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더 없이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껴질 때, 누구나 한 번쯤은 간절히 빌어봄 직한 바람이 아닐까. 이를테면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스파르타’ 같은 한 학기를 보낸 끝에 꿀 같은 여름방학을 맞이한 선생님들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문장은 꼭 즐거운 순간에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가올 시간이 두렵게 느껴질 때, 이 주문이 가진 간절함은 배가 된다. 예를 들어, 월요일 출근을 목전에 두고 일요일 밤을 보내는 전 세계 직장인들의 공통된 하나의 소원-내일이 오지 않았으면-처럼 진실된 기도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번 달 소개할 두 작품의 주인공은 각자 다른 이유로 다가올 내일을 두려워하는 이들이다.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의 국제분쟁 전문기자 ‘연옥’은 위암 선고를 받은 시한부 환자다. 그는 역사학자인 정민과 한 아이를 낳은 부모지만, 그렇다고 부부는 아니다. 이들은 학창시절 처음 만나 황혼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때로는 친구이자 형제로, 때로는 연인이자 천적으로 이 기묘한 관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정작 정민은 연옥이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불청객처럼 그녀를 찾아와 매주 한 번씩 토론을 벌이자는 생뚱맞은 제안을 한다. 목요일마다 역사, 행복, 죽음 등 거창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관계는 연옥의 투병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한 사람의 삶에 허락된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사실 하나만이 밝혀졌을 뿐인데, 이는 20년 넘게 애써 외면해온 서로의 관계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사랑과 열정의 뜨거움이 한 김 식은 50대 남녀의 대화. 그렇기에 더욱 복잡 미묘하게 얽혀 있는 속내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두 인물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대방이 아닌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관객이 객석을 나서며 내가 만든 거짓말에 숨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속이며 외면하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만드는 이유다.
뮤지컬 <틱틱붐>의 주인공 존은 강박적일 정도로 시간의 흐름을 괴로워한다. 서른 살 생일을 불과 며칠 밖에 남겨두지 않은 그의 머릿속에는 언젠가부터 째깍째깍 초침소리가 울리고, 이는 마치 시한폭탄의 폭발을 경고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자신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겠다는 꿈을 가진 그는 곡을 쓰기 위해 5년째 식당 웨이터로 일하면서 까다로운 손님들의 시중을 견뎌왔지만, 막상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고 싶다는 제작자는 아무도 없다.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여자친구는 마땅한 답을 줄 수 없어 미안함에 떠나보냈다. 그 참에 한때 예술가 동료였던 마이클이 꿈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해 큰돈을 번 모습을 보니 더욱 착잡할 뿐이다. 그의 최신형 BMW와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새 아파트 앞에서 초라해지는 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이클은 이제 그만 ‘진짜 인생’을 살라고 조언한다. 존은 마치 사회의 낙오자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서른 살 생일을 맞는다.
<틱틱붐>은 작품의 배경을 1990년의 뉴욕이 아니라, 2017년의 서울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젊은이들의 고민을 피부에 와 닿도록 세밀하게 그려낸다. 이는 <틱틱붐>을 쓴 극작가이자 작곡가인 조너선 라슨(Jonathan Larson)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으나, 그를 괴롭힌 것은 넉넉지 못한 생활보다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었다. 덕분에 청년층은 물론이고 서른 즈음을 통과하며 성장통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더군다나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처럼 나이 앞자리마다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며 그에 따른 의무를 부여하는 한국의 관객들은 존이 느끼는 나이의 무게에 더욱 공감할 듯하다.
그렇다면 현실에서의 존은 어떤 결론을 맺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뮤지컬계에서 천재작곡가라는 타이틀을 당당히 거머쥐었다. 조너선이 생활고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데뷔작, 뮤지컬 <렌트>는 온갖 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관객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아 브로드웨이 역사상 손에 꼽히는 최장기 공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정작 그는 자신의 성공을 살아생전에는 보지 못했지만. 조너선은 <렌트> 첫 공연을 앞둔 하루 전, 극장에서 열린 최종 리허설을 앞두고 대동맥류 파열로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쩌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의 성공을 의심했을지도 모르는 조너선. 낯선 숫자로 시작되는 나이의 무게를 누구보다 무겁게 느꼈던 그가 남긴 유언 같은 가사는 그래서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조너선은 <틱틱붐> 속 존의 입을 빌어 말한다. (비록 미래를 확신할 수 없더라도) 삶의 순간을 초조함으로 채울 것인지, 사랑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답하라고.
뮤지컬 <틱틱붐>8.29-10.15 | 대학로 TOM(티오엠) 1관 | 02-541-2929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7.22-8.20 |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 | 1544-3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