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나태주 시선집

2016.07.11 09:32:00

들꽃의 시인 나태주 시인이 시 선집을 냈다. 이번 선집은 특이한 면이 있다. 먼저 시인의 서문 일부분을 옮겨 본다. "이 책은 그리하여 시와 시인과 동시대 시인들에 대한 간절한 소감을 그때 그때 시의 형식을 빌려서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한 시대 한 시인이 그렇게 그렇게 이땅에 살았다 갔음을 기념하고 싶어서 내는 책이다." 시인의 말대로 이 선집은 1부 '시' 2부 '시인' 3부 '시인을 위하여'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모든 시 말미엔 시를 쓴 연월일이 표시되어 있는데 1970년대 초반부터 2016년도 작품까지 망라되어 있다. 이 시는 시로 쓴 시인의 자서전이며 시로 쓴 시론이자 시인론이다. 시집의 표제작을 먼저 읽어본다.

시 ‧ 2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1989.10.22>

이 시인에게 시 쓰는 일은 마당을 쓰는 일이며 꽃 한 송이 피우는 일이며 그리고 바로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된다. 마당을 쓰는 일은 내가 사는 곳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며 그것은 곧 지구 한 모퉁이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시 모든 부정부패와 사회악을 없애는 일과도 연결되는 일이다. 꽃 한 송이 피우는 일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이라는 말 만큼 오묘한 말도 없을 것이다. 하늘과도 같이 바다와도 같이 오염되면 안 되고 오염되어서도 오염될 수도 없는 말이다. 간결한 8행의 시 속에 우주적 진리가 담겨 있다.

시에게 부탁함


그 시절 힘들었을 때
살며시 이마 위 꽃잎으로 얹히고
어깨 위에 부드러운 손길로 왔던 누군가의 시
그로 하여 그래도 내가 숨 쉴 만했고
가던 걸음 이을 수 있었던 것처럼

가라! 이제는 나의 시에게 말한다
어디든 가서 내가 모르는 사람
그날의 나처럼 힘든 사람에게
부드러운 손길이 되고 가벼운 꽃잎이 되라

그리하여 뒷날
나의 시로 하여 그래도 견디기 힘든 날
숨 쉴 만했다고 견딜 만했다고
그래서 조금은 좋았다고 고백하게 하라.

<2014.8.16>

이 시인에게 시는 위로다. 다시 용기를 되찾게 해주는 명약이며 에너지의 원천이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 주술력이 있다. 시는 언어 중에서도 정제된 언어다. 그 언어 속엔 우주의 기운이 서려 있고 신통력이 배어 있다. 시인이 힘들었을 때 시인은 다른 시인의 시를 읽으며 그 에너지를 받아 힘을 얻었다.이제 시인은 자신의 시를 떠나보낸다. 어디든 가서 힘든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라고 부드러운 손길이 되고 가벼운 꽃잎이 되라고 떠나보낸다. 시인의 시론이 아니어도 이 시집은 시의 기능, 시의 효용가치를 간결하게 표현해주고 있어 시론으로 읽히기에도 충분하다. 2부 '시인'편엔 다양한 시인의 모습이 작품 속에 구현되어 있다.

서정시인

다른 아이들 모두 서커스 구경 길 때
혼자 앉아 집을 보는 아이처럼
모로 돌아서서 까치집을 바라보는
늙은 화가처럼
신도들에게 따돌림 당한
시골 목사처럼.

<1980.2.28)<br>
1980년도면 시인의 나이 30대 중반에 서정시인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시인이란 존재가 영광에 둘러싸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젊은 시인은 일찍이 간파한 것이다. 쓸쓸하게 소외되어 있는 모습, 주류에는 끼지 못하고 비켜서 있는 나약하고 눈물겨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시인의 원래 모습은 그런 모습일 것이다. 높고 화려하고 박수 받는 위치에서는 서정시가 자라날 틈이 없는 것이다. 가톨릭의 한 기도문에는 '우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하는 기도문이 있다. 가장 외롭고 가장 초라한 것에 대한 연민은 바로 시심이며 영성이다. 소외당하고 외로운 시인의 모습은 바로 가장 버림받은 영혼의 편에 서있는 존재가 된다. 그런 간절하고 고독한 비애 속에서 서정시는 자라난다는 메시지를 이 시는 담고 있다.

