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로 돌아보는 교단 50년] 작은 꿈이 꽃 필 때 1

2017.12.06 09:03:17

산골마을에 살지만 농토도 없이 가난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서울로 떠나기로 하는데

1. 농삿군 아이들
 
1987년 5월말쯤의 날씨는 유난히도 무덥고 몇 달 째 계속되는 가뭄에 마을 앞의 개울물이 말라붙어서 실낫 같은 물줄기를 붙잡기 위해서 여기저기 냇바닥을 파고 양수기를 쓰기도 하고 두레박으로 퍼서 물을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못자리의 모가 자라서 모내기를 하여야 할 때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바짝 마른 논바닥에 모를 낼 수가 없어서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비가 오기를 바라는 비타령만 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못자리에 물주기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냇물에서 못자리까지 100 m도 넘는 긴 줄을 두 줄 세우고 한 줄은 물을 담은 그릇이 가는 길이고, 다른 한 줄은 빈 그릇이 냇가로 가는 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이 귀한 물을 한 방울이라도 더 많이 못자리까지 가져 갈 수 있도록 조심조심 물그릇을 손에서 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논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도 바가지에 담겨 오는 물을 뒤집어쓰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목이 타도 마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시간쯤이나 작업을 하면 겨우 스무 평 남짓한 못자리에 물을 한 번 뿌려주는 정도였지만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이나마 서로 해달라고 야단이 나서 우선 가장 많이 타들어 가는 못자리부터 하기로 하고, 일손이 없는 집의 못자리부터 물을 뿌려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며칠째 이렇게 물을 퍼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이제 얼굴을 새까맣게 그을러 있었습니다.
더위에 지치고 목이 타들어 가는 것을 참으면서 그래도 열심히 일을 하는 아이들은 이게 모두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 조심해 ! 애써 퍼 올린 물이 다 엎질러지지 않아 !”
여자들의 앙칼진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남자아이들이었습니다.
“에이, 더워 못살겠네.”
“넌 저렇게 타들어 가는 모들은 얼마나 목이 타고 더위에 지쳤을까 생각을 해 봤니 ?”
이런 핀잔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힘 드는 작업을 하던 아이들은 이제 익어 가는 보리를 베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농촌 일손 돕기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령은 아이들에게 낫을 들려서 보리 베는 일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보리 한 마지기(여기 산골에서 300평)을 베면 삯으로 2,00원씩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른들의 품삯의 1/4이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인댁에서 새참으로 간단한 음식을 주기도 하고 시원한 음료수를 사다가 주는 집도 있었습니다. 영국이네 반의 아이들은
모두 76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아이들이 한번 논바닥에 들어 갔다하면,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이 순식간에 보리밭은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농삿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요즘의 아이들과는 달리 이 무렵의 아이들은 일을 여간 잘 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 반이 하루(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어떤 날은 어두워지기까지 일을 한 적도 있었음)에 7,000 여 평을 베기도 했습니다.
“자 ! 이제부터 이 논의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데, 너무 서두르지 말고 손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잘 베도록 합니다. 한 두둑씩 맡아서 베어 가고 옆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쪽 논두렁에 먼저 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어도 좋고 잠시 쉬어도 좋습니다.”
날마다 작업을 시작 할 때는 주문처럼 외우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벌써 저만치 베어 나가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옆의 친구와 내기를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자 ! 저기 논둑까지 누가 빨리 베어 가는지 시합이다. 시이 작 !”
아이들은 그 일이 힘들고 지겨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돈은 모아서 올 가을에는 수학여행을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까, 조금만 애를 쓰면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도 여행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약속이 아이들에게 이 일이 한층 더 신나는 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4,5,6학년의 아이들이 들판을 휘젓고 다니니까 불과 일주일 만에 그 넓은 들판(이 무렵엔 거의 모든 논에 보리를 심었음)이 보리 베기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따뜻한 남쪽, 지도에서는 금방 바다가 보일 듯한 고장인 이곳은 남쪽을 가로막은 존재산(해발 600 여m)이 있어서 이 고장에 들어서면 강원도 산골을 생각케 하리만치 깊은 산간 마을입니다. 빙 둘러선 산들이 오직 북쪽으로 빠끔히 문을 열어 시냇물이 흘러 나가고 있을 뿐 백록담이나 천지 같은 연못으로 보일 만큼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대접처럼 생긴 고장입니다. 이 고장의 들판이란 오직 이 산에서 시내까지 이어지는 밋밋한 산기슭을 일구어 놓은 산비탈의 밭과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논이 전부일 뿐이었습니다. 불과 20여 년 전에 있었던 6,25의 전쟁 중에는 이 고장은 가장 늦게까지 빨치산의 깃발아래서 온갖 고생을 다하던 그런 고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들(감남골,갓바위,버드내,새끼미,한골,배골)은 모두 소개령(공산당이 발붙일 곳을 없애기 위해 마을을 없애라는 명령)으로 모두 불타고 오직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기빠리 만이 겨우 옛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고장의 복판쯤에 자리 잡은 작은 학교는 아담한 모습과도 같이 아이들이 오순도순 모여들어 꿈을 키워가고 있는 곳입니다. 이 학교에 5학년 교실은 유난히 떠들썩한 소리로 조용한 학교에서 가장 활발한 공부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담에 큰 농장을 가진 부자가 되고 싶어요.”
