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선생! 주선생! 큰일 났어! 정윤이가 다쳤대!”
몇 년 전, 여름방학을 일주일 앞둔 어느 오후, 옆 반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성적입력을 마무리하던 나는 정신없이 두드리던 컴퓨터 자판에서 손을 떼고 벌떡 일어섰다.
‘정윤이가 또 뭔가 일을 냈구나. 할머니랑 같이 하교시켰는데 언제 또 학교에 온 거지?
걱정스러운 마음과 지쳐가는 마음이 뒤섞인 채 복도로 뛰어나갔다.
“정윤이 보건실에 있나요?”
“아니, 아니, 지금 뒷마당에 쓰러져있어,”
“네? 쓰러지다니요?”
“일단 와봐. 와서 봐.”
내가 목격한 것은 살아오면서 봤던 그 어떤 장면보다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둥그렇게 가지치기가 된 학교 뒷마당 조경수 사이에 쓰러져 있던 아이…. 아이의 두 종아리는 모두 두 동강이가 난 채 다리뼈가 밖으로 튀어나와있었고 이마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이는 여리고 작은 목소리로 “아파,아파.”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꿈 일거야! 꿈 일거야! 꿈이어야만해. 정윤이가 왜 저기서 저렇게 누워있는 거야.’
드라마에서 혹은 영화에서 나오던 대사를 내 맘속으로 외치고 있던 그 순간 119응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상태로 정윤이를 태운 응급차에 올라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아이는 3층 화장실에서 라디에이터를 밟고 올라서서 창밖으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정윤이는 자폐와 지체장애가 중복된 발달장애1급 판정을 받은 특수아다. 충동성이 매우 강한 정신연령 4세의 아이.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을 구별하지 못하고 기분에 따라 언제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하고 마음껏 소리도 지르던 아이. 급식차가 오면 너무도 신이나 반찬통에 두 손을 담그고 주물러버리는 아이. 공개수업이 있는 날에도 굴하지 않고 칠판 앞까지 나와서 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소리를 지르던 그 아이.
우리 학교에 입학할 당시, 정윤이는 장애가 심해 일반학교보다는 특수학교를 권했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가까운 일반학교에 아이를 보내기를 원했고 우리는 그렇게 A초등학교 1학년2반에서 선생님과 제자로 만나게 됐다.
“정윤이는 조금 천천히 자라는 나무란다.”
“우리 오늘도 정윤이에게 사랑의 거름을 듬뿍 줘요.”
“새끼손가락 손에 걸고 꼭꼭 약속해!”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은 아침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그렇게 우리들의 약속노래를 부르며 정윤이와 함께하기 위한 통합학급을 만들어가던 차였다. 다행히 마음 빛깔이 고운 우리 반 아이들은 서로 수호천사를 자청하며 정윤이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가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울어댈 때는 “정윤이 착하지? 정윤아, 울지마”라며 토닥여주기도 했다. 물론 그러다가 정윤이에게 등짝이나 뒤통수를 맞고 쌍나팔을 불어대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정윤이의 상황을 오히려 어른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배려해주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기특하고 뿌듯했다. 3월 초에 걱정했던 것보다 우리 반 아이들은 정윤이와 함께 잘 어울려주었고 더구나 이제 곧 여름방학이 다가오니 정신적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날도 정윤이는 배꼽인사를 예쁘게 하고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하교를 했다.
“누가 그랬니? 왜 다쳤어?”
“내가.”
“어디서 어떻게 그런거야?”
“내가, 내가 그랬어. 뛰었어.”
“왜 그랬어?”
“그냥, 그냥 날을라고.”
응급실 간호사의 물음에 아이는 “그냥, 그냥 날을라고”라고 말했다. 워낙 심각한 사고인지라 형사들도 와서 아이의 사고경위에 대한 조사를 했다. 다행히 아이의 의식이 또렷해서 사고에 대한 경위는 명백했다. 정윤이 할머니는 아이가 뇌에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없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다행히도 3층에서 떨어졌어도 쇼크사를 당하지 않았고, 살려달라고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고, 그 덕분에 살았다고 했다. 아픈 감각이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정윤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갔고 아버지도 일 때문에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부터 할머니가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학부모에게 전해들은 얘기에 의하면 정윤이는 입학하기 전부터 집에 있기보다는 주로 동네를 배회하곤 했는데 이를 본 동네 아주머니들이 데려다 밥을 먹이곤 했다고 한다. 연로한 할머니 혼자서 이렇게도 에너지가 넘치고 활동량이 많은 아이를 감당하기엔 참으로 벅찼을 것이다.
