였다.
기말고사가 채 십 여일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 방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녀석의 얼굴에서 그 어떤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튼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 녀석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지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