학급에서 가장 가난해서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전영국이의 이 말은 학급아이들에게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가장 잘 사는 사람이 바로 땅(농토)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국이네는 아버지가 남의 밤나무 밭을 관리 해주고, 그 댓가로 밤나무 밭에 딸린 밭을 일구어 겨우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봄이면 산나물을 뜯어서 나물죽을 끓여 먹고, 틈이 나는 대로 말려서 일년 내내 두고두고 식량을 아끼는 귀중한 먹거리로 쓰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오면 밤나무 밭에 많은 지네를 잡아서 수입을 올렸고, 산과 냇가에 흔한 뱀을 잡아서 뱀술을 담그는 것도 이 집에서는 큰 돈벌이가 되고 있었습니다. 가을이 오면 산과 들에서 딴 산열매(머루, 다래, 금정)들을 따 모아 술을 담그기도 하고 내다 팔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가난에 찌들은 영국이네의 살림을 보태기 위해서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큰누나는 서울의 한 제약회사에서 제법 월급을 받아서 집으로 부쳐 주어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돕고 있었습니다. 올해 졸업한 누나는 그런 큰누나의 덕택에 중학교에 가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졸업을 하게 될는지 걱정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영국이는 졸업을 하면 큰누나가 있는 서울로 올라갈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을 모르는 친구가 하나도 없으니 영국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난한 것이 영국이네 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고장의 대부분의 아이들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굶은 학생이 반도 넘은 이 고장에서 가장 반가운 것이 학교에서 급식소를 차려서 아이들에게 점심을 굶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점심시간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고, 어떤 아이는 점심을 얻어먹는 단 한 가지 재미에 학교를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다닐 정도였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동차 운전사가 될 거야. 차도 실컷 타보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으냐 ?”
승일의 말에 아이들은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승일이는 이런 아이들의 하는 짓에 무안하고 겸연쩍어 뒷통수를 긁적이며 얼굴이 붉어져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이들은 제 생각을 스스로 잘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차례로 시켜서야 겨우 말들을 하면서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지 않을 것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난 장차 간호원이 되겠어요.”
“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난 군인이 될 거예요.”
“나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채소 농사로 부자가 되겠어요.”
학급에서 가장 공부를 잘 못해서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 경태의 말에 입바른 명진이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누군 군인이 안 되냐 ? 다 군인에는 갔다 와야 하는디?”
이 말에 또 한번 까르르 웃음이 터졌습니다. 선생님이 가로막으며
“아니지, 그냥 군인이 아닌 계급이 높은 군인, 진짜 나라를 위해 몸 바칠 수 있는 훌륭한 군인이 되겠다는 게 뭐가 잘못 된 것은 아니지!”
그 말씀에 아이들은 웃음을 그치고 조용해졌습니다.
