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되는 멋, 우러나는 멋

2009.01.01 09:00:00

현대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 그럴듯한 멋진 모습들은 모두 이미지로 전달된다. 자신의 멋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연출하려 하고, 상업 자본들은 그런 욕구를 끊임없이 부채질한다. 더러는‘연출된 멋’에‘우러나는 멋’이 쫓기는 형국도 있다. 그러나 연출되는 멋은 일시적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우러나는 멋은 오래 향훈이 남는다.


1

아부(阿附)를 싫어하는 사장님이 있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부하 직원들에게 자기는 아부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고 말하였다. 또 실제로 아부 모드로 접근해오는 부하 직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며 나무라기 일쑤이었다. 그렇게 되자 모두들 사장님 앞에서 환심을 사려고 알랑거리는 말이나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사장님에게 격려가 될 수 있는 말조차도 꺼내기를 조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모두들 사장님이 기분이 나빠져 있을 때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했다.
회사 내에 그야말로 아부하는 분위기는 사라져 갔다. 물론 사장님 앞에서는 아부의 ‘아’자조차도 튀어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장님은 달라진 분위기가 되어도 부하 직원들의 변화를 인정해주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냥 계속해서 자기는 아부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는 말만 되뇌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업부장 직위를 가진 부하 직원이 사장님을 모시는 공식·비공식 자리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장님은 아부하는 사람을 정말 싫어하십니다. 아주 강직하신 분입니다.”
“사장님께서는 아부하는 근성을 용납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장님 또한 아부의 처세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정직과 성실로 인간관계를 맺고 당당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업무에 입하도록 합시다.”
사장님은 흡족해했다. 영업부장의 사장님 예찬론은 널리 퍼져 나갔다. 사장님 자기 스스로 ‘나는 아부를 싫어한다’라고 말하는 모습 대신, 영업부장의 사장님 예찬이 더욱 세련되게 퍼져 갔다. 그만큼 아부를 싫어하는 사장님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사장님이 아부를 싫어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회사원이 알고도 남게 되었다. 심지어는 이 소문이 회사 바깥에로도 알려져서 사장님의 곧고 바른 성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장님의 신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사장님은 매우 흡족해했다. 영업부장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영업부장은 사장님의 독점적 총애를 입었다. 누구보다도 빨리 중역으로 승진하고, 회사 내에서 가장 힘 있는 실세 중의 실세로 통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장님이 아부를 싫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회사 직원들은 심각한 회의(懷疑)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님은 정말 아부를 싫어하는 분이실까. 사장님이 정말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장님은 아부를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아부를 싫어하는 멋있는 분으로 알려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부를 즐기는 것은 권력 가진 사람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게다가 중독성까지 있어서 좀더 강력한 아부를 원하면서 점점 더 그 쪽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도 바로 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유혹이 강한 것이 있다. 더구나 그것은 중독되는지도 모르면서 중독되어 가는 것이다. ‘멋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싶은 욕구’가 바로 그것이다.
2

