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이기에 당한 흉터를 만지며

2017.02.03 14:37:22

가난하단 이유로 도둑누명을 쓰곻 종아리가 터지도록 맞아야 했던 초4년의 아픔

난 참으로 흙수저 중의 흙수저로 태어났다.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이동리 1010번지가 나의 탯자리이고, 이 마을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나오는 '존재산 밑의 해방지구(빨치산 치하에 있던 지역)' 이었다. 그래서 내 어린 날은 우리 집에 밤엔 인공기가 달리고, 낮엔 태극기가 걸리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난 이 마을을 9살이 되던 해에 떠났다.

본래 안국동 양반촌에서 사시던 고조부님은 조선말 마지막 오위장을 지내셨으나, 일본이 들어와 신식 군대인 신기군을 만들면서 면직이 되어 집에 머무르고 계셨다. 임오군란이 터지고 군졸들이 일으킨 사건은 점차 그 세를 늘려 가면서 반란으로 까지 커졌으나 지도자가 없는 오합지졸이다 보니 누군가의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오위장으로 퇴직상태이었던 세분의 오위장들은 억지로 떠밀려 지도자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됐다.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교섭하는 사람, 민씨 일파를 뒤엎는데 앞장을 서는 사람, 그리고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나선 사람 이렇게 세분이 임무를 맡고 나서게 됐다. 일본공사관을 쳐들어간 부대를 이끌고 가셨던 고조부님은 내내 일본의 밀정들에게 쫓겨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인 정남진을 향하여 밤중에 한양성을 빠져 나오셨고, 전남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정남진에서 약 2km 못 미치는 곳)에 터를 잡고 사시게 됐다.

그러나 몇 년후에 결국 일본 밀정에게 붙들려 처형을 당하셨고, 할아버지께서는 열심히 일해 마련한 농토로 사실만 하게 됐지만, 뒤이어 일어난 동학란의 마지막 동학도들을 장흥천변의 백사장에서 산 채로 기둥에 잡아 묶어놓고 불태우는 끔직 하고도 잔인한 모습을 보시고 이 고장도 살기 어렵다고 판단으로 이사를 하신 곳이 이곳 율어면 이동리였다. 

이 마을에 이사 와서 태어난 첫번째가 나였으니 이 마을 태생이다. 형제 중에서 바로 밑의 동생까지 둘이 태어나고 '해방지구의 국민'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이사를 한 곳이 득량면 마천리 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은 했지만 해방지구여서 학교에 갈 수가 없어서 학교 구경도 못하고 있다가 이사한 곳의 득량국민학교에 전학을 했다.

여기 이사 와서 학교에 갔으나 이미 1학년 마지막 석달을 남긴 상태에서 글자도 못 익히고 2학년에 올라갔다. 이 무렵 우리 집의 사정은 식구는 15명이나 되는데 논 10마지기(약 3000평)으로 식량이 모자라서 멀건 시래기죽으로 연명을 해야 하는 흙수저 중에서 가장 가난한 흙수저 처지이었다.

가장 가난에 시달리던 때가 바로 내가 3, 4학년 때였다. 이사를 와서 논 10마지기 중에서 식량이 모자라서 두 마지기를 팔았으니 이제 2400평 정도를 가지고 15명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장 힘들 때 이었다.

솔직히 학교에 내던 월사금(매월 내던 학교 수업료)을 내지 못해 선생님이 집까지 찾아오시기도 하였던 시절이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던 시절에 나에게 시련이 닥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초여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체육시간이었지만, 당번인 나는 면서기 아들인 친구와 둘이서 교실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배탈이 난 나는 한 시간 동안에 두 번이나 화장실을 달려가야 했다. 가난한 우리 집에서 보리를 베어 놓고 벼를 심기위해 미쳐 타작도 안 했는데 장마가 와서 보리가 썩어들어 갔다. 먹을 것이 없는 우리 집에선 그 곰팡이가 핀 보리를 가져다가 껍질째 빻아서 보릿가루로 죽을 쑤어 먹었다. 그러니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미쳐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바지에 흘리고 마는 일까지 벌어지곤 하던 가난이 찌들어진 삶이었다.

