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게 마시옵기를!

2008.04.01 09:00:00

‘좋은 말’이 마침내 어떤 한 사람에게 ‘좋은 말’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뜻도 소중해야 하고, 그 말의 발견도 소중해야 하고, 소통하는 상황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나만의 말이 되어야 한다. 낡은 구호나 상투적인 표어처럼 아무데서나 나돌아다니는 말이 된다면, ‘좋은 말’이 되기 어렵다.

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는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다녀와서는 좀 참담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소의 미술관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내가 그곳의 작품을 충실하고 진지하게 감상하여, 마침내 의미 있는 미적 즐거움을 맛보았는가 하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런던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을 가 본 사람은 내 경험을 얼마간은 이해해 주시리라.
몇 해 전 이탈리아에서 학술행사를 마치고, 그 유명하다는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미술관)을 찾았다. 개장 전 이른 아침에 갔는데도 대기하는 행렬이 엄청나게 길었다. 세계적 미술의 보고(寶庫)를 직접 내 눈으로 본다는 기대감으로 아침 따가운 햇볕 속에서도 한 시간을 기다려, 미술관에 들어갔다. 세계 명작에 대한 미적 동기가 자못 컸다.
처음에는 미술관 입구의 작품들을 진지하게 느껴보려고 애를 썼다. 또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로만 보았던 눈에 익숙한 그림 앞에 서는 반가움에 한참 시선을 주어 무언가를 느껴 보려 하였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 앞에서 그러하지는 못했다. 내 눈에는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천 점의 작품들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작품들을 사열하듯 걸어가며 솔직히 좀 질리는 기분이었다. 미적인 향유를 할 수 있는 정신의 느긋함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있겠느냐고 스스로를 재촉하며 허둥거리며 보기는 하지만, 형편이 여기에 이르면 건성으로 지나쳐 오기 일쑤이다. 나는 기껏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고대조각 ‘라오콘’, 라파엘로의 ‘아테네의 학당’ 등을 인상적으로 향유하는 데서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모두 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익혀 둔 작품들이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명작들이 많다는 상황에서는, 명작은 명작으로서의 의미가 살아날 수 없었다. 즐기든, 마시든, 먹든, 감상하든, 그 대상이 지나치게 많아서 남아돌아간다는 것은 곧 ‘과잉’의 상태이다. 미술 명작은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이므로 명작의 과잉은 일종의 ‘미적 과잉’이라 할 수 있는데, 필자는 ‘미적 과잉’의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작품의 절대수가 많은 것도 많은 것이지만, 그것을 오전 일정 중에 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가 빠져 있는 ‘미적 과잉’의 상태를 한층 더 지독하게 만들어 나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무기력의 증세를 가지게 해 주었다. 바티칸 미술관까지 가서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는커녕 아름다움에 대한 무기력증이라니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은 말’들이 넘쳐난다. 아침마다 인터넷을 열면 인생에 지혜를 주고 교훈이 되는 말들이 넘쳐난다. 메일이나 카페에 아는 사람들이 올린 것도 있고,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것도 있다. 인터넷상에서 이런저런 뜻있는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나 프로그램에서 정성껏 보내온 것도 있다. 받아보면 하나같이 아름다운 명언명구(名言名句)들이다. 말의 멋이나 수사(修辭)도 뛰어나 그야말로 주옥(珠玉)같은 표현들이다.
주제나 내용도 참으로 다채롭다.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가기를 권유하는 말들, 긍정적 자아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서 당당한 주인이 되라는 자존을 격려하는 말들, 삶의 활력을 가지고 꿈과 비전을 가지라는 말들, 창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일과 사업을 경영하라는 지혜의 말들, 정신 건강을 지키는 데 유익한 가르침의 말들, 욕심과 화를 다스리면 일상의 행복이 찾아온다고 권유하는 말들, 우정이나 사랑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가지게 하는 생활 철학의 언어들, 아름다운 부부생활을 위한 부부대화의 지혜를 일깨우는 말들, 심지어는 병들고 늙어가는 것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좋은 말을 찾기란 너무도 쉽다. 아니 찾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아침마다 나의 메일로 나의 인터넷 카페로 마치 무슨 점령군처럼 밀어 닥친다.
‘좋은 말’은 말 자체만 많아진 것이 아니다. ‘좋은 말’을 꾸미고 장식하는 기술과 재주까지도 아주 풍부해졌다. 인터넷 공간에서 예쁜 그림이나 아름다운 음악들을 함께 곁들여지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크게 보면 이런 현상까지도 ‘좋은 말’이 넘쳐나는 모습 속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멀티 디지털 메시지(multi digital message)로 전달되는 이러한 명언명구의 언어들은 표현조차도 얼마나 우아하고 세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명언명구의 메시지를 인터넷으로 받는 순간 감각적 분위기에 젖는다. 그러다 보면 명언명구의 메시지가 주는 깊이 있는 사고(思考)는 슬며시 그림자처럼 뒤로 빠져나가기 쉽다. 언어는 세련되고 음악은 우아하고 그림과 사진은 환상적이니, 이런 ‘좋은 말’을 받고 보면, 이성보다는 감성의 베일에 싸여 수용된다. 감각적으로 잘 치장되었으니 받아보는 순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명언명구의 진정한 의미가, 이성적으로 깊이 사색될 수 있는 쪽으로 처리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뜻 깊은 인생 성찰의 메시지는 증발하고, 언어의 포장 디자인만 그럴 듯하고 멋있어 보이는 상태로 그냥 나를 휘돌아 나가는 것 같다. 그 잘 생긴 명언명구의 ‘좋은 말’들이 마치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아침 메일 박스에 진열되어 나를 감각적으로만 만족시키고 스쳐 지나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시대에 뒤떨어진 지나친 편견일 수 있다. ‘좋은 말’을 전할 때 상대가 되도록 기분 좋게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시각적 요소와 아름다운 음악을 꾸며 주는 것을 굳이 잘못된 것인 양 치부할 것은 아니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 생태를 그런 쪽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듯 우아하고 세련된 ‘좋은 말’들이 너무너무 넘쳐나게 흔하다는 데에 있다. 마치 백화점에 가서 좋은 물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으면 좋은 물건의 좋은 물건다움을 절실하게 느낄 수 없듯이, 좋은 말들도 넘치고 넘쳐서 남아돌아가면, 좋은 말을 좋은 말로 절감하지 못하게 된다. 과잉은 불감증을 불러 오는 것이다.
‘좋은 말’이 마침내 어떤 한 사람에게 ‘좋은 말’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뜻도 소중해야 하고, 그 말의 발견도 소중해야 하고, 소통하는 상황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나만의 말이 되어야 한다. 낡은 구호나 상투적인 표어처럼 아무데서나 나돌아다니는 말이 된다면, ‘좋은 말’이 되기 어렵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화되면서, 사진 또는 사진 찍기는 너무도 흔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편해진 대신 사진이 담아내는 사람들의 추억과 인정의 질은 옛날 같지 못하다. 사진을 소중하게 보관하는 일은 더더욱 시들해졌다. 그 까짓것 아무 때나 찍으면 되지. 대충 찍어두고 포토샵하면 되지. 이런 심리가 언제부턴가 생겨났다. 과잉이 가져다주는 황폐함의 일단이다.

