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로 돌아보는 교단 50년] 우리가 번 돈 이예요. 빼앗지 마세요. 1

2017.12.27 09:05:20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1인당 하루 300평의 보리베기를 하면서 농삿일을 돕는데.......

1977년의 봄은 유난히도 빨리 찾아 왔었다. 지난 겨울에도 별다른 추위가 없이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수북하게 쌓일 만큼 눈다운 눈이 내린 적도 없었다. 비가 내린 것도 아니어서 봄이 돼도 파란 싹들이 제대로 돋아나기나 할 것인지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겨우내 비가 내리지 않은 들판은 봄이 되자 얼었던 것이 녹으면서 온통 먼지만 풀썩거리는 사막과도 같았다. 벌써 물이 고이고 못자리를 할 준비를 해야 할 논바닥은 허옇게 메말라 있고, 쟁기질을 하는 논에서 뽀얗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논바닥이 요 모양일 때 밭에 심은 보리나 밀은 자라지 못해서 앙당하게 퍼지기만 하고 키가 자라지 못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전에 보리밭에 풀을 매고 북을 주어서 보리 뿌리를 튼튼하게 해주는 작업을 할 때에도 온통 먼지가 날려서 허옇게 흙먼지를 덮어써야만 했다.


하긴 그래서 논에 심은 보리는 다른 해 보다는 훨씬 더 좋은 편이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내리는 해에는 보리를 심은 논에 물기가 많아서 보리가 물손<물기가 많아 해를 입어 죽어 가는 일>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논이 바짝 말라서 밭처럼 고슬고슬하기 때문에 논에 심은 보리는 오히려 아주 잘 자라 주었다. 농부들은 이런 논보리에 정성을 쏟아서 보리 고랑을 쳐 올려서 보리 논 두둑에 뿌려주는 북주기에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논보리는 다른 해보다 훨씬 더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3월이 되고 4월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가 오겠지, 오겠지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못자리를 해야 할 때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정부에서도 걱정이 되어서 각 마을별로 공동 못자리를 만들라고 권하였다. 물대기가 편하고 물을 끌어 올 수 있는 곳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서 모를 기를 수 있게 한 곳에 못자리를 만들면 물이 부족하더라도 한 곳에만 대기 때문에 좀 더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양수기나 저수지, 댐이 지금처럼 물을 많이 끌어 올 수 있는 그런 형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이 시냇가에 집중적으로 공동 못자리를 만들었지만, 가뭄이 계속 되자 그것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5월도 중순이 되었건만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냇물도 말라서 흐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시내의 바닥을 파서 웅덩이를 만들고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 올려서 못자리의 모들이나마 말라비틀어지지 않게 지켜보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부에서는 이처럼 가뭄에 시달리는 농촌을 돕기 위해 어린이들까지 나서서 가뭄극복을 위해 노력 봉사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까지 들판에 나가서 못자리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시내 바닥에 고인 물을 세수 대야나 양동이로 길러다가 말라 비틀어져 가는 못자리에 뿌려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각자가 물을 떠서 가지고 가서 못자리에 뿌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앞의 아이들이 뿌리고 간 자리만 다시 뿌리기도 하고 좁은 논둑길을 오가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점차로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물을 퍼서 올려 보내면 이어받기를 해서 못자리에 가면 차례로 받아서 뿌려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일은 좀 더 효과적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논바닥에서는 먼지가 풀썩거리고 메마른 논바닥의 열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한 평의 못자리라도 더 살려 보자고 우리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물을 퍼 날랐고, 못자리는 조금씩 파랗게 생기를 되찾았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우리 못자리도 좀 해줘요하고 선생님을 졸랐다. 선생님들도 있는 힘을 다해서 해보자고는 하지만 어린 우리들은 땀이 비 오듯 흐르면서 먼지투성이가 돼갔다. 이렇게 애를 써서 물을 퍼 나르는 모습을 보고 차마 시킬 수가 없었던지 학교 옆의 일부만을 하고는 계속 할 수 없다고 다음으로 미루고 해서 하루 두 시간씩만 물대기 작업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동안에 이미 온 몸은 흙투성이가 되고 땀에 흠뻑 젖어서 옷까지 흙투성이가 되곤 했다.


