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행정업무에 자존감 상실
학부모 무고 더해져 무력감도
교사 개인문제 치부해선 안돼
업무 감축, 교권보호법 정비
현장 교사들은 교권침해, 과도한 행정업무 등으로 ‘소진’을 겪고 있고, 이 때문에 학생 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해 "개인, 학교 차원이 아닌 정부, 교육당국의 지원과 법·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교원교육학회는 18일 서울시교육청 강당에서 ‘교사 소진에 대한 진단과 과제’를 주제로 연차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토론에 나선 교사들은 ‘과도한 단순 행정업무’를 소진 원인 1순위로 꼽았다.
남호순 세종 보람초 교사는 "수십명의 방과후 강사 채용, 수당 관리, 학생 수업료 처리에 학교 CCTV 관리 등이 과연 교사 업무인지 직무분석이 선행돼야 하고 행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게다가 학부모 문의, 민원 대응까지 감당해야 한다"며 "교사는 더 나은 수업 준비를 위해 잠을 줄여야 하느냐"고 토로했다.
권재원 서울 성원중 교사는 "수치상으로 중등 교사들은 하루 여덟 시간 중 4~5시간 수업을 하고 3~4시간, 즉 40% 정도를 수업준비 등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개발원 연구에 따르면 실제 교사들은 15%도 채 쓰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 시간 대부분을 공문 등 행정업무에 쓰기 때문이며 결국 밤, 주말에 수업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학부모 등에 의한 교권침해도 심각한 원인으로 지적됐다.
권 교사는 "이른바 교육수요자론이 도입되면서 관공서에서 문제가 된 악성 민원이 학부모에 의해 학교에서 재연되고 있다"며 "단 한명의 학부모, 단 한번의 욕설, 행패만으로도 교사의 심신이 무너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 교사는 "2박3일 수련회 일정이 길다며 교장 면담을 요구하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은 학부모, 체험학습 사진에 우리 애 표정이 안 좋다며 밤과 주말에 전화하는 학부모 등도 있었다"며 "교사를 불신하는 학부모들 때문에 소진이 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미정 서울세륜초 병설유치원 교사도 "유아교사 특성상 수업시간, 휴식시간, 점심시간에도 눈을 뗄 수 없는 고충이 있다. 그럼에도 편식을 지도하고, 잘못된 행동에 목소리를 조금만 높여도 학부모들은 민원을 제기한다"며 "권한은 없어지고 규제와 책임만 커지면서 지치게 된다"고 했다.
대책에 대해 남 교사는 실효성 있는 교권보호 법, 정책 마련을 주문했다. 그는 "수업방해, 민원제기 등 사건이 생길 때, 대부분 교사 개인이 처리하거나 별 조치 없이 마무리되는 것은 문제"라며 "교사가 원스톱으로 도움을 받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구체적인 교권보호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또 비밀 보장의 심리측정 온라인 시스템과 치유기관 연계서비스도 요구했다.
권 교사는 "바람직하든 아니든 체벌, 상벌점 등 교사 권한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교원평가, 성과급제 등 높아지는 책무성은 이미 교사 소진을 예고한 것"이라며 "교사의 정당한 권한과 보상을 확대하고 직무 자원을 늘리거나 직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사후적 지원보다 예방 차원에서 법·제도를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강 교사는 "유치원의 행정업무를 지원해 주는 교무행정지원사를 반드시 배치해 학생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성진 제주한라병원 의사는 "열정을 잃은 교사는 ‘매뉴얼 티처’(최소한의 가이드를 따르면서 꼭 해야 할 일만 하는 교사)를 선택하기도 한다"며 "교사도 치유와 돌봄이 필요하며, 교사의 행복이 학생들의 성취와 발전의 동력이 된다는 사회적 인식과 존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한 연구팀이 초등생 400명의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 수준을 검사한 결과, 교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감정 소진을 많이 경험한 학급일수록 학생들의 코르티솔 수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코르티솔 수치가 높으면 학습과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책임자인 에바 오베르레 박사는 "학급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스트레스 전염 현상이 발생하며, 악순환을 가져온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