판에 백묵으로 글씨나 그림을 써 내려가는 사이에, 어느덧 가르치는 이의 신명이 두드러지게 살아나던 때가 있었다. 선생님은 칠판과 혼연일체가 되어, 역동적으로 몸동작과 손동작을 지어나가면, 칠판 위에는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등등 세상만사의 온갖 이치가 피고 지기를 거듭하는, 그런 수업 풍경을 10년 전만해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수업장학지도라도 나올 때면 이런 기원들을 했었다. 그림괘도 하나, 거칠게 빚어놓은 모형 하나 있어도 좋으련만 …. 그렇듯 아쉬워하며 시간을 따로 내어 스스로 만들어 쓰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결핍했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 불쑥 하늘에서 떨어진 동영상 교재가 있었다면 얼마나 환상적이고 소중했을까. 아이들은 얼마나 경이롭게 동기화되고 열중하여 집중했을까. 그런데 지금이 그런 세상이 되었다. 디지털 미디어의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되면서, 학교 현장의 수업매체들도 급속히 기술의 진화를 이루었다. ICT 활용교육이 모든 학교를 휘몰아 나간 곳에 파워포인트며, 애니메이션이며, 동영상이 수업시간마다 늘 사용하는 자료들이 되었다. 수업의 능률과 학습의 효과가 증진됨은 물론이다.
그러나 디지털 매체 기술의 활용이 일상 수업에서 넘치고 넘쳐나게 되면, 그 또한 영원한 감흥이 될 수는 없다. 환상적이고 변화감 빠른 것일수록 환멸과 싫증도 먼저 오는 법이다. 동영상이며 파워포인트니 하는 것들이 수업에서 넘치고 또 넘치도록 일상화되면, 그 때부터는 수업의 능률과 학습의 효과는 다시 어떤 임계점을 만나게 된다.

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이 <행복의 정복 (The Conquest of Happiness)>에서 말했던가. 행복해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적절한 결핍이라고. 절절이 공감이 가는 말이다. 모든 타락은 과잉(過剩)에서 생겨난다.
과잉이란 그런 것이다. 가치를 몰락하게 하고, 정신을 나태하게 하고, 몸을 둔하게 한다. 흔해 빠져서 소중함을 모르므로 가치는 몰락한다. 넘쳐나니 집중할 수 없어 정신은 나태하게 된다. 남아도는 형편인지라 구태여 부지런할 필요가 없으니 몸은 둔해진다.
과잉 속에서는 특별한 불만족도 없지만 만족이란 것도 없다. 만족도 없고 불만족도 없는 것, 이것처럼 고약한 모순이 또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과잉은 타락을 잉태한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도 그러하다. 존재가 활력을 서서히 잃는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이 글이야말로, 넘치고도 남는 ‘좋은 말 과잉 현상’에 공연히 부질없는 일조(一助)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늘이여 바라옵건대, 넘치게 마시옵기를!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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