어린 우리들까지 나서서 못자리 살리기를 하게 되자, 마을의 어른들도 더 이상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냇가를 파고 물을 퍼 올려서 못자리를 살리는 일에 힘을 쏟게 됐다. 점차 마른못자리가 없어지게 됐다. 그러나 못자리의 모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정도에서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학교에 우물을 파도록 교육청에서 지원이 나와서 학교 마당에 구멍을 뚫고 우물을 판 곳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우물물을 멀리에 있는 곳까지 끌어가서 못자리를 살리는 데 이용하니 학교 부근의 논들은 우선 갈증을 풀 수가 있었다.


이젠 이 들판에 모내기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온 들판을 가득 매운 보리를 베어 내어야만 모를 심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이제는 보리 베는 일이 급하게 됏다. 가뭄 극복에 힘을 쏟느라고 보리 베기를 할 손이 모자란 농촌의 일손을 돕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 무렵만 해도 농촌의 학교에서는 보리 베기나 모내기시기에 맞춰서 농번기 휴가라는 것을 하여 우리 같은 어린이들도 농촌의 바쁜 일손을 돕게 했었다. 그렇지만 올해 같은 때는 농번기 휴가가 문제가 아니라 가뭄 극복과 보리 베기, 모내기라는 일이 한꺼번에 해야 하는 농촌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하여 도와주라는 지시가 내려 졌다.


보리는 벼와 달리 나란히 베지 않아도 탈곡기에 그냥 쓸어 넣어서 털 수 있는 곡식이다. 우리들 같은 어린이들의 손으로 베어도 탈곡을 하는데 크게 불편하거나 어려움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어른들처럼 품삯을 다 받을 수는 없지만, 일부만 받고 일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한 푼도 안 받는 다면 너도나도 해 달라고 해서 어린이들이 다 해주지도 못하고 갈등만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쨌든 우리는 논의 보리를 베러 가야 했다. 처음에 나가서 보리를 베려니까 쉽지는 않았다. 물론 집에서 소먹일 풀을 베어 보기는 하였지만, 보리를 베어 보지 않았던 어린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처음엔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베는 요령을 가르쳐 주셨다. 몸을 다치지 않게 주의할 점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첫날 논에 나가서 조금씩 일을 익혔다. 어른들은 한 마지기(300)를 베는데 300원을 받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200원만을 받기로 돼 있었다. 우리는 첫날 약 3,000 평을 베었다. 물론 하루 종일이 아니고 오전 공부가 끝나고 나서 오후에만 하여서 많이 벨 수가 없었다. 하루에 우리가 번 돈이 2,000원이 되었다. 우리는 이튿날 아침에 학급회를 열어서 이 돈을 쓸 곳을 의논했다.


우리 이 돈을 모아서 가을 수학여행을 가면 어떻겠어요,”

반장인 경수의 의견은 우리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다.

선생님 우리가 수학여행을 가려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건대요?”

역시 계산에 밝은 영호의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갈 수학여행지에 따라 달라지고, 며칠 동안을 갈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우리 고장의 도시에 23일 정도로 간다면 약 3,000원 정도면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렇다면 우리들이 돈을 모아서 수학여행을 갔다 올 수 있게 열심히 보리 베기를 해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들이 모은 돈으로 수학여행을 가도록 하려면 우리 모두 열심히 보리 베기를 해야 한다고 다짐까지 했다. 그래서 의논을 마친 그 날부터 우리는 아침 시간만 공부를 하고 나서 낫을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첫날 우리가 3,000평을 베어서 2,000원을 벌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쓸 돈을 저축하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우리들을 장난을 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이유가 없어졌다. 혹시 누가 게으름을 피우면 우리 스스로가


! 명직이 넌 혼자만 편하길 바래? 누군 허리 안 아프고 힘 안 들겠어?”


하고 꾸짖으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서곤 하였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래도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말아라. 무엇보다 낫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들하고, 알았지?”

하고 우리들을 격려 해주시기도 하고, 선생님이 앞장을 서셔서 일을 해나가셨다.


