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는 없다

2011.08.01 09:00:00

요즘 우스갯소리로 ‘엄친아’라는 말이 있다. 엄마가 자녀에게 너희도 이렇게 좀 하라고, 표준 모델로 제시하고 싶은 거의 결함이 없는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일종의 선망이기도 하고 내 자식 더 잘 되라는 자극의 기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엄친아가 과연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김천과 구미 사이의 경부선변 시골의 아포초등학교다. 우리 학교 인근에 ‘대신초등학교’가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아침 조례 때마다 ‘하루 한 가지 착한 일 하기(一日一善)’를 강조하셨다. 우리가 말썽을 부리거나 노력이 모자랄 때는 우리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근 대신학교 아이들은 일일일선을 잘 해요. 대신학교의 행사에 참석해서 보았는데, 그 학교 아이들은 정말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더라. 너희들도 그렇게 좀 해라.”
우리가 잊을 만하면 교장선생님은 대신학교 아이들을 거론해 칭찬하시며 우리의 분발을 촉구하셨다. 나는 대신학교 아이들에 대해서 조금씩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 후 김천시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대신초등학교 출신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들도 특별히 잘난 것이 없기는 나랑 비슷했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믿음이 무너져갔다.
중학교에 들어와서는 촌놈 티를 벗으려 애를 썼다. 김천은 그래도 시가가 번듯한 도시였고, 나는 농촌 면단위 학교를 다닌 티를 여기저기 내고 다녔다. 그런데 음악선생님은 내 촌티를 여지없이 확인시켜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분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울의 중학생들은 둘이 모이면 소프라노, 앨토 나누어서 자연스럽게 이중창을 부르고, 네 사람이 만나면 화음을 잘 살려 4중창을 부른다. 서울의 중학생들은 악보를 보는 순간 계명창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너희처럼 촌구석에서 자란 녀석들은 기본 멜로디조차도 잘 못 익히니 참 한심하다.”
이후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해 서울로 왔다. 대학시절 방송국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서울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내가 만난 서울 친구들 중에서 악보를 보고 음계명으로 자연스럽게 부르는 친구는 드물고 드물었다. 넷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4중창을 하는 경우는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옛날 선생님들은 무슨 고약한 심사로 우리들 기를 죽이려고 그렇게 했겠는가. 무언가 자극을 주어 우리에게 긍정적 강화를 부여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가난하고 헐벗던 시절,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야 할 자극들이 많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우리들 못난 구석을 아프게 헤집어내던 유럽의 언론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 말을 얼마나 많이 인용하며 스스로 주눅에서 헤어나지 못했던가. 그래서 그 서구의 하늘 아래에 살고 있다는 서구식 민주주의라는 완벽해 보이는 체제를 마음 안에서 얼마나 선망했던가.

선망의 기준을 이야기하자니 ‘엄친아’라는 말이 표제어로 떠오른다. ‘엄친아’라는 말은 지금 이 시점에서의 사회문화적 함의를 띠고 있다. ‘엄·친·아’! ‘엄마 친구의 아들’! ‘엄마 친구의 딸’을 나타내는 ‘엄·친·딸’이라는 말도 있다. 발상이나 기능에서 ‘엄친아’와 같은 말이다. ‘엄마의 친구 아들’은 엄마가 자녀에게 너희도 이렇게 좀 하라고, 표준 모델로 제시하고 싶은 거의 결함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것을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엄마의 친구 아들이므로)로 제시하고, 또 엄마가 그 집에서 직접 확인까지 하고 온, 부정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증거 인물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꼼짝 못하고 주눅이 든다.
엄마 쪽에서 보면 그렇다. 엄마 친구 아들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것 보고, 그걸 내 자녀들 앞에서 칭찬하고 부러워하면, 내 아이들이 ‘아! 우리도 엄마를 위해서 정말 잘해야 하겠구나’ 하고, 발전적인 변화를 보이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별 효과가 없고 자칫하면 부작용이 더 크다.
더구나 이런 모습을 습관적으로 보여주는 부모에 대해서 자녀들은 저항과 짜증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순진하게 긴장하며 엄마 이야기를 듣지만, 나이가 좀 들면 대부분 짜증을 낸다. “엄마가 말 하려는 걔? 나도 다 알아. 걔처럼 좀 하라는 거지, 또 그 이야기 아냐?” 엄마의 엄친아 이야기란 결국 아무개처럼 공부 잘하라는 엄마의 습관성 주문(呪文)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진작부터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엄친아 이야기를 계속할라치면 아마도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찌푸린 짜증을 듣게 된다. “아!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완벽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방법보다는 나은 것이 있다. 내 아이가 공부에도 관심 없고 말도 잘 안 듣는다면, 그래서 그런 행동을 고치도록 변화를 주고 싶다면, ‘잘난 엄친아’를 동원하지 말고 오히려 그 반대를 동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문제성 있는 엄친아’를 동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엄마 친구, 봉천동 사는 아줌마 있지. 그 집에 그제 다녀왔는데, 아휴! 그 집 아들 참 걱정이겠더라. 공부는 관심 없고, 대학 갈 생각 없다면서,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포부도 없다는 거야. 빈둥빈둥 놀러 다니는 데만 빠져 있고, 부모랑 뜻이 맞지 않아서 불만이 많고, 엄마 친구들이 왔는데도 본체만체 인사할 줄도 모르더구나. 걔네 엄마가 걱정이 한 무더기야. 나는 우리 아들 생각하니 얼마나 고맙고 대견한지 모르겠더라.”
내 아이가 부족하고 실망스럽더라도 꾹 참고 이렇게 말하고 아들의 기색을 살펴 볼 일이다. 내 아이의 잘못을 직접 지적하거나, 무어라고 불만을 바로 토로하지 않았으니 아이로서야 기분 나쁠 일이 없다. 약간의 피암시성(被暗示性, suggestibility, 암시를 받아들인 결과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의견이나 태도를 변경하는 것)이 작동하는 아들이라면, 일정한 공감을 표해 올 수도 있다.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해도 성공적이다.

