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의 교육학

2010.12.01 09:00:00

어릴 적 이야기를 하다보면 심부름에 얽힌 것이 적지 않다. 개중에는 일으키지 말았어야 할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가족애와 정이 바탕이 된 심부름이 아이들의 성장에 적잖은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이런 전통적 의미의 심부름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내가 중학교 들어가던 무렵,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중년의 농부 김 씨, 종일 텃밭 일을 하는 날, 학교에서 돌아 온 열 살짜리 딸아이를 철길 뚝 건너 아랫마을 방앗간 옆 주막으로 보내서 막걸리 한 되를 받아오게 했다. 김 씨의 딸 끝분이는 마을 앞 솔뫼 언덕을 지나, 찌그러진 양은주전자를 흔들면서 주막으로 간다.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해보았던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막걸리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슬슬 생겨나는 호기심이다. ‘이 놈의 막걸리란 놈이 도대체 무슨 맛이기에, 어른들은 이토록 이것을 즐기는가.’ 처음에는 주전자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찍어서 막걸리 맛을 본다. 그것으로는 흡족치 않다.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한 모금을 넘겨본다. 특별한 맛이 있다기보다는 금지된 것을 건드려 보았다는 영웅심이 먼저 머리를 쳐든다.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이러기를 여러 차례, 막걸리 심부름이 거듭되면서 마침내는 겁도 없이 여러 모금을 술술 넘기게 된다. 배도 고프던 때이다. 한 주전자 가득이던 막걸리가 표 나게 줄어들면, 그때서야 ‘아차! 이걸 어쩌나’ 하고 당황한다. 주전자가 출렁거려 술이 쏟아졌다고 둘러대기도 하지만, 매번 쏟았다고 할 수는 없다. 조심성 없다는 불호령이 더 무섭다. 끝분이도 오늘 이런 상황이다. 마신 막걸리 덕분에 오늘은 더욱 대담해진 것일까. 서슴없이 막걸리 주전자에 물을 타서, 없어진 만큼의 분량을 채워 아버지께 갖다 드린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싱거워진 막걸리에 아버지 김 씨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는다. 막걸리 맛이 예전 같지 않다. 아무래도 물 탄 막걸리이다. 김 씨는 주막 주모에게 혐의를 두고 추리한다. 어린아이에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니 만만하게 보고 물을 타서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주모에게 괘씸한 마음이 아니 들 수 없다. 그 길로 김 씨는 주전자를 들고 주막으로 간다. 그리고는 이렇게 장사를 해도 되느냐고 고함을 질러 항의를 하고, 가져 간 막걸리를 주모에게 마셔보게 하며 소동을 피웠다.

주모는 왜 사태가 이렇게 되었는지 얼른 간파하지 못했다. 성품 좋은 주모는 김 씨에게 경위야 어찌되었든 물탄 막걸리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김 씨는 주모에게 차후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주모는 일이 이렇게 된 정황을 여러모로 생각해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 나름의 해결책을 마련했다. 이후 주모는 김 씨의 딸 끝분이가 막걸리 심부름을 오면, 미리 부엌에서 막걸리 한 잔을 주고 주전자에 있는 술은 절대로 축내지 말고 아버지 갖다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참으로 1960년대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삽화이다. 아이들의 일상에 호기심과 허기가 나란히 함께 피어오르던 시절 아니었던가. 사람들 사이에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이니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렵다 해도, 옛날에는 이런 종류의 심부름이 낯설지 않았다. 심부름 정경에는 고색창연한 가부장적 권위가 드리워 있다. 심부름 시키는 농촌 어른들의 세계는 또 얼마나 질박하다 못해 무교양에 가까운가. 그 가난했던 시절 아비와 딸과 막걸리의 모습이 흐린 흑백사진과도 같은 정경으로 가슴에 박힌다.

이 삽화를 그냥 ‘몹쓸 심부름’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삽화에 담긴 심부름의 의미가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에는 심부름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새삼 심부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삽화에서 보듯 심부름에는 언제나 그 나름의 유혹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이 암시된다. 물론 그것을 이겨야 심부름을 제대로 인정받는다. 그런 면에서 심부름은 본질적으로 이중의 기회이다. 심부름을 하는 동안, 선택과 인정의 기회가 오기도 하고, 심부름으로 인해 배제와 소외를 겪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심부름에는 유혹과 위험이 잠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부름은 당사자가 원하든 안 원하든 시험의 기제를 운명적으로 달고 다닌다.