아무리 우리가 잘해보려고 해도 선생님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보리논의 한 두둑씩을 맡아서 베어 나갔다. 자기 몫을 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끝나도록 좀 쉴 수도 있다. 그러나 일찍 끝난 남자아이들은 이런 일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여자아이들이 아직 저 만큼 베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쉬고만 있지 않았다. 가장 많이 남은 여자아이가 베어 오는 두둑을 중간에서 싹둑 잘라서 베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우리들이 힘껏 벤 덕분에 우리는 처음 시작한 다음날이자 우리가 보리 베기 삯으로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자고 결정을 한 첫날에는 논 7,200평을 베어서 하루에 4,800원을 벌었다. 일이 끝나고 오후 5시가 거의 되어서 선생님은 오늘 한일을 반성해보는 자리를 가졌다.


, 오늘 우리가 벤 보리논의 모습을 보아라. 저기 언덕에서부터 여가까지 우리 학교 전체 면적보다도 두 배는 될 만큼 많은 논을 우리가 모두 베었구나하시면서 오늘 품삯까지 합하면 벌써 두 사람 몫은 벌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모두 !”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좋아했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렇게 수학여행 비용이 착착 저금되고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힘 드는 줄을 몰랐다. 힘든 일을 하였으면서도, 우리들은 신바람이 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자랑스럽게 오늘 우리가 한 일을 이야기했다.

오늘 우리가 논 7,200평을 베어서 우리 고장의 일손을 돕기도 하지만, 우리가 번 돈으로 수학여행 비용으로 하기로 했는데 오늘까지 두 사람 몫을 더 벌었다고 하셨어요. 우리 열심히 일해서 집안일도 돕고 수학여행 비용도 벌 거예요하자, 어머니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너희들이 힘든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구나. 몸살이라도 나면 안 된다. 너무 애쓰지 말아라하셨고, 오빠는 이런 어머니께 에이, 경미가 언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애예요. 보나마나 꾀나 부리고 제일 꼴찌를 하고 있을 텐데 몸살이 날 까닭이 있어요?”

하면서 혀를 날름 내밀며 나를 놀렸다.

에이, 오빠, 또 날 어린애로 봐. 만날 그런 오빤 뭐 잘하는 게 있어?”

요게? 또 나를 무시하고 덤벼? 너 한 대 얻어맞아 볼래?”

에이, 넌 오빠가 되가지고 동생을 그렇게 놀리고 그러냐? 좀 듬직 해봐라. 그러니까 동생이 널 무시하려는 거 아니냐?”

하면서 오빠를 나무라셔서 다행히 그것으로 끝났지만, 오빠가 종주먹을 해 가지고 군밤을 먹이는 모습을 해서 어머니께 또 꾸중을 들어야 했다.

저녁을 먹은 나는 지쳤는지 금세 잠이 몰려 왔다. 이를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벌써 어머니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오시면서

경미가 아주 지쳤구나. 오늘 학교에 갈 수는 있겠니? 그렇게 힘이 들어서 며칠이나 견딜까? 아무래도 걱정이다. 어서 씻고 오너라. 밥 먹자.”

하시면서, 나를 깨워주신 것이었다. 나는 환한 아침 햇살을 보면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서 뛰어 나갔다. 마음속으로

아차 늦었구나. 서둘러야겠는데.....’

하면서 서둘러 세수를 하고, 들어가서 서둘러 아침을 먹고 아버지가 갈아서 잘 싸놓은 낫을 가방에 꽂고 나서 집을 나섰다.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나의 인사를 받은 어머니가

그래, 네가 지금 학교 가는 거니? 논에 보리 베러 가는 거지?”

하고 놀리셨다. 물론 하루 종일 일을 하게 될 것이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일이니 그것도 학교 공부라고 생각하니까 논에 일하러 나가는 것도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아침 인사를 나누는 교실의 분위기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밝고 신이 난 것이었다.

그래, 어제 너무 많은 일을 해서 힘들었지? 혹시 몸살이 난 사람은 없을까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너희들 모두 밝은 표정으로 나온 걸 보니까 정말 반갑구나. 힘들었지?”

