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들국화라 부르기엔…

2017.09.01 00:00:00

가을은 들국화의 계절이다. 도심을 걷거나 가까운 산을 오르다보면 국화처럼 생긴 흰색·연보라색·노란색 꽃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꽃들을 흔히 들국화라 부른다. 들국화라고 불러도 틀린 건 아니지만, 들국화는 가을에 피는 야생 국화류를 총칭하기 때문에 ‘들국화’라는 종은 따로 없다. 사람들이 들국화라 부르는 꽃들의 실제 이름은 무엇일까.


들국화라 부르는 꽃은 연보라색 계열인 벌개미취·쑥부쟁이·구절초, 노란색인 산국과 감국 등 다섯 가지가 대표적이다. 이들 다섯 가지 들국화만 구분할 수 있어도 올 가을 산과 들을 다닐때 느낌이 전과 다를 것이다.


벌개미취, 쑥부쟁이, 구절초는 비슷하게 생겼다. 필자도 처음 꽃에 관심을 가졌을 때 이 셋을 구분하는 데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상당한 시간도 걸렸다. 이 세 가지를 잘 구분하면 야생화 초보 딱지를 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연보라색 들국화는 벌개미취다. 벌개미취는 빠르면 7월 말부터 초가을까지 피기 때문에 ‘가을의 전령’이라 할 수 있다. 벌개미취는 원래 산에 사는 야생화였다. 그러나 요즘은 산보다 도심 화단이나 도로가에서 더 흔히 볼 수 있다. 연보랏빛 꽃이 크고 풍성한 데다 자생력도 강하고, 이 나라 특산종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한 번 심으면 뿌리가 퍼지면서 군락을 이루어 따로 관리가 필요 없는 점도 장점이다. 개화 기간도 7월부터 10월쯤까지로 길다.


다 자라면 키가 50~80㎝ 정도다. 진한 녹색 잎 사이에서 줄기와 가지 끝에 한 송이씩 피는 꽃이 시원하다. 벌개미취는 한두 포기가 아닌 군락으로 피어야 제 맛이다. 우리나라 특산종이라 영어 이름은 코리안 데이지(Korean Daisy)다. 햇빛이 드는 벌판에서 잘 자란다고 벌개미취라 부른다.



쑥부쟁이는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꽃이다. 연보라색 꽃잎에 중앙부는 노란색이라 벌개미취와 비슷하게 생겼다. 벌개미취와 쑥부쟁이는 꽃만 보고는 구분하기 힘들고, 잎을 봐야 알 수 있다. 벌개미취는 잎이 길고 잎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어 거의 매끄럽게 보이지만, 쑥부쟁이는 대체로 작은 잎에 굵은 톱니를 갖고 있다. 가을에 꽃이 필 때 줄기가 쓰러지면서 어지럽게 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들국화에 비해 좀 황량한 느낌을 준다. 흔히 보는 쑥부쟁이는 대부분 정식 이름이 개쑥부쟁이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는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를 허무와 싸우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낸 장편이다. 1597년(선조 30년) 4월 이순신이 모함을 받은 끝에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다음해 11월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사하기까지 과정을 담았다. 소설은 이순신이 서울에서 풀려나 남해로 내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중략) 나는 장독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한 달 만에 순천 권율 도원수부에 당도했다. 내 백의종군의 시작이었다. (중략) 이따금씩 쑥부쟁이 덩굴 밑에 엎드린 유령들이 내 말방울 소리에 놀라 머리를 내밀 때, 퀭한 두 눈에서 눈빛이 빛났다.


그런데 꽃에 대한 묘사에 좀 오류가 있다. 쑥부쟁이는 초가을부터 피는 꽃이다. 꽃이 피지 않았어도 4월에는(음력이든 양력이든) 덤불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을만큼 자라지않는다. 문학에서 나오는 약간의 오류는 문학적 표현으로 간주하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반면 소설 중간쯤에 다시 나오는 쑥부쟁이에 대한 묘사는 계절을 제대로 탔다.


계사년에 임금은 환도했다. 정월에 의주를 떠난 임금의 가마는 그해 10월 서울에 닿았다. 무악재를 넘자 모화관에서부터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불타버린 대궐과 관청 자리에 쑥부쟁이가 뒤엉켰고 갓 죽은 송장들이 불 탄 대궐 앞까지 가득 널렸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 쑥부쟁이는 장기간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그리는 데 쓰이고 있다. 쑥부쟁이라는 꽃이름은 ‘쑥을 캐러 다니는 대장장이(불쟁이)의 딸’에 관한 꽃이야기에서 유래했다.


구절초는 9월 9일(음력)이면 줄기가 9마디가 된다고 해서 구절초(九節草)라 부른다. 흰색이 많지만, 연분홍색을 띠는 것도 적지 않다. 구절초는 꽃잎 색깔이 달라 벌개미취, 쑥부쟁이와는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또 구절초는 잎이 벌개미취, 쑥부쟁이와 달리 쑥처럼 갈라져 있어서 상대적으로 구별하기가 쉽다.



초보자들은 그래도 헷갈릴 것이다. 옛날 서울역 고가에 조성해놓은 공중 수목원 ‘서울로 7017’에 가보면 형제 식물들을 나란히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식물들을 과(科)이름 가나다순으로 배열해놓고 이름표를 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국화과 코너에 벌개미취·쑥부쟁이·구절초를 나란히 심어놓았으니 한번 가보면 세 가지의 잎과 꽃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해국(海菊)과 개미취도 벌개미취·쑥부쟁이·구절초와 비슷하게 생겼다. 바닷가에서 흔히 자라는 해국은 꽃 자체는 벌개미취·쑥부쟁이와 비슷하지만 잎이 연두색인데다 털이 많고, 개미취는 높이 1.5~2m까지 자라는 키다리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9~10월 등산을 하다보면 산기슭에 작은 노란 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도권일 경우 이 꽃은 산국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산 구기동 코스 입구에도, 우면산 곳곳에도 흔히 피어 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40여 년 살았던 서울 남현동 ‘봉산산방’ 마당에 핀 노란 꽃도 산국이다. 산국이 핀 곳 근처에 가면 특유의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밀려든다.




산국보다 조금 큰 노란 꽃이 감국이다. 산국과 감국을 구분하는 기준은 꽃의 크기다. 작은 노란 꽃이면 산국, 좀 큰 노란색이면 감국인데, 기준점은 지름 2㎝다. 꽃이 2㎝보다 작으면 산국, 크면 감국이다. 산국은 50원 짜리, 감국은 100원 짜리 동전 크기 정도로 기억하면 좋다. 산국(山菊)은 산에 피는 국화라는 뜻이고, 감국(甘菊)은 꽃잎에 단 맛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특히 감국은 꽃을 따서 말리면 국화의 맛과 향을 맛볼 수 있는 국화차로 만들 수 있다.


이제 가장 흔한 5대 들국화를 구분하는 법을 알았으니 들국화를 만나면 가까이 다가가 이름 맞추기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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