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초기에는 너무 일찍 결혼하는 것이 문제였다. 계몽주의자들이 비판한 한국의 구습 가운데 조혼제도는 단연 상위에 랭크되었다. 국가의 발전과 영광을 위한 동량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이 조혼으로 인해 색욕, 즉 성관계에만 열중하여 학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가 생기고 신세대 학생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이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았다는 얘기는 없다. 신문과 잡지에서 피력하는 성교육의 중심은 순수한 혈통과 종족 보존을 위한 방법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1910년 <대한매일신보> 5월 22일자 신문에는 황당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이렇다.
황해도 황주군 영풍면 안심촌 이승각 씨의 부인은 본 월 13일 밤에 해산을 하였는데, 어린아이의 머리가 둘이요 꼬리가 하나요, 양경과 음문이 하나씩이다.(중략) 홍주군 내동 등지에서는 암캐 하나가 새끼 하나를 낳았다. 그 새끼의 머리는 사람의 머리요, 몸뚱이는 개의 몸뚱이라더라.
머리가 둘이고 꼬리가 하나며,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를 각기 하나씩 달고 나온 아이. 과학이 발달한 결과 이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이란성 샴쌍둥이일 것이다. 그렇지만 100여 년 전 사람들은 이 아이를 과연 ‘인간’으로 믿었을까? 또한 인간의 머리와 개의 몸뚱어리를 지닌 생명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半人半獸) 켄타우루스가 수천 년의 시공을 가로질러 한국에까지 상륙한 것일까? 모두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같은 이야기들. 성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뭔가 신비하게 꾸며져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실시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 이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1982년 문교부는 ‘순결교육’이란 용어를 ‘성교육’으로 대체하였다. 각 학교는 문교부에서 발간한 성교육지침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성교육을 실시하였다. 8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이란 신체해부도를 보거나 마지막에 살아남은 한 마리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 여성이 임신한다는 정도다. 성교육의 초점이 청소년들의 성이나 성적 욕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지 않았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지극히 이론적이고 따분한 지식의 습득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성문제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학교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섹스는 종족보존을 위해서만
근대 초기에는 너무 일찍 결혼하는 것이 문제였다. 일명 조혼제도가 전사회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이 비판한 한국의 구습 가운데 조혼제도는 단연 상위에 랭크되었다. 국가의 발전과 영광을 위한 동량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이 조혼으로 인해 색욕(色慾), 즉 성관계에만 열중하여 학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가 생기고 신세대 학생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이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았다는 얘기는 없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성교육을 시켰는지도 알 수 없다. 신문과 잡지에서 피력하는 성교육의 중심은 순수한 혈통과 종족 보존을 위한 방법이다. 이에 덧붙여 과도하거나 문란한 성관계는 질병을 유발하거나 국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국가적 낭비로 비난받았다. 조혼의 폐단이 지속되면 “이천만 동포가 멸종되고 삼천리강토가 타국의 영토가 될 것”이라는 과격한 논리가 도출될 만큼 조혼제도는 계몽가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그렇다면 100년 전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의 표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 학생이 있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1906)에 등장하는 학생들이다. 남학생은 구완서이고 여학생은 김옥련이다. 이 둘은 미국유학생이다. 외국에서 어렵사리 공부를 마친 이들은 어느덧 서로를 자신들의 반려자로 생각하고 결혼할 것을 다짐한다. 그런데 100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련은 아버지 김관일의 의사와 상관없이 구완서와의 결혼을 결정한다. 자유연애라고 할까.
옥련과 구완서의 결혼관은 단순히 구습에 대한 반대가 아닌, 각자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배우자를 선택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결혼은 서로에 대한 사랑에서 기반 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이끌고 갈 동반자를 구하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동지적 결합이자 일종의 계약이다. 옥련이는 ‘조선부인을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구씨와 혼인 언약을 맺고 구완서도 ‘한국을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옥련과 혼인 언약을 한다.
자신들의 결혼에 대한 문제보다 국가를 향한 열정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옥련의 모습은 상식의 차원을 넘어 기이한 사명감으로까지 느껴진다. 비록 구완서와 김옥련의 이런 모습이 과장되어 보일지라도 국가에 대한 열정으로 표백되는 순간 아무런 문제도 없는, 그저 지고지순한 애국의 열정으로 비칠 뿐이다. 옥련과 구완서의 결혼관은 ‘개인’보다 ‘국가’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대, 개인의 모든 열정을 국가를 위해 헌납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현실 속에서는 참으로 모범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사랑의 딜레마
연애는 결혼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믿음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섹스 또한 결혼한 성인남녀들만의 ‘공인된’ 특권이다. 결혼 전에 남녀가 몸을 섞는다면 사회로부터 매도당하기 일쑤다. 건전한 연애란, 연애 속에서 싹튼 낭만적 사랑이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육체를 ‘결합’하기 전까지는 내숭과 호박씨를 적당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성욕에 대한 일정한 거리 두기. 사랑은 숭고한 것이며, 섹스는 그 숭고한 사랑을 흠집 내는 것이라고 ‘근대인’들은 생각했다. 만남에서 사랑까지 그리고 다시 한 몸이 되어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을 때까지의 시간은 무척이나 길다.