‘엄친아’라는 말은 약간의 조롱기를 머금고 있다. ‘엄친아’의 수준과 요건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협소하고도 이기적인 기대욕망으로부터 생겨난 것 아닐까. 우리 사회의 퇴로 없는 경쟁 세태와 출세 욕망으로만 내몰리는 속물심리가 하나의 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기묘하게 반영하는 말이 ‘엄친아’이다. 또한 청소년 세대가 부모세대와 무언가 심리적으로 뒤틀리게 교섭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 바로 ‘엄친아’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그런 엄친아가 진정으로 있단 말인가. 엄마들은 말할 것이다. 내가 없는 사실을 지어내어서 말한다는 거냐.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이렇듯 본인이 확고하게 다짐하는 말은 이미 스스로 강하게 믿기로 최면을 걸어 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선 생각해 보자. 엄마 친구의 아들은 그렇게 모범적이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아들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그런 아들은 애초부터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내 아들에게 그런 완벽한 지적 · 정의적 자질을 갖추게 하여 키우고 싶은 엄마의 욕구가 ‘엄친아’의 가상 완벽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들 자랑을 한 엄마의 친구에게도 문제는 있다. 원래 자식 자랑이란 하다보면 인플레가 되는 법이다. 듣는 쪽에서 깎아서 들어야 한다. 그런 자랑의 말을 선망의 감정에 푹 빠져 듣게 되면, 공연히 내 아들만 부족한 것 같아서 불안감이 증폭된다.
엄친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어떤 아들이 엄마에게 말했단다. 엄마와 엄마가 말하는 그 엄친아가 딱 일주일만 가식을 벗고 살아보라고 했단다. 그 ‘엄친아’에게도 얼마나 많은 결함이 있는지를 알 것이라고. 나에 대해서 엄마가 엄마 친구들에게 조금만 긍정적으로 말해 주면 엄마 친구 누군가의 집에서는 나도 괜찮은 ‘엄친아’가 이미 되어 있었을 거라고.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어느 날 딸아이에게 우리 대학의 제자 학생들은 얼마나 온유하고 예절바르고 반듯한지 모르겠다. 나는 네가 그런 딸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랬더니 딸아이는 냉큼 이렇게 말한다.
“아빠! 아빠 제자들도 다 자기 집에 가면 저처럼 다 그래요. 신경질 내고 짜증내고, 할 이야기 성질대로 다하고. 그런다니까요. 저도 대학에서 교수님 뵐 때는 아빠 제자들처럼 그런다니깐요.”
다음날 딸아이의 말을 우리 학생들에게 했더니 학생들이 무릎을 치며 웃는다. 정말로 그렇다는 것이다. 절대 공감이라고 한다. 그렇다. 엄친아는 일종의 신기루이다. 이기적 경쟁에 집착하여 자녀를 내 욕심대로 몰아가려고 할 때, 숨어 있는 욕심의 시선에 무언가가 잘못 굴절되어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허상의 인물이 ‘엄친아’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엄친아’는 없다!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그런 ‘엄친아’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이 좁은 비교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엄친아’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경인교대 교수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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