예로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이야말로 정녕 심부름하면서 자란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하다. 자라며 겪는 일 중에 심부름으로 인해 빚어지는 사단들은 얼마나 다채로웠으며, 심부름 속에서 만나고 소통한 사람들은 오죽 많았으며, 심부름에서 체득한 교과서 밖의 지식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심부름을 못하겠다고 버티던 때는 언제였던가. 반항의 시기를 겪어내는 성장의 한 고비임을 그때는 정말 철이 없어 몰랐다. 이런 심부름의 성장 과업을 하나도 겪지 않고서 어찌 온전한 인격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이쯤 되면 심부름 또한 하나의 교육적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심부름 하는 자는 심부름 시키는 자 못지않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 고민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이렇듯 심부름 하는 자의 지식과 기능과 도덕이 작동해야 비로소 심부름이 이루어진다. 연애편지 전달 심부름을 맡은 사람이 있다. 사랑 당사자 양쪽의 애정 코드가 잘 맞지 않을 경우, 심부름하기가 만만치 않다. 잘해야 본전이고, 양쪽으로부터 모두 잘했다는 칭찬을 듣기 어려운 심부름이다. 그걸 모면하려고 꾀를 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부름 내용을 마음대로 바꾸거나 꾸며내기 쉽다. 이 어찌 연애편지 쓴 사람보다 심부름꾼의 고민이 적다 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을 받은 작품 <아홉 살 인생>(이희재 지음)에는 여민이라는 아이가 나온다. 여민은 심부름 값을 주며 연애편지를 전해 달라는 골방철학자 아저씨의 부탁에 망설임 없이 편지를 들고 윤희라는 누나를 찾아간다. 윤희 누나를 만나 편지를 전해주지만 편지를 받은 윤희는 매우 화를 낸다. 러브레터의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아는 윤희는 심부름 값을 주겠으니 자신의 말도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지만 여민은 그 부탁을 거절한다. 왜냐하면 윤희의 부탁을 들어주면 그로 인해 골방철학자 아저씨의 기분이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수동적인 심부름꾼으로 개입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조정자 내지는 주도적 진행자처럼 변화한다. 심부름이라고 매양 수동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심부름이란 일종의 과업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발달 과업(Development tasks)’이다. 심부름을 통해 아이들은 창의 마인드를 기르고 창의를 체험한다. 성공한 심부름에는 반드시 창의성의 발현이 있다. 그런 심부름은 과업 수행에서 발휘한 창의성 때문에 더 크게 칭찬받아야 한다. 또 그렇게 칭찬해주는 것이 심부름 시키는 어른들의 교육적 지혜이다. 또한 심부름은 ‘문제해결학습’이 일어나는 리얼한 현장이다. 어떤 심부름이든지 가장 직접적인 ‘문제해결’의 미션이 구체적으로 부과되어 있다. 잘 계획된 교실 학습 상황에서도 좀체 제공해주기 어려운 문제해결학습의 살아 있는 마당(場)이 곧 심부름이다.

심부름의 도덕적 바탕은 그것이 원래 ‘봉사’의 일종이라는 데에 있다. 아버지를 도와드리는 일, 엄마의 일을 대신 해 드리는 일 등, 심부름은 친지나 육친의 개인적 신뢰와 정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가나 보수를 받지 않는다. 심부름에 약간의 대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특함’에 대한 칭찬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도덕성이 숨어 있기도 하다. 심부름을 성공적으로 부과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심부름을 해내는 아이들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부름 시키는 사람은 심부름 하는 사람을 탓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실패한 심부름은 심부름 시키는 사람의 잘못이 더 크다.

요컨대 심부름의 교육적 가치는 그것이 ‘발달 과업’이고, ‘봉사’라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심부름을 유별나게 봉사라고 인지하지 않으면서 봉사에 입문하는 데에 묘미가 있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사회봉사에 대해서는 적극적 인지(내가 봉사를 한다는 사실을 인지)를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막상 자기 집안의 심부름이나 가사 일을 돕는 데에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모순이라고 해야 할지, 사회화 발달 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야 할지 판정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서 심부름이 사라져 가고 있다. 공부하라고 부모들이 심부름을 안 시킨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심부름이 얼마나 넉넉하고 종합적인 인생 공부의 공간인데. 심부름이 사라져 가는 가정의 생활문화에 나는 씁쓸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읽는다.

그런가 하면 심부름센터는 성황이다. ‘심부름’과 ‘심부름센터’는 ‘심부름’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는 것 이외에는 엄청나게 다르다. ‘전통적 심부름’이 따뜻한 가족애의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심부름센터’는 냉정한 계약과 거래로 이루어지는, 약간은 음습한 모의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심부름’을 시킬 때는 아무런 의심 없이 “너를 믿고 시킨다”하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고, ‘심부름센터’에 일을 부탁할 때는 이중 삼중으로 단서를 붙이고 계약을 하면서도 “이 사람들을 도대체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하면서 불안스러워 한다.

자라는 자녀들에게 ‘성공하는 심부름’을 일부러라도 만들어 경험하게 해주라. 그리고 칭찬하라. 이렇듯 자명한 교육적 지혜가 있는데도, 우리는 가끔 옆집 ‘엄친아’를 빠른 시일 내에 따라 잡으라는, ‘성공할 수 없는모호한 심부름’을 주저 없이 맡기고, 그걸 못 해낸다고 아프게 야단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쁜 심부름도 있다. 담배심부름, 술심부름 따위를 좋은 심부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심부름 안에 들어 있는 ‘교육과정의 잠재성(Latent curriculum)’을 어떻게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심부름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학습의 과정이 될 수 있다. 심부름으로 아이들은 소통을 배운다. 심부름으로 아이들은 집밖의 사회를 와 닿게 배운다. 그리고 자신의 과업에 대해서 스스로 긍정의 강화를 한다. 심부름을 자청하는 아이들은 학습이 자기주도적임을 깨달아 나간다. 장차는 인생에 대해서도 자기주도적인 자세를 다져 나갈 것이다. | 경인교대 교수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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