쓸쓸한 서정시인

세상에 와서
시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누가 날더러 시를 쓰라
시키지도 아니했고
시를 쓰면 좋겠노라 부추겨준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책을 길잡이 삼아
시의 나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려 하지 아니했다

세상에 나서
시인들을 만난 것은 더더욱 우연이었다.
내게는 이미 부모형제가 있었고
친구들과 이웃들이 있었지만
시인들을 만난 뒤로부터 그들은
내 새로운 혈족이 되어주었고
친지가 되어주었다
나 또한 그들의 아들과 조카와 손자와
동생과 형님과 오래비와 친구와 이웃이 되어
결코 후회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쓸쓸한 서정시인
바람과 구름을 따라다니다가 끝내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싶었던 사람
내가 길을 나서면 바람이 뒤따르고
구름이 앞장서서 나를 부른다풀이파리 비단방석을 깔고
새소리 풀벌레 울음소리 징검다리를 놓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 불어서 슬프고
햇빛 고우면 햇빛 고와서 외로운
나는 쓸쓸한 서정시인.

<1997.8.22>

이 시는 시나 시인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시를 쓰게 된 동기를 1연에서 밝히고 있고 2연에선 시를 씀으로써 새로 형성된 혈족과 같은 문인들과의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얼마나 많은 시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는지는 시집의 3부에 실린 시를 보면 안다. 이 시의 3연에서는 시인이 되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내가 길을 나서면 바람이 뒤따르고/ 구름이 앞장서서 나를 부른다/ 풀이파리 비단 방석을 깔고 / 새소리 풀벌레 울음소리 징검다리를 놓는다"고 시인의 일상생활을 소개하고 있다.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사는 삶이 시인의 삶인가보다. 먹고 살기 위해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집, 더 좋은 옷 더 좋은 차를 갖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모두 외면하고 도시로, 현대로, 첨단으로 빠져드는 시대에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싶었던 사람'을 자처하고 나서는 이런 시인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시인은 바로 그렇게 숨 막힐 것 같은 세상에 시원한 바람이 되고 한가로운 구름이 되는 존재임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작품 <시인‧6>에서는 더욱 명확히 시인을 정의하고 있다.

...............생략.............

풀잎 끝에 아침 한나절 쉬었다 가는 이슬이거나
이슬을 스치고 가는 바람이거나 그 위로 떨어지는
산새 울음소리 한 소절일 뿐이다

...............생략.............

그는 다만 세상에 나와 꽃구경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이거나
필경 흘러가는 하늘 흰 구름이나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는
철부지 아이일거다
시인은 시인일 따름, 더도 덜도 아니다

...............생략.............

<2004.11.10>

시와 시인에 대해 참 다양하게 표현하고 묘사하고 있다. 그 수많은 정의와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되니 시와 시인이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인가. 시는 그만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3부, '시인을 위하여'엔 66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미 작고한 시인들로부터 현재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현역 시인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어 있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를 연상케 할 만큼 많은 시인들과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군자란

-박목월 선생을 마지막 뵙고

원효로 4가 5번지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언제나 거기 그렇게 계시려니 하던 그분
언제나 따숩고 커다란 손으로 맞아주시려니
여기던 그 분,
한 번 큰절이 아니라
두 번 큰절로 마지막 뵈오러 가는 길
이제 이 길목도 마지막이구나 싶어
더듬더듬 막걸리 집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씩 사서 마시며 가는 길
주인은 가셨어도
상가 뜨락 구석지
새봄맞이 군자란은
탐스러운 꽃대를 올리고 있었다.

<1978.3.24>

이렇게 박목원 선생님을 마지막 뵙던 모습을 회상하기도 하고 김용직, 신석정, 전봉건, 김규동, 박남수, 구상, 김광섭, 송수권, 박용래 시인... 등 작고 시인부터 허영자, 유안진, 김남조, 이해인, 민영, 오세영, 이건청 시인 등 현역 시인에 이르기까지 66편의 시 속에 많은 시인들과의 교분이 오붓하게 담겨 있다.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여 시를 한 편 발표하고 있는데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희화해 놓은 작품이어서 웃음과 흥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나태주

내 이름은 나태주
평생 동안 자동차 없이
버스 타고 택시 타고
KTX타고 전국으로
문학 강연 다니며
사람들에게 농을 하기도 한다
이름이 나태주라서 자동차 없이도
잘 살아간다고
나태주, '나좀 태워주세요'
그래서 사람들이 잘 태워준다고.

<2015.4.26>
최일화 시인/2011.8 인천남동고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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