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병아리 교장의 경영계획서는 이렇게 시작됐다.
세계가 급변하고 다양한 계층이 상호 경쟁하는 현대사회에서 교육소비주체의 수요가 다양해지는데 「공교육 정상화」나 「시장 만능론」만으로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은 교육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에 정확하고 신속하게 반응하면서 세분화되고 다층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교원의 질적 수준을 향상 시켜야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 수요자에게 다가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나름대로의 처방을 내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교육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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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힘이기에 이제 교육에 대한 디자인 혁명으로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어봐야겠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그리고 스토리가 있는, 그런 학교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최고의 브랜드는 소비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꿈을 판다고 한다. 따라서 최고의 학교는 학생들이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도록 인간적 소양과 근성을 키워주어야 하며,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맺는다’로 끝나는 그 당시의 학교경영계획서를 보면서, 경영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진다.
경지영지(經之營之)
나는 용어의 어원(語源)을 알아보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다. 어원은 어떤 말이 오늘날의 형태나 뜻으로 되기 전 본래의 것이다. 언어는 쓰이고 있는 시대와 사회 또는 집단에 따라서 가진 뜻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본래의 뜻을 알면 개념과 의미가 훨씬 명확해진다. 그래서 특히 요즘 스마트경영, 창조경영, 펀(fun)경영, 경영학 무용론 등과 연관해 ‘경영’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서양의 경우 ‘경영’으로 번역되는 management의 동사형 manage는 말(馬)을 훈련시키고 다루는 것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maneggiare에서, 혹은 손을 뜻하는 라틴어 manus에서 유래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해하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동양은 유가(儒家)의 경전인 <시경(詩經)>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영대(靈臺)’ 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經始靈臺 경시영대 영대(靈臺)1)를 짓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經之營之 경지영지 그것을 운영하니
庶民攻之 서민공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달려와 일을 하여
不日成之 불일성지 하루도 못되어 완성되었다.
경시물극 계획을 세울 때 공사를 서두르지 말라고 하였는데
庶民子來 서민자래 백성들이 자식처럼 몰려와서 도왔다. ‘經之營之’라는 구절에서 ‘經營’이 등장한다. 그리고 <맹자>의 주석서(註釋書)라 할 수 있는 <맹자집주(孟子集註)>에서는 經과 營에 대해서, ‘경은 헤아림이요(經, 量度也) 영은 도모함이다(營, 謀爲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시경>에 쓰인 ‘경영’의 의미를 현대적 시각으로 옮겨보면, 계획을 세우고(經), 실행하는 것(營)인데, 그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과 ‘신속하게 높은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즉,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이 경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넛지(Nudge)
상품의 포장지와 이름을 루마니아(Romania) 국기와 국명에서 빌려온 초콜릿 바(chocolate bar) ‘롬(ROM)’이라는 제품이 있다. 1964년에 문을 연 루마니아의 제과업체 칸디아 둘체(Kandia Dulce)에서 생산하는 루마니아 전통 초콜릿이다. 그런데 올 초에 ‘당신들이 미국을 좋아하기 때문에 포장지를 바꾼다’라는 발표와 함께 포장지를 루마니아의 국기에서 미국의 성조기로 바꾸었다. 물론 그 뒤에는 동구권 붕괴 이후 미국 초콜릿 바에 시장을 빼앗김에 따라 살아남기 위한 계산된 전략이 숨어 있었다. 그러자 칸디아 둘체의 웹사이트와 페이스북을 통해 크게 항의를 하는 등 애국심으로 소비자들은 분노했고, 언론은 이런 사실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포장지를 성조기로 바꾼 1주일여 후, 회사 측은 “우리 국민들은 미국보다 조국 루마니아를 더욱 사랑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됐다”라는 발표와 함께 다시 이전의 포장지로 돌아갔다. 성조기 포장품은 수집가들의 애장품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롬은 루마니아 초콜릿 바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됐다.
이 광고의 전략은 단순히 ‘롬’이라는 루마니아 초콜릿 바를 사달라고 강조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로 하여금 국가와 민족이라는 가슴 뭉클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자극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언가 느끼면서 그 느낌을 공유하고 토론하게 만들었으며, 준비된 후속조치를 통해 롬에 긍정적 여론이 형성되도록 유도했다. “응, 문제없어. 정성을 들여 할 테니까, 한 번만 시켜줘, 이 사과를 줄 테니.”
“글쎄, 그렇다면… 아냐, 벤 이건 안 돼. 만일…”
“그럼 전부 줄게.”