유교적 질서가 전 사회를 뒤덮었다는 조선시대에는 성욕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소설의 문맥에서 본다면 조선시대의 남녀들에게 과연 정조의 문제, 육체적 사랑이 지금처럼 억압되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춘향전>에서 성춘향과 이도령은 만나자마자 밤을 기다려 한 이불 속으로 달려든다. 얼마나 요란한 관계를 맺었기에 “삼베 이불 춤을 추고, 샛별 요강은 장단을 맞추어 청그렁 쟁쟁, 문고리는 달랑달랑”거렸다. 더욱이 그들은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네 아래 굽어보니 오목 요(凹)자. 좋구나. 내 아래 굽어보니 내밀 철(凸)자. 좋구나!”하며 낯 뜨거운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요즘으로 말하면 <춘향전>은 청소년보호법에 걸릴 외설 소설이다. 게다가 두 주인공이 모두 미성년자가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머리만으로 이해되는 감정이 아니다. 언제나 몸과 마음이 한 방향으로 간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무렵 한국에도 사회진화론이 유입된다. 우생학(優生學)을 동반한 사회진화론은 한국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좋은 혈통을 지닌 강한 인종으로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욕의 통제이다. 또한 성교를 통해 피가 유전된다는 이야기가 ‘과학적 사실’이 되어 한국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해 갔다. 문란한 성생활은 순수한 혈통을 ‘잡종’으로 만드는 초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피의 순수성, 민족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민족주의의 기반인 것이다.
그렇지만 육체적 사랑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자객과 같았다. 말할 수 없고 함부로 실천할 수 없었지만 육체적 사랑은 1920년대 들어 빈번하게 사회적 이슈를 생산해냈다. 1920년대 후반 한국은 포로노그라피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각종 도색잡지와 나체화보 그리고 성에 관련된 서적들이 독서계를 강타한다. 많은 사람이 일본에서 수입된 잡지와 그림에 넋을 빼앗겼다. 신문 광고는 연일 <성전(性典)>을 비롯한 잡지와 누드집을 보란 듯이 선전했다. 미성년자에게 팔지 말아야 한다는 규제가 없었으니 돈이 있다면 누구든지 책을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PAGE BREAK]
<별건곤> 1927년 12월 호에는 김규택(金圭澤)이 그린 삽화 한 장이 실렸다. 자기 방에 틀어박혀 ‘독서에만’ 열중하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子 : 아이고. 머리 아파.
母 : 밤낮 공부만 하니까 그렇지.
너무 공부에만 힘쓰지 말라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스런 걱정을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어머니는 아들이 무슨 공부에 그리 정열을 쏟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아들의 책장을 보면 온갖 성에 관한 책들이 즐비하다. <성욕과 연애>, <이성을 끄는 법>, <생식기도해>, <성욕학>(하트가 그려져 있다), <나체미>, <성교의 신연구>,
조선 학교에 성교육을 許하라!
1930년대까지 학교에서 성교육은 실시되지 않았다. 여전히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고리타분한 경구가 가정과 교육계에 잔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성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학생들의 성문제는 뒷구멍으로 숨겨만 두고 내놓고 가르쳐 주기를 꺼려했다. 1929년 2월 <별건곤>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린다. ‘학교와 가정의 시급 문제-성교육 실시 방책’이다.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시급한 문제’가 바로 성교육이었다. 잡지에 글을 기고한 사람들의 면목을 살펴보면 대부분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학생들의 성교육에 대해서 일대 지상토론을 펼쳤다.
남학생들의 성 문제 중에서 ‘자위’는 건강에 해로운 행위로 지탄받았다. “한때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자위를 하게 되면, 혈색이 나빠지고 신체가 허약해지기 때문에 학업에 지장을 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건전한 뇌와 신체’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중학교 교육에서 수음(手淫)을 하지 않게만 가르쳐도 된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뻗치는 성적 에너지는 운동으로 풀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운동만으로는 억제된 성적 에너지를 배설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운동도 아니고 도덕관념을 키워 욕망을 억제하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의견이 등장한다. 학생들에게 고상한 인격을 양성하여 주고 지혜와 이성을 밝게 하여서 내적 자기를 충실하게 하여주면 된다니. 정말 다분히 이상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올바른 성교육의 방법으로 시각적 매체를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과연 어떤 매체를 활용할 것인가. 바로 인체모형이다. 이는 단순히 인체의 해부학적 모형이 아니다. 당시 상점에서 이 모형을 팔았던 모양이다. 성병에 걸려 비참한 형체를 지닌 신체의 모형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자는 것이다. 성병에 걸린 사람을 표본으로 만든 모형을 활용하여 학생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만약 학생들이 그 표본을 보게 되면 그 끔찍한 것에 딴생각이 달아나 버림으로 늘 억제할 수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런 의견을 주장한 교육가 역시 젊은 시절 성욕이 넘쳐 났을 때 그 모형을 보고 성욕을 억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서양은 ‘만국위생박람회’를 개최한다. 각 국가를 순회하면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행사였다. 사회진화론과 우생학, 즉 인종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만국위생박람회에 등장한 것이 신체의 모형이다. 여기에는 매독에 걸려 태중에서 죽은 아이의 모형과 각종 성병에 걸려서 고통스럽게 죽은 사람들의 모형이 적나라하게 전시되었다. 모형이긴 하지만 실물과 흡사한 인체가 사람들에게 낱낱이 공개되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성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곳은 아직도 인터넷에 유포된 기괴한 내용의 사진과 글, 주위 친구들의 불확실한 경험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비행청소년, 불량청소년이라는 ‘차별과 구별 짓기’의 이름표를 들먹이면서 학생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성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1920년대 후반 한국에 불었던 학생들의 성교육. 21세기가 되었지만 한국의 성교육은 그리 변한 게 없다. 바야흐로 꽃 피는 사춘기는 영원히 반복될 텐데 언제쯤 청소년의 성은 자연스럽게 커밍아웃 될 수 있을까? 그래, 열심히 ‘운동’만 하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