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으로 말해요

2011.10.01 09:00:00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언어생활에 대한 지적이 많다. 하지만 비단 그들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성세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럽히는 욕설을 줄여야 한다.



 세상이 온통 욕으로 말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마치 정상적인 말로 해서는 알아주지도 않으니 욕으로 말하라고 권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욕으로 말해요’는 ‘폭력으로 해요’와 같은 말이다. ‘욕으로 말해요’는 ‘말로 해요’와는 전혀 딴판의 대조적인 언어심리를 보여준다. 동시에 추락한 우리 언어문화의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꼭 육두문자 욕이 아니라 해도 감정을 그냥 내질러 배설해버리는 그런 욕도 많다. 사실은 그런 욕이 더 큰 상처를 준다. 정치판의 비난 성명전이 대표적이다. 크게 보면 모두 욕에 준하는 저질 언어의 양태이다.
청소년들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한 현장 선생님의 연구(이도민,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2007)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욕설 행태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 놀랍다. 기존 가치 행태를 둘러 엎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욕의 문화를 어디서 배웠겠는가. 우리들 기성세대 어른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는 요지부동의 사실이다. 입증하기가 그리 어렵지도 않다.
동료 H 교수의 체험담이다. 아주 오랜만에 고교 동창들 몇 사람이 모인다고 전화를 받고 나가서 함께 술자리를 했단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면서 이 친구의 말도 고조되었는데, 그야말로 ‘말 반 욕 반’의 말투였다. 별 의미도 없는 욕설을 상투어처럼 사용해 듣고 있기가 불편했단다. 동창 간의 허물없는 대화임을 과시하는 데는 욕설을 평상 언어처럼 쓰는 것이 기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것이 H 교수만 겪은 매우 드문 체험담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들 모두에게 너무도 흔한 풍경이다. 어찌 우리의 차세대가 저절로 욕에 찌들었겠는가.
욕은 무지(無知)에서 나온다. 무엇을 제대로 알고 나면 욕을 하기가 두려워진다. 이때 ‘무엇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두 가지 차원에서 짚어볼 수 있다. 하나는 욕이란 남을 상하게 하고 그것이 결국에는 나를 상하고 황폐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차원이다. 이것은 일종의 지혜 차원의 앎이기 때문에 알아야 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바로 터득되는 앎은 아니다. 경륜과 꾸준한 반성적 통찰을 통해서 깨달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치는 젊은 청소년들에게 꾸준히 일깨워야 할 것이다.
욕이 무지에서 나온다고 했을 때 그 ‘무지’, 즉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차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누굴 욕할 자격이 별로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당연히 그것을 아는 경지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알게 모르게 다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 조화로 세상의 질서가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의 허물과 잘못도 캐들어가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에 이를 수 있는 경험을 교육적으로 어떻게 제공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식의 추상적인 진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학자들의 말씀처럼 들릴 수 있으나 그저 예의니 염치니 하는 것들이 도식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흐르기 쉽다. 예의와 염치를 단순한 규범으로 이해하고 가르쳐서는 도식적인 욕설 금지 교육을 넘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욕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욕을 해서는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욕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예의와 염치란 무엇인가?”
“네, 그것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 나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실효성 있는 교육적 시도라고 하기에는 2%가 모자란다. 현대사회의 생태와 구조, 체제 등을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들 각자의 존재가 어떻게 그것에 포함되는지를 가르치고 배우고, 경험 · 토론 ·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내가 욕하고자 하는 사람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래서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체험적으로 다가가는 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그를 욕으로 괴롭히는 방책 대신 어떤 합리적 대안의 방책이 있는지를 탐구하도록 하는 교육적 솔루션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또 이제는 욕설문화를 개선하는 교육이 단순히 언어를 교정하는 방식으로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맥락들을 함께 교육적으로 처치할 수 있는 처방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는 욕설이 발휘하는 의미의 작용을 그야말로 상위 인지(meta-cognition)할 수 있도록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이 하는 말이 욕설인지 모르고 말하는 아이도 많고, 욕설의 언어적 의미나 사회 문화적 의미, 그리고 윤리적 의미를 전혀 모르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더 많다. 아마도 대부분이 그러하다. 예컨대 요즘 아이들이 발어사처럼 달고 다니는 욕설의 대표격으로 ‘씨팔(씨발)’이 있다. 그 어원과 뜻을 밝혀서 이 말이 ‘씹할’에서 온 것이고, 그 뜻은 ‘성행위를 할’이라는 뜻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욕이 되는 것은 말 자체가 비속해서이기도 하지만 이 말 앞에 생략된 말 즉, ‘너의 어머니와’ 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른바 탐구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요컨대 ‘씨팔’은 ‘너는 네 어미와 성행위를 할 놈’이라는 근친상간의 저주가 들어가 있는 말임을 알게 한다. 내가 무심코 상대에게 ‘씨팔’이라고 욕을 하고 상대도 그것을 다시 ‘씨팔’이라고 응대하는 사이에 나 자신은 물론이고 어머님을 처절하게 더럽혀 욕보이도록 저주하는 행위를 하는 데에 이르게 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교육은 호기심 해소 차원을 넘어서서, 아이들로 하여금 지적인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로 나아갈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요즘 세태 중에 하나가 정의감을 빙자해 욕설을 합리화하는 경우이다. 어리석은 자는 정의감을 욕으로 표현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정의감을 법으로 호소한다. 현자들은 섣부른 정의감을 인간의 본성에 되비추어 오히려 경계한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는 관습의 규범이 있었다. 어느 날 예수에게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판단을 물었다. 그때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이었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쳐라” 그랬더니 사람들이 스스로 물러갔다. 정의감을 욕설로 표현하는 그 순간 정의는 훼손된다.
주먹이 앞서는 세태에서 우리는 ‘말로 해요’라는 제법 이성적 발화(發話)를 쓸 수 있었다. 누군가 싸움 난장판에서 이렇게 호소하면 그래도 사람다운 이성의 분위기가 배어든다. 물론 다른 레벨의 싸움도 있다. 그것은 ‘법으로 해요’로 나타나는 싸움의 경지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갈등의 고개로 치달을 때, 더 이상 인간적 타협이나 화해를 모색할 조금의 틈새도 없을 때, ‘법으로 해요’가 나온다. 물론 ‘말로 해요’가 ‘법으로 해요’보다는 한 수 위의 해법이다. ‘법으로 해요’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갈등처리 방식이다. ‘말로 해요’보다 못하다. 그러나 ‘욕으로 말해요’보다는 훨씬 낫다. ‘욕으로 말해요’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욕설이란 남을 저주하거나 남의 명예를 더럽히는 말이다. 욕설은 그 자체로서 오물이다. 똥물과 같은 것이다. 욕을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언어와 감정의 오물’을 마구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씌우는 것과 같다. 똥 오물을 거름 밭에 한 번이라도 뿌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을 뿌리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욕설은 하는 순간 욕을 먹는 사람과 욕을 하는 사람 두 사람 모두 해를 입는다.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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