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남자

2008.09.01 09:00:00

우는 남자는 정말 못난 남자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우는 남자는 인간적일 수 있다. 운명적 한계나 비극적 상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뜨거움을 실존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울음이다. 울음이란 정신과 감정의 곤경을 해소하므로 치료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정신적 긴장과 곤경을 이성의 힘으로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때, 그때 몸과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터져 나오는 것이 울음이다. 그러니 가장 인간다운 것, 가장 꾸밈이 없는 것, 가장 순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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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휴게소 남자용 공중 화장실 소변기 앞에 가면, 앞 벽면에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 말고도 또 있습니다!” 소변을 볼 때 오줌 방울을 소변기 바깥으로 흘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코믹하게 나타낸 것이다. 의미가 적절하게 우회적으로 전달되도록 하여, 오줌 방울 다스리기에 만전을 기해 달라는 화장실 당국자의 의도를 재미있고도 간곡하게 전해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당부의 문장 속에는 남성중심의 인식이 기본 전제로서 들어 있다. 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흘려서는 아니 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이 문장은 의미가 자연스럽게 성립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조사해 보지는 않았지만 평균적인 한국의 남자들은 이 문구 앞에서 별다른 회의를 품지 않고 이 표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런 문화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위대하고, 그렇게 때문에 (여자처럼) 눈물이나 질질 짜대는 존재가 아니라는 남성 우월의 문화적 최면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체면이 중시되는 우리에게는 우는 것을 흉으로 인식하려는 태도가 있었다. 특히 남자에게는 이런 인식이 강요되었다. 예전부터 들어 온 말 가운데 누구나 잘 아는 말이 있다. 남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 번 운다(세 번만 울어야 한다). 한 번은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기로서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경우이고, 세 번째는 나라가 망하는 경우이다. 이 말은 세 번 우는 경우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여간해서는 울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에 쓰였다.

전통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하는 우스갯소리 가운데,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솔(털) 난다.”라는 말도 있었다. 울던 어린 조카아이를 달래려고 우스운 말을 해 주던 고모나 이모들은 아이가 웃을 분위기로 옮겨 나올 때 막상 이 말을 해 주게 되는데, 이 말을 듣고 다시 울음 쪽으로 도망가는 아이도 있는가 하면, 아예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까르르 웃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이 자라면서 주는 문화적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감정의 급속한 변화는 경솔하여 바람직하지 못하며, 따라서 똥구멍에 솔(털)이 나는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울음이라는 것을 가벼이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세상 문화를 터득하게 된다. 물론 함부로 울어서는 아니 되며, 울 것 아닌 것 가지고 울다가 함부로 해죽거리면 벌을 받는다는 협박도 숨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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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억압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울음이 억압되면 울음만 억압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웃음도 억압되고, 기쁨도 억압되고, 연민의 감정도 억압되고, 사랑의 감정도 억압된다. 물론 분노도 억압된다. 모든 감정의 억압은 무표정의 얼굴과 몰인정의 인격으로 드러난다. 드러내는 감정의 자아와 숨어 있는 감정의 자아가 분리된다. 그러니 그런 심리 기제로 어찌 밝은 소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하면 감정의 노출과 전달이 자연스럽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울음에 대한 억압은 유독 남성에게 주어진다. ‘우는 남자’는 ‘못난 남자’로 바로 번역되는 문화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는 남자가 옹호받기는 힘들다. 설사 옹호받는다 하더라도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그러니 문화적 인식의 코드가 얼마나 완강한 것인가. 남성의 남성다운 정신적 표상은 ‘논리와 이성’으로 드러나고, 여성의 여성다운 표상은 ‘정서와 감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우리는 오래도록 인식해 왔다. 울음은 극단의 감성 코드에 해당되는 것, 어찌 이성과 논리를 주재하는 남성이 울음이라는 극단의 여성성을 지닌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 온 것이다. 남성 우월주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의 속성은 남성의 속성에 비해서 열등하고 모자란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까 예쁘고 부드러운 것은 억세고 강한 것보다 약하고(못하고), 감성과 정서는 논리나 이성에 비해서 뒤떨어지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성(gender)이 점차 평등한 힘을 얻음으로써, 그 여성성에 의하여 남성성이 중심의 자리에서 내려오기도 한다. 남과 여에 대한 인식의 옷을 대중들이 바꿔 입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는 고정관념의 옷으로 오래 입혀져 왔는데, 이제는 꼭 그렇지도 않은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되는 성향까지 생겨나고 있다. 얼굴 곱상하고 여성처럼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닌 젊은 남성을 ‘꽃미남’이라고 일컫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여성성의 전형적 자질이라 할 수 있는 ‘예쁘고 부드러운 것’이 남성의 매력 자질로 적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남성성(또는 남성상)에 대한 것들도 빠르게 변해 간다. 포스트 모던의 대중문화가 매스 미디어에 의해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사회에서는 양성 평등의 가치가 빠르게 전파되고 공유된다. 그래서 전통적 남성성은 과감히 해체되기도 하고, 그 자리에 이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남성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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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에 대한 인식 교정은 빠르게 진화되어 간다. 많은 가치 판단에서 이성(理性) 절대주의가 위력을 점차 잃었다. 심지어는 감성을 이성보다 더 중시하는 경향도 생겼다. 부드러움이 강직함보다 더 힘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의 가능성과 강점을 남성의 그것에 비해서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이 대중문화의 현장에 두드러지게 발현되는 것이 바로 여성의 매력 요소를 그대로 남성에게도 전이 적용하는 것이다. 근육질의 남성보다 부드럽고 고운 얼굴의 남성, 이른바 꽃미남을 더 가치 있게 인식하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러나 남성성에 대한 인식 교정은 그 자체로 변해 간다기보다는 여성성 인식 변화에 대한 후차적 영향을 받아 마지못해 변해 간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여성성이 남성성에 쉽사리 동화되고 평등해지려는 것에 비해서 남성성이 여성성에 동화됨으로써 평등에 가까워지는 것은 잘 되지 않는 편이다. 이 또한 그간의 남성우월주의가 오랜 동안 쌓아 올린 업보라고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쉽게 말하면 여성도 남성의 영역에 진출하여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고 성취한다는 것은 대체로 승인되는 편인데, 남성이 여성의 전통적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은 흔쾌한 갈채도 모자라고 문화적 승인이 인색한 것 같다.

