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 해가 저문다. 올 한 해를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가끔 문학이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지만 대체로 글과 말로만 세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한 해 동안의 이야기를 적을 수는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다. 더구나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쉽게 허락하지 않으니, 어떤 면에서는 내 마음도 알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이즈음은 12장 달력의 마지막 장에 해당된다. 마지막장을 떼어내면 우리는 비교적 긴 시간의 단위인 ‘해’를 바꾼다. 자연의 변화에 둔감한 도시 사람들에게 해가 바뀌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수 천, 수 만 년 동안 사람들은 매일 뜨고 지는 그 해의 움직임을 살펴 ‘1년’을 결정했다. 해가 뜨는 방향과 움직이는 궤적이 1년이란 시간을 주기로 반복하고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을 정리한 것이 바로 달력이다. 달력은 사람들에게 한 번 쉬어갈 때임을 알려준다. 이럴 때 비로소 삶의 의미도 되돌아볼 수 있다.
그런 시간을 일상 공간에서 찾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아무래도 조금 낯선, 일상을 떠난 곳에서 갖는 것이 조금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한 해의 끝이 곧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인 것처럼 길이 끝나는 곳에 새로운 길이 있다. 그런 뜻에서 겨울 바다는 어떨까. 바다를 보기 위해 육지의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면 바다의 길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의미가 깊다. 그런 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희망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바람이니 미래의 일이다. 그러니 길이 끝나는 곳에서 미래를 찾는 것이 되리라.
바다가 보이는 곳 가운데 유래가 깊은 곳이 있다. 바로 관음도량이다. 신라와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했다. 사람들은 거기서 희망을 찾았을 것 같다.
원래 관음보살(관세음보살)은 불교에서도 널리 믿는 보살이라서 <화엄경>을 비롯해 <법화경>, <아미타경>, <능엄경> 등에 나온다. 바다의 섬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름만 불러도 세상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관음이 나타났다는 곳이 세 곳인데 마치 우리나라 지형을 반영한 듯 동해, 남해, 서해에 하나씩 있다. 바다에서 일상을 벗어나 나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으며 또 해돋이나 해넘이가 있어 삶의 의미도 생각하기 좋은 곳이다.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동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곳이다. 그런 동해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낙산사가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낙산사는 여러 느낌을 준다. 강렬한 동해의 기운을 받는 곳도 있지만 아늑한 곳도 있다. ‘원통보전’은 아예 깊은 숲의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 낙산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바로 ‘의상대’다. 수십 길 절벽 위에 있는 정자로 관동8경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정자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절을 창건한 사람은 의상이다. 중국의 지엄 스님 아래에서 화엄경을 배워 해동화엄경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도반(道伴)인 원효와 겪은 해골물 사건으로 익숙하다.
그런 의상이 귀국한 뒤 관음을 만나기 위해 수행을 했던 장소가 낙산사, 그 중에서도 홍련암이었다. 처음 7일 동안 수행해서 동해 용왕을 만나고 다시 7일 동안 수행한 끝에 관음을 만났다고 한다. 이후 관음상을 만들고 절을 지은 것이 지금의 낙산사다. 원래 관음이 사는 바다의 산 이름이 ‘보타락가산’이다. 여기에서 ‘낙산’이란 이름을 빌어 ‘낙산사’가 됐다. 그런 까닭에 낙산사는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 중심에 있지 않고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이 큰 법당 노릇을 한다.(관음의 다른 이름이 ‘원통대사’다.) 낙산사를 상징하는 것도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해수관음상이기도 하다. 많은 이야기를 담은 낙산사, 이야기만큼이나 뜻도 깊다. 또 절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아름다움이 고민 많은 여행자를 품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남해의 금산 보리암
낙산사에는 의상의 신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런데 여기를 찾아왔던 원효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관음을 만나기 위해 낙산사로 가던 원효는 길을 가다 한 여인에게 물을 청했는데 빨래하던 물을 떠 줬다. 원효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냇물을 떠먹자 파랑새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 자리에는 신발 한 짝이 남아 있었다. 다시 길을 떠난 원효가 낙산사에 이르러 관음상 아래를 보니 아까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여기에도 있었다. 비로소 원효는 빨래하던 여인이 관음임을 알아챘다.
실망한 원효는 낙산사에 도착해 관음굴(홍련암)로 들어가려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관음을 만나지 못했다. 그 뒤 발길을 남쪽으로 돌려 기도를 올린 뒤 관음을 만날 수 있었다. 관음을 친견한 원효는 ‘보광사’란 절을 지었는데 절이 있는 산 이름도 나중에 이를 따라 ‘보광산’이 됐다. 보광사는 나중에 ‘보리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조 이성계는 보광산에서 왕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관음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자를 받았는데 그 덕에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산을 비단으로 감싸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산 이름에 비단 금(錦)을 써서 ‘금산’이라 부르도록 했다. 또 조선 왕실에서는 보리암을 원찰로 삼을 정도로 이 절을 귀하게 여겼다.
남해 금산은 하동에서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 섬 안으로 한참 가면 만날 수 있다. 681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의 형세나 아름다움은 금강산을 보는 것 같다. 동해 낙산사가 야트막한 능선에 있는 절을 따라 걷는다면 남해 보리암을 가기 위해서는 금산 정상 근처까지 올라가야 한다. 버스를 타고 능선까지 가는 방법도 있지만 상주 쪽에서 가면 영락없는 등산 코스다. 하지만 올라간다면, 그리고 혹시 일출을 볼 수 있다면 그 감동은 남다를 것이다. 남해 바다의 다도해가 점점이 펼쳐진 가운데 붉은 해가 떠오르는 장면은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더구나 남해 금산에는 쌍홍문을 비롯해 곳곳에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래서 절을 떠나기도 어렵거니와 산을 떠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다가올 새해를 마음에 담는 시간이 저절로 생기는 곳이다.
서해 낙가산 보문사
얼마 전까지 강화도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던 섬, 석모도. 최근에 다리가 놓이며 섬의 느낌이 사라졌다. 강화, 석모도 주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다리지만 이기심을 가진 여행자로서는 죄송스럽게도 아쉬움이 다가온다. 석모도에 도착해 10여 분을 차로 가면 제법 높은 산이 있다. 낙가산이다. 이곳에 보문사가 있다. 보문사의 내력은 다른 관음도량에 비해 뚜렷하지 않다. 선덕여왕 때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져 건저올린 22구의 석조불보살상을 동굴에 모신 것에서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던 중 고려 초, 금강산에서 관음을 친견한 회장대사가 보문사에 와 삼존불과 18나한(부처님의 제자)을 굴에 모시고 관음전을 지어 관음보살을 따로 모셨다고 한다. 이후 산과 절 이름을 낙가산 보문사로 부르도록 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음도량이 된 보문사. 절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석굴도 좋지만 절 뒤에 있는 거창한 절벽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다. 절벽을 따라 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눈썹바위 아래 석불좌상이 있다. 석불좌상의 웅장한 모습도 놀랍지만 거기서 바라보는 서해의 모습도 대단하다. 보문사는 서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해넘이가 좋다. 해돋이에 견줘 해가 지는 모습은 사뭇 장엄하다. 장엄함은 비장함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나약함을 버리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지는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