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퇴근길에 한동안 연락이 없던 제자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 요리를 전공하는 녀석인데 내게 오이소박이를 해 준다고 약속한 것을 못 지키고 있던 터였다. 그걸 빌미로 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이소박이 안 해오면 안 만나준다고 했었는데 수화기 속 목소리가 겨울날 호빵처럼 따뜻하다.
“선생님 전화 오랜만이죠? 변명 같지만 저 바빴어요. 얼마 전에 취업하려고 한 군데 원서를 썼는데 거기 붙었어요. 합격 사실 알고 엄마 아빠 다음으로 처음 전화 드리는 거예요, 기분 좋으시죠?”
녀석은 초임 학교에서 3학년 담임으로 만났던 아이다. 원서를 쓰기 전부터 요리를 하고 싶어 꼭 가고 싶은 학교가 있던 아이였다. 그러나 성적이 썩 좋진 않아서 학년 말 우리 반에서 요리 전공을 원하는 아이 둘이 같은 학교를 썼는데 한 녀석은 붙고 그 녀석은 떨어졌다. 담임으로서 같은 반에서 합격한 녀석에게 드러나게 칭찬을 할 수도 없고 떨어진 녀석이 코가 빠진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참으로 마음 에린 나날이었다.
기운 빠져 있던 아이의 마음을 다잡아 주기 위해 조리사 필기시험은 학력과 상관없으니 학년 말 기간에 해보면 어떠냐고 권했을 때 아이는 다행히 새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그 녀석이 제법 먼 길을 돌아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게 됐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우리 반에서 38명 중 30등이었던 이 녀석이 작년도 8명 신입사원 모집에 1만6000명이 지원한 곳에 합격했다니 직접 듣고도 신기하고 기특한 일이다.
고교 지원 당시 실망한 자기 마음을 잡아 주어서 고마웠다는 녀석. 사실 내가 고맙단다. 인생은 살아봐야 하고 너희들은 정성껏 키워봐야 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어서. 이제 조만간 네 요리를 맛 볼 날이 있겠구나. 기다리고 있어도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