대범함을 강조하는 교장 선생님이 계셨다. 학교를 위해서 노심초사 일을 많이 하셨다. 교육청에 들어가 학교 시설의 열악함을 호소하고, 새로운 학교 운영 계획을 의욕적이고 창의적으로 지역사회에 제시하고, 유관기관들을 부지런히 설득하여 학교 발전을 획기적으로 실현해나가는 중이었다. 워낙 대범하신 분이어서 이런저런 노력과 공적들을 자기 스스로 말하고 다니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의 활동이 학교 밖에서의 활동들이어서 학교 내의 선생님들도 교장 선생님의 수고와 공(功)을 소상하게 잘 알지는 못했다.
교장 선생님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의당 교장이 할 일이다. 이런 일 정도로 내가 내 수고를 스스로 공치사하고 다니는 것은 소인배나 할 행동이지, 대범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교장 선생님의 노고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학교 발전의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장 선생님은 대범하게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사정을 잘 모르는 학교 선생님들로서는 교장 선생님의 공을 무심히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장 선생님은 섭섭한 마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수고를 몰라도 너무 몰라주는 교직원들의 마음이 왠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소인배 같은 마음을 스스로 나무랐다. 대범하게 품위를 지켜야 할 내가 내 입으로 학교를 위해 이런 노력도 하고 저런 업적도 쌓고 등등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낯간지러운 일 아니겠는가.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한번 생긴 서운한 마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교장의 이런 헌신적 노력을 그렇게 외면하듯 몰라줄 수 있단 말인가. 젊은 교사들이야 학교 실정을 몰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견 교사 누군가 나서서 “아!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 이러이러하게 활동하시고, 저러저러하게 애를 써주신 덕분으로 우리 학교와 구성원들이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 해주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교장 선생님은 서운한 마음이 조금씩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대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찍이 공자님도 말하지 않았던가.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해서 화를 내면 그것은 군자가 아니라 소인배의 행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일로 선생님들께 섭섭하게 생각 말아야지. 그거 뭐 별 대수로운 것도 아닌데. 교장 선생님은 자신이 그렇게 쪼잔하고 쩨쩨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범하고 멋있는 모습을 유지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의 노고를 몰라주는 교직원들이 미워지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나는 대범한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그냥 대범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욕구, 그래서 멋있는 관리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내 자신이 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구나 고약한 것은 나를 몰라주는 사람들에 대해 미움과 짜증의 감정이 날로 커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교장 선생님은 깊이 고민했다. 대범한 사람으로서의 멋을 보이기 위해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내가 내 입으로 교직원들에게 내 노력과 업적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했다. 생각 끝에 교장 선생님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 이유로서는 현재 상태로 학교 교직원들이 섭섭하고 미워지는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까짓 거, 내가 좀 대범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떤가. 내가 교직원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마침내 자신의 공적을 스스로 말하기로 했다. 그간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좀 섭섭했다는 말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살짝 끼워 넣었다. 그 대신 대범하고 멋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또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자신의 공치사는 전체 교직원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오늘 딱 한 차례만 하고 이후에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3

교장 선생님의 판단은 지혜로웠다.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저마다 교장 선생님의 수고를 따뜻한 말로써 화답해 주었다. 며칠 동안은 사람들이 교장 선생님을 만나면 인사처럼 교장 선생님의 수고에 감사의 언어를 표현해주었다. 교장 선생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섭섭함과 미움의 감정들이 서서히 씻겨 내려갔다. 다시 평명한 감정의 상태로 돌아와 학교 관리에 유쾌하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교직원들과 밝은 감정과 상쾌한 기분으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마음의 기조를 되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대목에서 사실 교장 선생님과 같은 지혜를 발휘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대범함을 강조하면서, 부하 직원들에 대한 섭섭함과 미움의 감정은 술자리 등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자리에서 여과 없이 거칠게 나타낸다. ‘내가 대범해서 그런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내 참 섭섭했다고, 나쁜 놈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이야기를 꺼내서, 나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는, 매우 고약한 상황을 자초한다. 이야말로 자기모순의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대범함은 대범함대로 상실하면서, 직원들과의 소통은 단절되고,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애초에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집착하여 보여주고자 했던 ‘대범한 멋’이라는 것이 섭섭함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마음의 미움을 없애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교장 선생님은 ‘연출된 멋’에 홀리지 아니하고 ‘우러나는 멋’의 경지를 체득하신 것이다. 아부를 싫어했다는 사장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아부를 배척하는 철학을 실천했다기보다는, 아부를 싫어하는 ‘멋있는 사장님’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이미지는 보여줌으로써 멋과 매력을 극대화한다. 그럴듯한 멋진 모습들은 모조리 이미지로 전달되고, 대중매체는 그것을 열심히 매개한다. 이미지가 빚어내는 멋은 순간의 감성으로 전달되고 포착된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의 관계 또한 파편적이고 순간적이다. 그런 탓인지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멋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연출하려 한다. 상업 자본들이 그런 욕구를 끊임없이 부채질한다. 그러니 리더십마저도 ‘멋있어 보이려는 성향’으로 흐른다. 더러는 ‘연출된 멋’에 ‘우러나는 멋’이 쫓기는 형국도 있다. 그러나 연출되는 멋은 일시적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우러나는 멋은 오래 향훈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연출되는 멋’은 ‘우러나는 멋’보다 한 수 아래이다.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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