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야기] 규원가, 현재의 삶과 ‘접속’하다

2017.02.20 16:52:02





방학을 하루 앞두고 수업 공개에 나선 선생님이 있었다. 읍 단위 시골마을의 여고였는데 학업성취도가 매우 낮고 독감도 유행해 결석생이 많은 상황이었다. 비주얼씽킹 연구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1학기엔 관내 수업연구까지 거뜬히 해낸 실력파 선생님이었지만 그런 악조건에서의 수업공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방학 전 마지막 수업을 의미 있게 마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고 했다. 

수업 종이 울리고 학생들은 우왕좌왕 자리를 못 잡다가 5분이 지나서야 수업준비를 갖췄다. 독감으로 빈자리가 많은데다가 엎드린 사람도 더러 있어 선생님은 도입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번 방학을 잘 보내고 3학년에 진급하면 내년 겨울방학은 너희들한테 자유지?”하며 ‘규원가’의 뜻풀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규원가는 소식 끊긴 남편을 원망하는 아내의 노래다. 학생들이 한 구절을 읽으면 선생님은 그 구절을 해설해줬다. 전 시간에 배운 상춘곡은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분석하며 자세히 접근했지만 규원가는 화자의 정서와 상황을 파악해가며 활동지 빈 칸에 비주얼씽킹으로 정리해보자고 했다. 

20년 전 젊고 고왔던 아내가 세월무상을 한탄하는 대목에서 선생님은 불현듯 “20년 전 나도 고등학생이었다”고 말했다. 동안에다 미혼인 선생님이 “여러분 중 한 학생의 어머니와 동갑”이라는 고백을 했을 땐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주인공한테 속절없이 지나간 세월이 선생님한테도 예외는 아니구나” 하시더니 규원가 속 화자의 정서를 간단히 이모티콘으로 표현해 보라고 했다. 젊었을 때 예뻤던 모습과 지금의 늙고 초라한 모습을 비교해 그려두면 이해가 쉬울 거라 했다.(고전 수업 활동지는 좌측에 시구가 적혀있고 우측에 빈 칸을 둬 필요할 때마다 이미지로 내용을 정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학생들이 비주얼씽킹 활동을 하는 동안 선생님은 교실을 돌며 그림에 대해 진짜 늙어 보인다거나 아이디어가 좋다는 등 공감해주고 격려했다. 선생님은 토크쇼 진행자처럼 “너희들은 결혼하고 싶니?” 물었고 결혼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을 끄집어냈다. 언제 결혼할 거냐는 질문에 한 학생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규원가 속 주인공처럼 남편이 바람피울까봐 싫다고 했다. 어떤 남편감을 원하느냐는 질문에는 잘생긴 외모, 학벌, 돈, 성격, 요리 솜씨, 해외파까지 거론됐다. 해외파에는 외국인도 해당 되느냐는 질문에 인형처럼 예쁜 2세를 위해서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답변도 나왔다. 선생님의 인생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은 호기심에 귀를 쫑긋 세웠고 엎드렸던 학생들도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다시 책으로 돌아와 소식조차 없는 남편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서 정처 없이 떠돌다가 새로 온 기생을 만나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떨까?” 또 물으셨다. 그 때 돌연 한 학생이 큰 소리로 “이래서 결혼하기 싫다니까요!”라고 외쳤다.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수업나눔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지역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정불화로 결손 자녀가 유난히 많은 곳이라 했다. 학생들이 결혼에 대해 허황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선생님은 수업 속에서 인생의 선후배로 학생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삶을 이야기했다. 만약 선생님이 교과서 지식과 입시 위주 문제풀이로 일관했다면 규원가 같은 고전이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졌을까? 

교실은 이제 막 수업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아쉽게도 종료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2분만 더 해도 돼?”라고 양해를 구했고 아이들은 기꺼이 “예”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수업에 열심히 참여한 두 학생을 칭찬하며 나머지 학생들을 이들 곁으로 불러 모았다.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한 형태로 옹기종기 모인 가운데 두 학생은 오늘 배운 내용을 차분히 정리했다. 특이했던 건 두 학생 모두 텍스트로 내용을 정리한 게 아니라 직접 그린 그림에 이야기를 입혀서 스토리텔링하며 줄거리를 요약했다. 오랫동안 공들여 숙성시킨 선생님의 비주얼씽킹 수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림 속 주인공들은 생생히 살아있었고, 여자의 표정은 슬프고 외롭고 불쌍해 보였으며, 젊은 날의 아름다움과 나이 들어 초라해진 모습이 너무도 잘 비교돼 있었다. 쉬는 시간만큼은 단 1분도 양보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두 친구의 설명이 다 끝나도록 규원가 속 화자에 감정이입이 된 듯 조용히 경청하며 수업을 마쳤다. 
유희선 경기 양오중 수석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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