체육 수업이 끝나고 들어온 아이들은 요즘처럼 씻을 곳도 없어서 땀 냄새를 풍기면서 다음시간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선생님 영식이 돈이 없어졌어요.”

난데없는 소리에 교실은 갑자기 수선스러워지고 선생님은 도둑을 찾아야 한다고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교실 뒤로 나오라고 하고선 일일이 몸에 지닌 것을 수색하였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이번에는 책상 속의 물건들을 일일이 들춰 보았지만 역시 나오지 않았다. 그 때 이웃 교실 선생님이 오셔서 “자! 이제 여기 이 솔잎은 하나씩 잎에 물고 5분 동안만 있으면 도둑질을 한 사람은 마음이 불안해서 걱정을 하는 것 때문에 솔잎이 1cm 정도 자라게 된다. 그러면 도둑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하고 솔잎을 입에 물려준 뒤 5분 동안 눈을 감게 했다. 5분후 솔잎을 검사하였으나 도둑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업은 끝났고 아이들은 집으로 갔지만 당번인 나와 그 친구는 교실에 남아서 선생님께 추궁을 당했다. 한 사람이 추궁을 당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운동장을 열 바퀴 뛰어야 했다. 두 번 세번 씩이나 했지만, 돈이 나오지 않으니까 선생님은 매를 들고 때리기 시작했다.

“저 아이는 집이 부잣집이고 늘 용돈을 가지고 다니지만 너는 가난하여 돈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지 않아. 그리고 저 아이는 교실에서 한 걸음도 나간 적이 없지만 너는 두 번이나 나갔어. 교실을 아무리 뒤져도 돈은 나오지 않았는데 그럼 네가 어디다가 가져다 숨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 어서 가져다 숨겼으면 가지고 와, 그럼 용서를 할 거야.” 하고 나를 달랬지만 정말이지 억울하고 환장할 일이었다.

가난하지만 양심적으로 살았고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는 나인데, 더구나 오늘은 배가 아파서 못 견디고 화장실을 오락가락하면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나에게 도둑 누명까지 씌우는 것이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정했다.

“선생님 저는 가난한 집의 아들입니다. 그렇지만 돈을 훔치지는 않았습니다. 썩은 보릿쌀로 죽을 쑤어 먹고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다니느라고 가만히 앉아 있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안 훔쳤습니다. 억울합니다.” 

나의 이런 말은 선생님을 더욱 화가 나게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사정없이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끝까지 버티고 서서  “선생님 정말 안 훔쳤습니다. 억울합니다.”만 외치고 서 있었다. 

“저 아이는 부잣집 아이이고 네 놈은 가난하여 돈이 필요했을 것 아니야. 빨리 내 놓지 못해!” 이젠 완전히 도둑놈 취급을 했다.

처음엔 아프던 종아리가 신경이 마비되었는지 아픈 것인지 안 아픈 것인지 짐작조차 안 됐니다. 선생님이 때리는 것을 멈추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선생님은 잠시 멈추시고 자리에 가시더니 종이를 쓱쓱 비벼 가지고 와서 내 종아리를 닦아 주었다. 빨간 피가 묻어 나왔다. 그때에야 나는 종아리가 터져서 피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나이에 담임에게 “가난한 네놈이 돈 훔쳤지!” 라고 의심받고 종아리가 터지도록 매를 맞았던 기억은 만 6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는 종아리의 흉터를 어루만지면 생각이 나곤 한다.

더구나 이런 일이 있고난 3일 후에 내가 아닌 부잣집 아들이 그 돈을 훔쳐서 교실 밑부분에 숨겨두고 조금씩 꺼내 과자를 사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선생님은 나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 이런 흙수저 중에 흙수저 이니까 무시해도 되는 것이었던가 보다. 

우리 주변에 혹시라도 이런 푸대접을 받는 흙수저 아이들은 없는지 걱정이다. 이런 작은 일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일은 없는지 우리 선생님들은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아이들을 다루어 주시기 바란다.
김선태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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