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 천재화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4-2001).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운보 김기창과 ‘바보산수'로 표현되는 그의 화풍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운보는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화가'이며, 한번쯤 ‘운보의 작품을 구경이라도 해봤으면' 하는 생각을 했음직 하다. 그러나 놀라지 마라. 누구나 운보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수도 없이 만져봤다. 아무리 가난하기로서니 만 원 한 장 가지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상이 바로 운보의 작품(1975)이다. 그만큼 운보는 우리의 생활 가까이 있다. 그러
나 운보는 2001년 1월 23일자로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만원짜리 지폐의 세종대왕상은 운보의 작품
이른 겨울의 토요일 오후. 운보의 체취를 찾아 차를 몰았다. 중부고속도로 증평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511번 도로를 따라 초정약수 방향으로 향하다가 주성대학 쪽으로 우회전해서 2킬로미터쯤 가다보면 ‘운보의 집'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운보의 집이 있는 청원군 내수면 형동리는 운보의 외가가 있던 청주와 가까운 곳으로, 풍수가 지세(地勢)를 살펴 선정한 곳이다. 외할머니처럼 푸근한 다섯 겹의 산이 운보의 집을 감싸고 있고, 청원의 넓은 들과 촌락을 고즈넉히 내려다 보는 양지바른 산기슭이다. 3만여 평의 넓은 공간에는 운보가 생활하고 그림 그리던 운보의 집과, 운보미술관, 운보공방, 도예교실, 레스토랑, 야외수석공원, 운보와 부인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을 합장(合葬)한 묘소가 있다.
운보의 집은 학교 단위로 방문하는 학생들도 많다. 미리 예약할 경우 도예체험을 할 수 있고, 김형태 학예실장을 찾으면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김실장의 이메일 주소 첫머리는 ‘woonbee10'이다. ‘운보를 10년 동안 모신 비서라는 의미'라고 한다. 청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운보가 김실장을 불러놓고 한 말이다. “너는 힘들더라도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네 느낌을 그대로 기록만 해도 나중에 큰 힘이 될거야". 이때부터 김실장은 운보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운보를 모시면서 실소를 금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운보를 안다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 사람들의 말이 대부분 틀리기 때문이었다.
“운보가 친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였다, 만나서 술을 함께 마셨다, 전화를 했더니 한번 놀러 오라 했다, 둘째 부인이 있다"는 말들이 그런 예라며, “선생님의 아들은 젊을 때의 선생님과 너무 닮아서 구별하지 못할 정도예요. 술은 입에 대지도 않으셨고, 전화는 당연히 받지 못했어요.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몇 해 전까지도 부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가에 이슬이 맺히신 분인데 둘째 부인을 들였겠습니까?" 김실장은 연못 옆의 정자를 오르면서 말했다. “운보는 이곳에 앉아 미술관 뒷쪽의 부인의 묘소를 즐겨 보곤 했어요. 지금이야 이장(移葬)해서 운보와 합장했지만." 운보의 부인에 대한 그리움은 운보미술관을 들어서면 왼쪽 벽에 걸려있는 운보의 어록(語錄)한 구절에서도 잘 표현된다.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고인이 된 아내의 목소리를 한번이라도 들어보지
못한 게 유감스럽고… 날더러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면 도인(道人)이 되어 선(禪)의 삼매경(三昧境)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아내를 잃은 운보는 서울 성북동에서 도를 닦는 심정으로 살고자 하여 한동안 작품에 운보라는 아호 대신 ‘한성도인’이라고 썼다. “나의 어머니고 선생이고 애인인 우향이 죽었어요. 세상을 살맛이 다 없어져요. 그런 여자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어요. 그래서 우향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 앞에 있으려니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그게 바로 바보산수예요. 훌륭한 아내를 잃어버린 바보라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바로라는 뜻이예요.…" 76년 1월 우향이 타계하고 실의에 빠져있던 운보가 민화풍의 작품을 개발하여 ‘바보산수’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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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우향은 애인이며 동료이자 어머니같은 존재
부인 우향은 7세 때 장티푸스를 앓아 귀머거리· 벙어리가 된 운보의 말문을 틔어준 어머니 같은 존재이자 애인이며 동료화가였다. 운보와 우향은 생전에 몇번이나 개인전을 함께 열기도 했고, 운보미술관에는 운보의 작품 100여점과 함께 우향의 작품 150여점과 소장품들이 함께 전시돼 있다. 운보미술관은 의형제를 맺은 김흥배 이사장(한국외대)이 운보와 우향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서 1985년에 세운 운향미술관을 증축한 것이다. 여기에는 운보의 셋째 동생인 월북화가 김기만 교수(평양미대)의 작품 ‘태양을 따르는 한마음'도 전시돼 있다. 운보미술관 안에는
운보의 오리지널 판화와 도자와 아트상품, 서적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아트숍이 있다.
“마지막 소원은 도인이 되어 禪의 三昧境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
전통 한옥인 운보의 집은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과 문화재연구소 김동현씨가 구상하고 설계를 했고, 남대문 중수에 참여한 대목수가 건축했다. 운보는 이곳에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을 겸한 거실에는 운보의 화구(畵具)들이 늘려있고, 거실벽 운보의 큰 사진 밑에는 우향이 사용하던 거문고와 가야금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안방에는 나무침대와 옷장이, 옷장 속에는 운보가 입던 청바지와 빨간목도리, ‘雲甫'라는 낙관이 새겨진 빨간 양말이 차곡히 정리돼 있어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운보가 들어올 것만 같았다. 거실 방문 곁의 서랍장 위에는 작은 예수상이 놓여 있었다. “운보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감리교를 믿었어요. 그러다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로 들어가서는 장로교로 바꾸었다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은 뒤로는 천주교로 개종했지요."
“우리들 가슴에 박힌 못을 뽑아 주세요"
김 실장은 운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동심(童心)이라고 했다. “다섯명의 식대로 고작 5천원을 내시는가 하면, 2,700원짜리 잡지 한 권을 2만 원 주고 사시는 모습에서 청량감을 느끼곤 했어요." 운보는 “어린이들은 부어넣는 대로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어린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한번은 역전을 지나다가 모금함을 들고 구걸하는 농아를 보고는 “정당한 방법으로 일을 할 수 있는데 구걸을 한다"고 혼을 내고는 “스스로 바보 취급을 받는다"면서 내내 슬퍼하기도 했다. 운보가 청원으로 낙향한 데에도 장애인을 위한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청각장애라는 이유로 우수한 실력을 가진 박재권 군이 서울대 미대에 탈락하자, 장애학생 1백여 명이 한국 구화학교에 모여 “제발 우리를 가슴에 박힌 못을 뽑아 주세요"라는 구호와 함께 ‘베토벤' ‘김기창'이 적힌 피켓을 들고 말없는 농성을 벌인 일이 있었다. 이들과 격려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운보는 학비 무료의 순수미술대학을 구상하고 농아복지사업을 시작했다. 미술대학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운보는 장애인들을 위해 활발한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했다. 운보원을 만들어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훈련교육을 실시하고, 한국농아복지회(1979),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1983), 장애자복지대책위원회(1998), 장애인먼저운동 상임고문, 세계농아연맹 문화예술분과 부위원장 등을 맡기도 했다.
운보는 우향과의 사이에 1남 3녀의 자녀를 두고 1만 5천여점의 작품을 남기면서 우리 화단에 큰 획을 그었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가슴에 박힌 큰 못을 빼어주고 그 자리에 ‘가능성'이라는 희망을 심어주고는 아내곁으로 갔다. 아마 그는 어린아이 같이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구름 위의 道人이 되어 우리를 내려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