이렇게 꿈이 많던 아이들은 제각기 할 일을 일찌감치 결정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2.꿈을 안고 떠난 길
 
이런 속에서 이 고장의 여름은 서서히 무더위를 몰아오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더운 이 고장의 기후는 아마도 대구와 비슷한 지형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고장은 누가 보아도 완전한 분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딜 보아도 산이 아닌 곳이 없는 산 속의 마을 그곳은 유난히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게 했습니다. 더구나 가뭄이 계속 되자 날씨는 더욱 사람을 들볶아대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도 시내에 나가 멱을 감을 곳도 없어진 이곳의 아이들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날마다 TV 에서는 동해안의 피서인파가 몇 십만이 모였으며, 서해안의 어느 해수욕장은 어떤지를 비춰주고 있었지만, 이곳의 어린이들은 말라붙은 시냇가에서 미꾸라지나 송사리 같은 물고기를 잡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말라붙은 시내의 바닥은 여기저기 파서 물줄기를 끌어다가 퍼 올리느라고 냇바닥마저 제대로 있는 곳이 없을 지경이니까 어디 물장구 한 번 쳐 볼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온 들판은 목이 타서 여기저기서 바지작 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만 했습니다. 갈수록 산의 나무들마저도 시들해 가는 듯 색깔이 달라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지쳐서 이마의 땀방울도 말라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날마다 쳐다보는 하늘은 이제 어쩌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잔뜩 찌프리기도 하고, 날마다 구름이 덩실거리고 가끔은 먹장구름이 몰려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옛말에 7년 가뭄에 비가 안 오는 날이 없다 는 말과 같이 거의 날마다 빗방울은 금방 쏟아 부을 듯하다가 땡볕으로 바뀌어버리곤 하였습니다. 이제 모내기를 해야 할 때가 너무 늦어져서 벌써 못자리에서 벼가 웃자라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못자리에서는 벼가 패었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옵니다. 결국 사람들은 모내기를 하는 게 아니라, 모심기를 시작했습니다. 말라붙은 논바닥에 간신히 물을 퍼 끼얹은 다음에 물이 젖은 논바닥에 호미로 모를 한 포기씩 심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업을 하다보니 하루 종일 하는 일이란 게 보통 모내기의 십분의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땡볕으로 이글거리는 땅에서 내뿜는 열기는 모내기를 하는 사람들의 숨통을 틀어막을 듯이 확확 끼얹어서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6월이 다 가고 7월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도 못자리에는 수많은 모들이 시집(모내기)도 못 가고 벌써 이른 벼들은 이삭을 내 놓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름이 점점 다가오는 동안에도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마음은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하였습니다. 이제 몇몇 집에서는 이런 속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퍼져 나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 갓바위에 사는 진이 아버지는 이웃마을에 살던 친구들이 서울에서 살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면서, 이제 이렇게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더 이상 있어 보아야 견딜 수가 없다는 쪽으로 마음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장연이 보게
날씨가 가물어서 날마다 타들어 가는 들판의 사진을 보면서 걱정이 앞서네. 며칠 전에 그곳의 친구에게 들으니, 한골의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어서 사람들이 물고기를 가마니로 잡았다는 얘기를 들었네. 얼마나 들 고생이 심한지 정말 걱정이라네. 난 이곳에서 비록 딱 잡아 뭐라고 할만한 직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오라는 곳은 많아서 벌어먹고 살기는 별 걱정이 없다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곳에서 살 때보다는 편하면서 걱정도 훨씬 없는 것 같다네. 자네도 어지간하면 집안을 정리하여서 이곳으로 올라오게, 어떻게든지 내가 자네가 오면 일할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네. 무엇을 하던지 할 일은 많아서 놀 시간은 없으니까 걱정을 하지 말고 올라오게. 아이들의 교육문제도 그렇고...... 잘 생각을 해보시기 바라네. 이곳 서울은 날씨가 가물던지 비가 오던지 그게 별 걱정거리가 안 되는 곳은 이곳인 것 같다네. 소식 주길 바라네. 친구 영식이 쓰네.
이런 편지를 받은 진이 아버지는 곧장 답장을 보냈습니다.
편지 잘 받았네. 나의 장래를 생각해주는 자네에게 감사드리네. 사실은 이곳의 생활이 말이 아니라네. 날마다 말라 가는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피가 말라 가는 듯하다네. 자네 말대로 난 이곳에서 어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네. 어디든지 내가 가면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좀 알아보아 주게. 자네의 편지가 오면 당장이라도 올라가겠네. 식구들은 내가 자리를 잡은 다음에 차차로 올라가기로 하고 말이네. 꼭 소식 주기 바라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올라가고 싶지만 아직 자신이 없어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네. 소식 기다리겠네. 친구 장연이가
이런 편지가 오고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식구들은 날마다 한숨소리만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버지는 벌써 서울로 떠나갈 준비를 차근차근 해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준비를 하고 있던 진이네의 이야기는 결국 영식씨의 편지로 온 동네에 알려지고 말았다.
“아니 진이네는 서울로 떠나기로 했다면서 ? 잘했다. 어쩜 그렇게........”
“난 잘 몰라요. 애 아버지가 혼자 생각으로 준비를 했던 모양인데 이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타관에 가서 어떻게 벌어먹을 수나 있을는지 걱정 뿐이지라우.”
“아무러면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 벌써 서로 연락들을 했다면 가서 일 할 자리를 알아보고 가겠다고 한 거 아니겠어 ?”
