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금성초 화단에서>
일요일 아침, 학교에 두고 온 책을 가지러 갔습니다. 이젠 어엿한 중닭으로 자란 닭들에게 모이를 줬습니다. 한참 땅굴 파기에 여념 없는 토끼들에게도 사료를 줬습니다. 사람의 손길로 자란 녀석들이라 주차장에 차가 들어오면 쪼르르 내다보는 영리한 녀석들입니다.
밥그릇이 텅 비어 밥 달라는 듯 쳐다보는 눈빛이 생각나서, 일요일에는 학교에 아무도 오지 않으니 쫄딱 굶는 게 짠해서, 일요일에 학교에 들르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너른 풀밭이나 산에서 살지 못하고 사람들 손에 의해 길러진 토끼들은 토끼장을 뛰쳐나가서도 다른 데로 가지 못하고 토끼장 주변을 맴돕니다. 길들여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들도 자기만의 편견이나 신념의 틀에 갇히면 그 틀을 깨기가 어렵습니다.
잘못된 교육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심어줄 수 있으니 가르치는 자는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 종교관을 강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함을 집 나간 토끼에게서 배웁니다. 어쩌면 초등교육이 가장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칩니다. 국가수준 교육과정이 모두 같고 교과서도 모두 같습니다. 2015교육과정이 교사교육과정이라고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전국의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모두 같은 셈이니.
언론이나 교육당국, 기업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들먹이며 호들갑을 떠는 현실은 우리나라의 냄비 근성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다른 나라는 우리처럼 이렇게 요란하게 떠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금방이라도 세상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 같고 세상이 급변할 것 같은 불안감을 조장하는 건 아닌지. 혁명이란 근본이 튼튼해야 하고 기본에 충실함에서 비롯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6년 동안 초등학교 교육과정이나 교과서가 모두 같은 현실, 입시 정책이 조석으로 변해 그걸 따라가는 학생들은 대학 입시에 올인하는 나라에서, 인문학의 바탕 위에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기반이 돼야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씨앗이 자랄 수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담양금성초 병설유치원 앞에서>
여름방학으로 학교는 정적에 휩싸여 있지만 자기만의 꽃을 피우며 학교를 지키고 있는 저 꽃들이 제게 이릅니다. 꽃들은 보여주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사람이 되라고, 나의 모든 순간을 꽃을 피우듯 살라고 조용히 타이릅니다. 토끼장의 토끼들은 또 내게 이릅니다. 자기들처럼 교육과정의 틀에 갇혀서 너른 세상에 나가서도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비약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길러내지 말라고. 그러니 학교교육을 절반의 성공이라 부른다고. 토끼와 채송화의 속삭임에 담긴 가르치는 자의 무거운 책임감을 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