일의 세계는 또 그렇다 하더라도, 감정과 생각을 펴고 전하는 일상의 심리 작용 국면에서는 남성도 여성처럼 감정을 펴는 것에 대해서 더더욱 이해를 안 해 주려는 분위기이다. 적어도 눈물을 흘리며 우는 문제에 한해서는 정말 그러하다. 여자는 쉽사리 눈물을 보여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노출이고, 그것이 때로 무기까지도 되는데,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 덜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있을 뿐이라는 평등의 대명제에 입각하면,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남성들은 좀 억울하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게 하는 남성주의 문화에 대해서는 오히려 인간적 피해자가 남성이라는 느낌도 든다. 남성이 잘 울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울음이야말로 인간적 감정의 근본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래서 가슴을 풀고 울고 싶은데, 남자라는 이유로 억지로 꾹꾹 눌러 참는 경우 그걸 어떻게 남자답다는 말로만 치켜세워 옹호하는 것만이 능사이겠는가. 이래저래 오늘 이 문화적 과도기의 남자들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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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란 정신과 감정의 곤경을 해소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울음은 치료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정신적 긴장과 곤경을 이성의 힘으로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때, 그래서 더 버티려고 하다가는 마침내 몸의 어느 한 구석이나 정신의 기제가 허물어 내리려 할 때, 그때 몸과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터져 나오는 것이 울음이다. 그러니 가장 인간다운 것, 가장 꾸밈이 없는 것, 가장 순수한 것이다. 그래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라.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야말로 인간적인 이해와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우는 남자는 정말 못난 남자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우는 남자는 인간적일 수 있다. 운명적 한계 앞에서 비극적 상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뜨거움을 실존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울음이다.

그래서 시인 김현승은 신 앞에서 기도의 형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지닌 보석 가운데 가장 나중 지닌 보석이 눈물이라고. 돌의 미학을 강조하고, 굳센 지조의 철학을 말하던 조지훈도 울고 싶은 날의 감정을 절조의 시구로 남겨 놓지 않았는가. 그가 시 <낙화>의 맨 끝 구절에서 길어 놓은 구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는 언제 읽어도 좋다. 우는 남자 조지훈 시인을 누가 통념의 해석으로 못난 남자라 일컬을 것인가. 울음의 욕구 저 밑에 있는 보석 같은 진정성을 왜 남성들에게서 박제(剝製)하려 하는가.
알고 보면 세상에는 우는 남자들이 많다. 숨어서 울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차마 가족 앞에서는 울지 못하고 숨어서 운다. 아버지의 울음을 안 보고도 알아주는 집안은 행복을 스스로 지을 수 있는 집이다. 우는 남자가 못난 남자라고 생각하는 동안 남자들은 감정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는 남자들이 울음의 진실성을 통해서 위안 받도록 해 줄 수는 없을까. 어쨌든 더 이상 우는 남자에게 못난 남자라는 굴레를 씌우지는 말자.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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