네에,”

우리들의 목소리는 힘차고 밝았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을 보고서

너희들 그렇게 힘든 일을 한 아이들 같지 않구나. 정말 괜찮은 거니?”

네에.”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신 선생님의 표정은 환하게 웃어 주시고 계셨다.

어제 너희들이 너무 많은 논을 베어 치웠기 때문에 오늘은 쉬네 부락 부근으로 가기로 했다. 그랬더니 어제 보다 더 많은 논을 베어 달라고 신청이 들어 왔는데, 너희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할 수 있는데 까지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시는 말씀을 끊고 명식이가

선생님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 오늘은 30마지기를 베어 버릴 거예요.”

하며 팔뚝을 들어서 뽀빠이 흉내를 내었다. 이런 모습을 본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선생님도 웃으시면서

, 명식이 ! 너 혼자서 30 마지기를 벨 거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모두 !”하고 웃음으로 즐거운 한 바탕을 만들었다.

오늘 베어 달라고 신청을 한 논이 꼭 30 마지기이거든. 그럼 그걸 정말 다 벨 수 있을까? 너희들 생각은 어때?”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누가 시킨 것도 의논을 한 것도 아니지만 모두 한결 같이

다 벨 거예요.”

하고 합창을 하였다. 정말 우리는 그 많은 논을 다 벨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당시의 아이들 작업장면****

첫째 시간을 공부하는 동안도 아이들은 논에 가서 일하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 힘든 일을 하기 싫다는 아이는 없었다. 어서 나가서 오늘 베기로 한 30마지기를 다 베자는 생각들 뿐이었다. 첫째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은

난 이제 교무실에 가서 오늘 작업을 나간다고 신고를 해야 하거든, 너희들은 낫 조심하고 작업 준비들을 갖추고 운동장에 나가서 모여 있거라.”

하신다. 우리들은 마치 소풍을 나가는 아이들만큼이나 신바람이 나서

! .”

하고 함성을 지르며 좋아들 하였다. 물론 작업을 하면 늘 꼴찌를 하는 몸이 약한 성애 같은 아이들은 기가 죽어서 아이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일이 하기 싫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이렇게 야단인데 혼자서 그런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또 논에 나가면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 데, 공연히 아이들에게 미움을 살까 봐서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낫을 챙겨 들고 목에 수건을 질끈 묶은 아이도 있었고, 작은 수건을 허리춤에 찬 아이도 있었다.

! 문식이 넌 아주 마당쇠 같다. 마당쇠!”

정근이가 문식이를 놀리자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예이, 무엇을 할 깝쇼 마님!”

하며, 마당쇠 흉내를 내어서 온 교실이 한 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우리들이 운동장에 줄을 지어 모여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선생님과 함께 교장선생님께서 함께 나오셔서 우리에게로 오셨다. 선생님이 반장에게 눈짓을 하자 반장이

차렷, 교장 선생님께 경례 !”

하고 경례를 하자 다시 돌아서서

열중 쉬어 !”

하자 교장선생님은 , 하시면서 목을 가다듬고서

너희들이 작업을 한 것에 대해서 선생님께 잘 들었다. 우리 고장의 일손을 돕고 너희들이 결정한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낫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우선 다치지 않게 조심들 해야 한다. 너무 욕심을 부려서 일을 하다가 몸살이 나거나 하면 안 되니까 천천히 조심들 해야 한다. 자 열심히 해라. 다치지 않게 몸조심하고, 알았지?”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힘차게

.”

하고 대답을 하였고,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곧장 출발을 하여서 쉬내 동네 부근으로 가기 위해 들판을 가로질러 나갔다. 교실 보다 덥고 먼지가 풀썩이기는 하지만 들판을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소풍을 가는 것처럼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다. 우리들은 마치 적군을 물리치러 나선 국군처럼 씩씩하고 용감하였다. 오늘 하루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우린 기절을 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9.000평이라는 면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전체의 면적이 3,000평 남짓 밖에 되지 않으면 그 세 배나 되는 넓은 면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일을 하는 요령도 생겼고, 일을 잘 하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익숙하게 보리를 베어 젖히는 것을 본 어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이기 때문에 겁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논의 주인 되시는 장수동 이장님은 우리들에게

아직 어리고 공부해야할 너희들에게 이런 일을 시킨 것은 미안하다. 그러나 이왕 일을 하러 나왔으면 어른들에게 욕먹지 않게 깨끗하게 일을 해주어야 하는 거야. 너희들도 모두 우리 고장의 아이들이고, 농사를 짓는 집의 자녀들이니까 모두 내 집의 일이다 하고 생각하고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알겠지?”