톰은 민첩하게, 그러나 얼굴만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오만상을 찌푸린 채 브러시를 내주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 ~ 1910)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서 톰은 개구쟁이 짓을 해서 집 울타리에 페인트칠을 하라는 벌을 받고 고민 끝에 꾀를 내었다. 자신이 받는 벌을 재미있는 놀이처럼 보이게 해 친구들이 한 번만 페인트칠을 하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고, 결국은 친구들이 울타리를 전부 칠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페인트칠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은 살피지도 않고 페인트칠을 보는 관점인 놀이라는 프레임에 좌우돼 어떻게 보면 비합리적인 선택과 행동을 한 경우이다.
한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스히폴 공항의 남자화장실은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없어도 소변기 밖으로 튀어나가는 소변량이 80%나 줄었다고 한다. 소변기 중앙에 파리 한 마리가 그려져 있을 뿐인데 소변기의 파리를 보고 그것을 맞추기 위해 조준하는 바람에 소변이 밖으로 튀질 않아 화장실의 청결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자발적인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슬쩍 옆구리를 찌르는 정도의 가벼운 개입을 의미하는 것을 행동경제학 용어로 넛지(nudge)라고 한다. 넛지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의도를 가진 선택설계자(choice designer)가 암암리에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여론 조사 시에 질문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도 있고, 편의점에서 상품을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특정 상품의 매출이 증가하기도 한다.
특히, <넛지 :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의 저자인 시카고대 행동경제학자 탈러(Richard H. Thaler)와 법률가 캐스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은 이 책에서 무의식적인 판단이 경제적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드러운 개입’으로 넛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이미 매일 넛지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은행에서 줄 서는 번거로움을 해결한 번호 대기표 발행,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 2층에 있는 화장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을 때마다 피아노 소리가 나게 하는 것 등 수없이 많다.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부분에서 장발장은 친딸처럼 키운 코제트와 그녀의 남편 마리우스가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데, 임종을 맞는 그의 머리맡에는 미리엘 주교가 선물한 은촛대가 놓여 있었다.
장발장의 갱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은촛대와 같은 넛지야말로 이 시대 경영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공부하는 학생, 지각을 자주 하는 학생, 복장이 불량한 학생,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들에 대해 계몽과 훈계로 가득 찬 플래카드를 접고 ‘파리’나 ‘은촛대’ 같은 살아 있는 넛지로 유혹(?)하고자 한다.
링컨의 말처럼 우리의 본성 중에서 상대적으로 착한 천사를 독려하면 인간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Evergreen Tree
작년, 집사람 생일 때, 뭐 새로운 것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나이만큼의 개수로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50가지가 넘으니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틀 정도 고민하다가 포기를 하고 금일봉과 책 몇 권, 그리고 음악 한 곡을 선물했다.
크립 리처드(Cliff Richard)가 불렀던
As the seasons go/ … / I love you so/ don’t you know that I’ll be/ true til the leaves turn blue on the evergreen tree/ on the evergreen tree/ on the evergreen tree 지금처럼 영어 듣기 공부를 할 수 있는 자료가 흔하지 않았던 그 시절, 팝송이나 미군 방송인 AFKN(American Forces Korea Network)에 매료되어 그 나름의 영어공부를 하던 친구들이 제법 많았다.
<3000 영어단어 완성>이라는 책을 들고 앉아 공부하는 건 영어공부를 고통이라는 이미지로 만들 뿐이다. 영어를 단지 공부라는 개념으로 딱딱하게 접근하면 흥미가 사라지지만 팝송이나 AKKN은 영어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결국 경영이란 조직이 달성하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직이 가진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행위이며 핵심은 인적 자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스린다’는 말의 어원이 ‘다 살린다’라는 것이기에 경영이란 곧 ‘다스리는 행위’와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학교를 경영한다는 것은 학교와 학생을 ‘다 살리는 행위’와 같으며, 그것은 교사와 학생이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고 그 느낌의 공유를 통해서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소년원에 간다. ‘좋은 이야기’로 감동을 주자고 멘토 역할을 자임한지도 어언 12년, 그러나 그 벽이 워낙 두꺼워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기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그래서 몇 년 전에 한 가지 꾀를 내었다. A4용지 2매 정도 분량의 글을 읽게 하면서 특정 글자의 개수를 세도록 했다. 이를테면 주어진 문장 속에 있는 ‘각’이라는 글자가 몇 개인지를 누가 정확하게 빨리 찾아내나 시합을 시켰다. 사실 그 아이들은 ‘좋은 이야기’의 내용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글자 개수 세기에는 열중했다. 시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글자 개수 세기에 열중하며 7개월여가 지나가는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 이 글 참 좋네요. 친구한테도 보내야겠어요.”
“뭔데?”
“태양을 등지고 서면 앞에 그림자가 생기지만 태양을 마주보고 서면 앞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글이요.” 아내에게 멋있는 석양을 보여주기 위해 바닷가에 집을 지었다던 어느 시인의 행복함보다 더 진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