“글쎄요 ?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오만 아직은 그런 것도 없이 무작정 가겠다고 나선 거 아닌가 몰라요.”
이렇게 온 동네 사람들은 진이네의 이사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잘 생각을 하였다고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진이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우선 아직까지 읍내를 벗어나 보지 못했던 진이어머니의 걱정은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시집을 와서도 석삼년은 친정집이 그리워서 잠을 못 이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암뜬 성격이어서 첫째 걱정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눈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속담은 옛말이고 이제는 「눈뜨고 있어도 홀랑 당 한다」는 험한 곳이 서울이라지 않은가 ? 이렇게 서울에 가는 것을 겁먹고 있는 진이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고 차분히 준비나 해요. 나도 이 자식들을 굶길 것 같으면 가겠다는 생각을 했겠오. 영식이가 내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께 걱정은 마시오,”
하고 안심을 시키시는 아버지도 속으로는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6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몇 장의 편지가 왔으나 아버지는 아직도 어두운 낯빛으로 편지를 힘없이 치우곤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는 진이의 마음은 조마조마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일터가 잘 되어서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도 이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서운하고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이제 진이네 반의 아이들까지 모두 진이가 서울로 떠나간다는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이와 별로 친하지 않던 아이들까지도 며칠 남지 않은 동안이라도 진이에게 잘해주겠다는 생각으로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주고 무엇인가를 진이에게 주려고 들 하였습니다. 이런 친구들의 마음 씀씀이가 더욱 진이를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진이는 이젠 정말 이곳을 떠나기가 싫어서 차라리 아버지의 일터가 마련되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친한 친구 경란이와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거의 날마다 붙어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진이는 경란이와 헤어질 것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그래서 경란이와 함께 산에 올라서 이 고장을 눈 속에 몽땅 넣어 가지고 가려는 듯이 구석구석을 살피기도 하고, 경란이네 집에 가서 늦도록 둘이서 함께 숙제도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7월도 며칠이 지나서 이제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나서,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조용히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먼저 떠나야 하겠오. 여기서 아무리 힘들여 일을 해보았자 우리 식구들이 입에 풀칠하기도 힘이 드니 어떻게 더 버텨볼 힘이 없어졌오. 그래서 모레 아침에 우선 내가 먼저 올라가서 일터를 마련하고 방한간이라도 얻어 놓아야 이 식구들이 몸을 붙일 수 있지 않겠소. 그래서 내가 우선 자리를 잡아보고 식구들이 올라오도록 합시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올라갈 생각을 하셨어요. 미리 알려주어야 옷이라도 빨아서 준비를 할 게 아니겠어요?”
“되었오. 내가 뭐 호강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옷은 우선 입을 것 몇 벌이면 되겠지뭐 ?”
“타관에 가서 옷도 손수 빨아 입어야 할 텐데.....”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내가 옷이야 어떻게 못해 입겠소. 그래도 여기 보다는 힘이 덜 든다고 하니까 무슨 일을 하던지 살수 있는 길은 있겠지 싶소.”
이렇게 이야기하신 아버지는 이틀 후에 아침 일찍 집을 떠나셨습니다. 진이는 이제 정말 이곳을 떠나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니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운 듯 힘이 없습니다. 터덜터덜 힘없이 학교를 향하는 진이의 모습을 발견한 경란이는 줄달음을 쳐서 진이를 따라 잡았습니다. 경란이의 달음질치는 소리도 못 들은 채 맥없이 걷고 있는 진이를 경란이는 어깨를 툭 치면서
“진이야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
하고 물었습니다. 이 소리에 놀란 진이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면서
“아유 깜짝이야 ! 간 떨어지겠네.”
하고 웃었습니다. 둘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깔깔거리고 웃음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경란이는 벌써 진이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진이야, 무슨 일이 생겼구나? 무슨 일이니 ?”
“으응, 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서울로 떠나셨어. 어쩜 곧 우리도 이사를 가야할는지 몰라.......”
하며 울쌍을 지었습니다.
“얘, 넌 좋겠다. 이제 서울 가시나가 되겠구나?”
“뭐 ? 넌 내가 이사를 가는 것이 기다려지는가 보구나?”
“뭐라고 ? 내가 기다린다고 ? 너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하니 ?”
“아니. 난 지금 이사를 갈 것이 걱정인데 네가 그런 소릴 하니까 그러지 않아.”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학교에 가서도 진이는 하루 종일 기운이 없이 하루를 보냈습니다.

김선태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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