하고, 말씀을 하시고 나서 선생님께 따로 부탁을 하시면서 조금 후에 새참을 준비해 오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마을로 돌아 가셨다. 우리들은 각자의 옷이나 도시락을 모아서 더워지지 않게 잘 덮어서 햇볕을 가려 놓은 뒤에 각자 한 두둑씩 일을 맡았다. 아무래도 힘이 약하고 일이 서투른 여자들에게는 귀퉁이의 두둑이 짧은 것을 맡기고 남자들은 한 가운데 두둑이 긴 것들을 맡았다. 요즘처럼 논이 반듯하게 농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니까 아무리 부잣집의 논이라도 모두 비뚤비뚤 땅 모양이 생긴 대로 둑을 지어 만든 논들이었다. 그래서 논에 심은 보리의 두둑은 모두 그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른 그 부근에 있는 여러 논의 보리를 베어야 하였으므로, 남자들은 서로 두둑이 길고 보리가 잘 자란 것을 고르려고 하였다


그래야 다른 아이들과 같이 끝날 수 있고, 다른 아이들보다 잘 하는 아이들이 더 많이 베어야 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오늘의 일을 시작 해보자. 너희들이 지치면 안 되니까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 때 까지 열심히 베고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잠시 쉬어 가지고 다시 시작하도록 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않게 조심하자.”

선생님은 말씀을 마치자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 주셨다.


우리들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힘차게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듯이 모두 자기가 맡은 논 두둑에 덤벼들어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어찌나 열심히 베는지 말소리 하나 나지 않고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는 소리처럼 사그락사그락 보리들이 베어져 눕는 소리만 들려왔다. 선생님이 맡은 두둑의 길이가 가장 길지만 선생님도 만만찮은 솜씨로 보리를 베어 나가시기 때문에 따라 붙은 사람은 형주와 문섭이 뿐이었다. 두 아이는 키도 크고 힘도 좋아서 집에 가면 어른 몫을 한다고 소문이 난 일꾼들이다


우리들이 사는 곳은 읍내에서도 40리가 되는 면 소재지에서도 또 십리 길을 더 들어와야 하는 산골 마을이다. 오죽 했으면 정부에서 지정한 벽지<교통이 불편하고 뒤진 고장>로 지정을 받은 고장이었다. 그래서 하루네 4번씩 다니는 버스가 생긴 것도 몇 년이 되지 않고 늘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큰 장을 보려면 삼십리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이런 일은 결혼 같은 큰 잔치나 있어야 마차를 동원하여 함께 보는 그런 고장이다. 그래서 이 고장의 아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농촌에서 집안의 일을 도와 가면서 자랐기 때문에 대부분이 어느 정도의 농사일을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런 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일단 보리 베기가 시작되자 들판은 사그락 거리는 낫질 소리만 들려오고 우리들의 이마에는 금세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가 손등이며 발들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더위에서 힘든 일을 하는 우리들은 이마의 땀을 쓱 팔뚝으로 문지르고 만다. 그러면 팔뚝에 묻은 흙먼지가 이마에 굵은 줄을 그리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본 아이들은 옆의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히죽거리는 것이었다. 내 왼쪽 곁에 두둑을 맡은 영임이가 오른쪽에서 베던 승희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보이자 승희는 힘이 들어서 주저앉으면서

왜에? 내가 뭐 잘못 했어?”

하고, 나의 쪽을 향하여 말을 걸었다. 나는 나에게 그런 줄 알고 의아해서

? 나보고 그러는 거야?”

했더니, 승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김선태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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