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 시황제에 이어서 두 번째로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한나라를 세우고 황제(고조)로 즉위하였다. 시황제가 그동안 백성들의 욕을 한 몸에 받으면서까지 국가 체제를 잘 다져 놓았던 터라 진나라 시대의 제도, 즉 중앙관료 조직이었던 '3공 9경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정하고 지방의 행정제도는 기존의 군현제를 보완하였다.
개국공신 처리 해법, 군국제
평민출신이었던 고조에게는 하나의 핸디캡이 있었다. 출신을 중시하는 중국사회에서 뭔가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시황제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행할 입장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카리스마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앙집권제와 옛 봉건제도를 합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러한 절충식 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 한다. 사실 고조가 봉건제도를 다시 활용하고자 했던 이유는 공신들에게 대한 논공행상 문제가 깊이 깔려 있었다. 공신을 섭섭하게 대하면 물론 면전에서는 아니겠지만, '폐하께서 그 자리에 계시기까지'라고 하면서 투덜거리기 마련이다. 개국이나 정변에는 반드시 공신이 생긴다.
목숨을 걸고 주군을 도와 대업을 이룬다는 대의명분은 물론 '좋은 세상 만들기' 혹은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고 종묘사직을 위한다'는 것이지만, 주군을 도와 싸우는 대신, 나중에 성공하면 한 자리 주어야 한다는 암시적인 묵계가 깔려있는 것이다. 이미 일종의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 - 그림자 내각)이 구성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목적이 이루어지면 공신은 애물단지가 되며 공신은 공신대로 토사구팽 신세가 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고조의 입장에서는 공신을 어떻게 섭섭하지 않게 기술적으로 처리하느냐가 현안문제였다. 우선 지방(郡)에는 관리를 임명하여 파견하는 한편, 공신들은 유씨 일가와 함께 분봉왕으로 삼고 어떻게 나오나 보았다. 생각이 단순하여 만족하고 별 생각 없이 사는 공신은 제외하고 서서히 숙청의 칼날을 들여대기 시작했다.
중국사에서 제후들이 중앙정부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예가 많았다. 중국이라는 땅이 워낙 넓어 고조의 깊은 뜻(숙청구실을 만들려는)을 알아채지 못하고 제후들은 제후들대로 마치 독립국처럼 행세하려고 하였다. 고조는 재위기간 동안에 자신에게는 물론, 태자에게도 짐이 될 공신들을 갖가지 구실을 붙여서 제거하였다. 그의 통치 스타일은 시황제를 반면교사로 삼아 점진주의를 택하였다. 급진주의가 어떤 폐단을 낳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세와 노역을 경감시켜주고 시황제나 초패왕의 경우와는 달리 백성들을 어루만져 줌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는 데 성공하였다.
무제의 국제화와 실크로드
극동은 물론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떠오른 한나라는 당시 한강 이남의 진국과 교역하고 있었는데, 고조선의 우거왕이 중계무역을 독점하기 위해서 한나라에게 진국에 대한 직접교역을 금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고조선의 급성장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한무제(漢武帝 : BC 141~87)는 대군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쳤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귀족지배계층의 내부분열을 획책하여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복속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무제는 54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면서 한족(漢族)과 중화(中華)라는 국가이념을 확립하면서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대내적으로는 지방제후를 억눌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음으로써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 사상이 정립되어 모든 것을 이분법적 화이론(華夷論)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좋지 않은 습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기원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하고 주변민족에게 자신의 연호를 쓰도록 강요하면서 이에 따르지 않는 주변국들을 하나하나 복속시키고 주변의 복속국에게 중국의 역법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그의 치세 중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편찬되었는데 비록 중화적 사관으로 주변 민족을 폄하한 책이지만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 사기에는 삼황오제의 전설을 비롯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표(表)·서(書) 등의 기전체로 쓰여 있다. 무제는 베트남을 정복하는 한편 본격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고조가 통일할 당시만 하여도 북방민족들은 한나라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었으며 특히 흉노가 대표적 존재였다.
그 무렵 소위 '모두루 대단군'이라 일컬어지는 모두찬위〔冒頓單于 : BC ?~174〕라는 영웅이 나타나 동아시아에 유목민족 최초의 대 국가를 건설하여 그 위세가 서쪽으로 파미르 지역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제 통일 한제국을 세운 고조 유방의 입장에서 흉노야말로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여서 모두찬위를 정벌하기 위해서 출병하였으나 책략에 빠져 패주하고 말았다. 눈엣가시를 빼내려다가 다래끼가 난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조는 별 수 없이 강화를 맺고 매년 조공을 보내는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무제는 흉노와의 정면대결을 북방정책의 기본으로 삼아 위청(衛靑)과 곽거병(藿去病)을 보내 흉노를 몽골초원 바깥으로 몰아냈다.
