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학교에서는 ‘키스’ 금지

2006.06.01 09:00:00

신아연 | 호주칼럼니스트


우리나라 고교에서 ‘학생들의 흡연’이 학교의 골칫거리라면 호주는 10대들의 무절제한 성적 방종이 문제가 되고 있다. 남녀학생들의 분별력 없는 행동이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지다 보니 최근에는 연방정부의 한 국회의원이 “중·고등학교에 콘돔 자판기를 설치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은 고등학교 11학년, 10학년(한국의 고2, 고1)생이 된 두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닐 무렵, 적지 않게 놀란 일이 있는데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당혹스럽게 기억되는 것이 있다. 그때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는 대학과정을 제외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이른바 유·초·중·고교의 총 13년 과정을 갖춘 통합형의 학교였다. 큰아이는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작은 애는 신입생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큰아이가 하굣길에 소변이 급하다며 교정으로 다시 돌아가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왔다. 잠시 후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 싶던 차에 내 눈앞으로 그것을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엄마, 이게 뭐야?”
아이가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용하고 버린 콘돔이었다. 내심 너무 놀랐지만 짐짓 별 일 아닌 척하며, “그거 어디서 났어?”하고 되물었다.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화장실에 가면 이런 게 매일 매일 여러 개가 있어.”
‘아니, 이럴 수가. 유흥업소도 아니고, 어린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쓰다 버린 콘돔이 시도 때도 없이 널려 있다고?’
아이들이 어린 탓에 호주 학교에 대한 경험이나 들은 얘기가 별로 없던 때라 당시에는 아이의 말이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야?”
“그렇다니깐. 그리고 화장실에 가면 고등학생 형아와 누나들이 꼭 끌어안고 있고 그래.”

생전 처음 보는 콘돔이 신기하기만 한 아이의 호기심을 슬쩍 돌려놓기 위해 상황을 모면하고자 그때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 중․고등학생들의 성의식이나 태도 등에 대한 단면을 직접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던 일이라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다.

서구 사회 10대 청소년들의 문란하고 방종스런 성관념에 대해서 요즘은 논란거리도 못 되는 세상이지만, 유치원생과 초등학생까지 함께 다니는 학교에서 상급학년인 중·고등학생들의 이 같은 행위를 묵인하는 것은 해도 너무하는 게 아닌가 하고 학교 측의 무심한 처사에 분노가 일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녀 학생들이 외부도 아닌 학내에서 버젓이 성관계를 맺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어서였는데, 성에 대해 한창 호기심이 많은 나이의 학생들을 계도하기 위한 학교 측의 고민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겨우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교정에서는 키스를 금함’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슬로건 형식으로 내건 경고문이 눈길을 끌었다. 문구가 지나치게 직설적이라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면서도 ‘오죽하면 저랬을까’ 하는 생각에 곧이어 한숨으로 변했다.

말이 ‘키스’지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학교에서는 성행위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뜻으로 해석이 되었다. 그 문구를 보자 갑자기 2년 전 한국에서 보았던 서울의 한 고등학교 정문 위에 펄럭이던 ‘학내 흡연 금지’라는 경고문이 기억 속에 겹쳐졌다. 한국의 고등학교들이 학생들의 ‘학내 흡연’으로 고심하고 있다면, 호주에서는 ‘학내 성행위’ 가 같은 수위의 골칫거리라는 뜻이기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녀 학생들의 분별력 없는 성관계로 인해 고등학생 신분으로 졸지에 부모가 되는 사례나, 어린 여학생들의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낙태 시술을 반복하다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입는 경우 등이 종종 보도되는 점도 이 나라 10대들의 성적 방종의 위험수위를 짐작케 한다.

또래로부터 남자 친구 혹은 여자 친구와 일단 성관계를 가져 볼 것에 대한 압력과 부추김, 모두들 경험이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는 판에 자신만 해보지 않았다는 그릇된 위축감과 오해 등이 10대들로 하여금 반성 없는 성행위를 하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고등학생 때 아이를 낳아 미혼모로 살거나 한순간의 불장난으로 태어난 아이를 양육할 만한 정신적, 경제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입양을 선택한 후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되는 것이 이 나라의 비근한 현실이기도 하다.

호주는 이른바 문명국가 가운데 10대들의 임신율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통계에 의하면 15세 미만 청소년들의 10~30% 정도가 성관계를 가지며, 같은 연령대의 소녀 1천 명 가운데 세 명꼴로 임신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낙태율 또한 심각한 상황으로 OECD 회원 국가 가운데 15~19세 사이 호주 청소년 1천 명당 연평균 낙태율은 25명꼴로, 미국과 헝가리(30여 명 수준)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사태의 심각성이 이 정도이다 보니 최근에는 연방정부의 한 국회의원이 “중·고등학교에 콘돔 자판기를 설치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호주에서는 세 번째의 영향력을 가진 정당인 민주당 소속 한 하원의원은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성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강조하며, 임신의 일차적 예방을 위해 학교에서 콘돔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중·고등학생들의 성생활은 건강상의 문제로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생들을 돕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콘돔 자판기를 설치해 주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생들의 성관계를 막을 수 없다면 성병에 걸리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것이라도 예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콘돔을 사는 일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성보건과 피임에 대한 보다 확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 이 나라 청소년 성의식의 현주소인 것이다.더 이상 성윤리나 도덕의 잣대로 학생들의 성관계를 자제하도록 하기는 어려우며, 교사의 훈시나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난 현실 앞에 성교육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까.

신체적으로는 이미 성년이 된 큰아이와 성적으로 한창 예민한 단계를 지나고 있는 작은 아이를 부모의 처지에서 바라만 보며 ‘설마, 쟤들이…’하는 속마음 밖에는 가질 수 없는 무능함(?)이 그 어느 때보다 안타깝게 느껴지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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