“학교에 입학하기만 기다렸어요. 그냥 혼자 보내주세요. 이렇게 열심히 돌봤는데도 무슨 일이 생기면 지 팔자지요”라며 아이 혼자 보내라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꼭 등하교시에는 할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에 오고 갈 수 있도록 했다. 할머니를 매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학교생활이나 가정생활 등 아이에 대한 상담과 도움이 될 수 있는 복지관 프로그램이나 혜택 등을 안내하는 것도 한결 수월했다.
주말 아침, 경찰서에서 아이가 길을 잃었다는 연락이 오면 나는 나들이 계획도 취소하고 달려갔다. 학급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싶어서 다양한 인성지도 활동을 학급교육과정에 투입하고 안전사고를 걱정하며 한 순간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도…. 결국 사고는 벌어지고 말았다. 정말 아이는 그냥 날고 싶었던 것일까?
“아유, 우리 정윤이 잘 그리네, 꽃도 그려볼래?”
“이쁘지? 이쁘지?”
“응 진짜, 이쁘네, 우리 정윤이 닮은 꽃이네.”
“이건 선생님 꽃이야.”
그 해 여름방학은 정윤이를 보러 이틀에 한 번은 꼭 병원에 들렀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지고 가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색종이로 배를 접어보기도 하며 잠깐씩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엄마도 없이 할머니와 덩그러니 병실에 누워있을 정윤이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려왔다. 담임인 나뿐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들 모두가 정윤이의 사고 소식에 안타까워했고, 정윤이를 몰랐던 선생님들도 아이의 사정을 듣고는 병문안을 오셔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가셨다. 특히, 종이접기를 잘 하셨던 4학년 김복순 선생님은 병원에 들러 정윤이에게 종이접기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다. 학교에서는 아이의 딱한 사정을 알고 선생님들과 교직원들이 아이를 돕기 위한 성금을 모금해 전달했고 학교안전공제회에도 아이의 치료비를 신청했다. 2학기가 시작되어서는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따라올 수 없는 정윤이를 위해 수업자료를 찾아 전달해 주고 병원에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여름방학과 2학기가 지나고, 3차례의 수술을 마친 정윤이는 마침내 씩씩하게 학교로 돌아왔다.
‘병원에는 학교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하면 보호자들에게 브로커들이 붙을 것이다.’
‘학교나 교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더라.’
아이의 건강과 회복을 걱정하는 순간에 내 귀에 들려오던 우려의 목소리들은 내가 진정한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만을 걱정할 수 없게 했다. 고백하건데, 나는 정윤이가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던 시기에 오롯이 정윤이의 회복만을 기원하지 못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걱정과 정말 내가 학부모에게 소송을 당하는 교사가 되지 않을까하는 근심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이 들곤 할 때마다 진심을 다하면 통할 거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달라지는 정윤이 할머니의 말씀이나 주변의 염려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불안함에는 신경 쓰지 않고 정윤이만을 보기로 했다. 진심은 통했고 아이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의사들도 아이의 빠른 회복속도에 놀랐다고 했다. 특히,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정윤이의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고 한다. 이듬해에 정윤이는 특수학교가 있는 근처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정윤이는 아직도 가끔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한다. 여전히 에너지가 충만한 목소리로….
“선생님, 나 정윤이, 나 인제 잘 달려, 막 달려.”
“나 오늘은 빵 만들기 했어. 선생님도 줄래.”
이런 정윤이의 목소리야말로 아마도 천사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래, 건강해줘서 고맙고, 기운차서 고맙고, 전화해줘서 고맙고, 모든 것이 고맙구나. 정윤이 덕분에 선생님도 이제는 좀 더 강하고 단단하고 커다란 마음그릇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오로지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를 생각하고 품어 안을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이 되어볼게. 고맙구나. 천천히 자라는 나의 나무, 예쁜 정윤이 나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