그의 야심은 흉노정벌에 이어 서역 원정으로 이어졌다. 흉노의 포로를 통해서 서역을 알게 된 무제는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출장을 보냈는데, 장건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大月氏國〕까지 가서 파르티아〔安息國〕와 페르시아〔波斯國〕 등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건에 의해서 알려진 서역으로의 교통로는 나중에 당나라 시대 이후 '실크로드(비단길)'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서양사를 원격조정한 무제
그리고 민족이동의 도미노 현상이 바로 무제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 또는 시나리오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흉노정벌에 그 목적이 있었으나 중국 북방에서 밀려난 흉노의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하는 바람에 세계사에서 말하는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흉노의 일부가 한나라에 밀려나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자 원래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대월씨국의 여러 부족들이 남쪽으로 밀려나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북서부에 걸친 이란계 쿠샨 왕조를 열었고, 더 서쪽으로 진출한 흉노의 일부는 소아시아와 발칸반도 북부지역을 타고 유럽 중부까지 진출하여 게르만족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바람에 결국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이어져 로마제국의 영토를 침범케 함으로써 서로마제국은 용병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하고 말았다(AD 476).
또한 게르만족은 중세가 시작되면서부터 온통 유럽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오늘날의 유럽이 역사적으로 성립된 시기가 바로 민족 대이동 기간이었고 특히 유럽 일대의 민족 구성도 이때에 이루어졌다. 게르만족에게 있어서 훈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아틸라(Attila : 434~453)'는 온통 유럽을 휘저어 놓았다. 헝가리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카프카스, 서로는 라인, 북으로는 덴마크, 남으로는 도나우 연안까지 정복하고 동로마황제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했다. 뿐만 아니라 451년에는 갈리아를 침공하고 파죽지세로 로마로 쳐들어와 전 유럽을 전율케 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1세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유럽은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훈족의 일파가 중부 유럽에 나라를 세웠는데 그들이 바로 마자르인이며 국호는 헝가리였다.
교조적 이상주의자 왕망
무제(武帝)가 죽자 잇달아 어린 황제가 등극하였다. 어린 황제가 등극하였다는 이야기는 쉽게 말해서 태후 또는 그녀가 지명하는 섭정이 등장하는 것인데, 이때부터 외척과 환관들이 전횡을 일삼아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한 군주들은 하나같이 마마보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결단력이 부족한 전한 제11대 황제 원제(元帝 : BC 75~33)는 나랏일을 외척에게 넘겨버렸는데, 그중 외척 가운데 왕망(王莽)이 원제 때에 권력을 휘둘러대더니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대사마 겸 대장군이 되어 국사를 좌지우지하였다. 그러다가 왕망은 실권자의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평제를 독살하고 겨우 두 살 박이 어린애를 옹립하고 섭정을 맡았지만 이 역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도 아예 '신(新)'이라 바꿔 버렸다(AD 8).
스스로 황제가 된 왕망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획기적(?)인 일을 단행하였다. 나름대로는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다고 생각했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교조적이며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재정의 충실화를 기한다는 명분으로 통화량과 인플레이션은 고려하지 않고 소위 왕망전(王莽錢)이라는 오수전(五銖錢)을 마구 주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지주의 전횡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의 모든 전답을 황제의 소유로 하였다. 물론 지주들의 반발을 샀으나 이를 힘으로 누르고 노비를 사유물로 사고파는 행위를 금지하고 상인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왜냐하면 장사한답시고 중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황제를 비난하는 입을 막아 버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명분은 대상인들의 담합행위와 독과점을 방지하여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왕망의 개혁은 복고적이며 공상적이었다. 그리고 왕망은 흉노를 공략하려고 괜히 고구려를 끌고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때 고구려의 유리왕이 이에 따르지 않자, 그때부터 중국 역사서에 고구려를 비하하는 하구려(下句麗)라는 단어가 곳곳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역대왕조의 흥망사에는 외척과 환관이 반드시 등장한다. 환관은 최고 통치자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존재이므로 얼마든지 '인의 장막'을 칠 수 있어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환관의 눈 밖에 나면 끝장이었다.
후한은 후환(後患)을 남기고
고조의 9대 손인 유수(劉秀)가 그의 형과 함께 거병하여 왕망을 치고 유씨 왕조를 회복하였는데(AD 25) 그가 바로 광무제이다. 그는 수도를 뤄양으로 정하고 정치적으로는 지방 호족세력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황실-호족 연합통치를 하였지만, 이러한 통치제도는 나중에 삼국시대의 군웅할거(群雄割據)라는 후환으로 이어져 한나라의 명운을 재촉하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관료정치를 구축하기 위해서 유학을 더욱 장려하여 여러 학파가 생겨났다. 이에 비례하여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이 중국의 고질병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광무제 역시 전한(前漢)의 무제와 마찬가지로 서역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무제시대의 판도를 회복하고 계속 여세를 몰아 여러 나라를 복속시켜 그 위세가 파미르 지역 동서에 걸쳐 있었다. 광무제의 서역진출은 서기 1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는 서역경영의 책임자로 반초(班超 : AD 32~102)를 임명하여 출장을 내보냈다. 반초는 서역으로 떠나면서 지금도 사람들이 즐겨 쓰는 아주 멋있는 유행어를 남겼다.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반초는 호랑이 새끼를 잡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중원에 알려지지 않았던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서역경영의 천재인 반초는 부하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즉 로마제국에 파견하였다. 비록 로마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대진국(大秦國) 황제 안돈(安頓 : 오현제의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의 사신이 해로를 통해서 중국에 와서 당시의 황제 환제(桓帝)를 알현하였다(AD 166). 그러나 두 제국은 모두 깊은 병이 들어 있었다. 후한은 환관과 외척이라는 병이요, 로마 제국 역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