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 영임이가 날 보고 웃잖아.”
하자, 영임이가 다시 낄낄거리면서
“너 이마에 흙탕물을 잔뜩 뒤집어썼어.”
하였다. 이 말에 아이들은 모두 우리 쪽을 바라보고서는 승희의 이마에 팔뚝으로 문지른 자국이 흙투성이 인 것을 보고 한 바탕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승희가 울상이 되어서
“왜에. 얼굴에 뭣이 묻었는데?”
“얼굴이 아니라 이마에 흙이 묻었다구.....”
내가 대답을 해주자 승희는 그제야 웃으면서
“넌 안 묻은 줄 알고, 너희들도 다 묻었어. 옆에 사람에게 물어봐.”
하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약 4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이미 일이 끝난 아이들이 잠시 쉬었다가 다른 사람의 줄을 잡아서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형주는 어느 새에 자기 줄을 널펀하게 다 베어 눕혀 놓고서 선생님의 두둑을 거꾸로 베어 오고 있었다. 문섭이도 다 베고 나서 가장 길게 남은 승희의 줄에서 중간에서부터 베어서 도와주고 있었다. 우리는 1학년 입학을 해서 졸업을 하도록 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같은 반에서 그대로 올라가기 때문에 모두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만약 한 동네에 사는 여자아이가 아파서 걷지 못할 만큼 심하면 남자아이들이 들쳐 업고 달려갈 만큼 우리들은 남자, 여자를 따지고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남자니 여자니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었고, 이렇게 도와주어도 어느 누구도 흉을 보거나 이상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같은 학급의 친구일 뿐이었고, 서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논의 보리 베기가 끝나기까지는 불과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찌나 열심히 베었든지 모두들 말을 하는 것도 잊은 듯했다, 승희네가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웃음꽃을 피운 것이 전부였다. 선생님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서 주르르 흘러내리고 등줄기를 타고 내린 땀이 흘러 내여서 바지의 허리띠 부근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자, 잠깐 쉬자, 우리가 벤 것이 450평이라는데 꼭 25분이 걸렸나보다. 이렇게 하다보면 오늘 너무 많이 베게 될 것 같은 데 걱정이다 너무 힘을 빼지 말아라. 하루 종일 베려면 안 된다.”
하시면서, 논둑에 걸터앉으셨다. 나는 그냥 쉬는 것보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해서
“ 산 위에서 부는 바람......”
하고 노래를 시작하였다. 모두들 따라 불러 주어서 금세 음악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음 논으로 가서 자기가 맡을 줄을 잡으면서도 계속 노래를 불렀다. 어쩐지 신이 나고 힘이 덜 드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더운 날씨가 점점 더 견딜 수가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더위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고, 우리가 지나는 들판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듯이 보리가 베어져 눕고 말았다. 벌써 들판의 한 부분이 우리들의 손으로 깨끗하게 베어져 가고 하늘 높이 떠오른 햇볕은 목덜미를 따끔거릴 정도로 따가워 졌다. 우리는 시내에 가서 파놓은 웅덩이에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고, 목에 두르면 훨씬 더 시원해졌다. 한 시간쯤 일을 하고 잠시 쉬고, 다시 시작하여 쉬기를 세 번째 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논주인 되시는 분들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주셔서 그걸 먹으면서 잠시잠시 쉬었기 때문에 우린 그리 지치지는 않았다.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 밑으로 모여든 우리는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뜨뜻한 무더위로 우리를 감싸 안았지만, 땀을 흘린 우리는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더운 줄을 몰랐다. 점심을 먹고 나자 남자아이들은 시내의 웅덩이에서 멱을 감느라고 소란스러웠다. 여자아이들도 가고 싶었지만 시내에 물이 넉넉하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그늘에서 친구들과 손뼉치기를 하면서 놀고 있을 때, 남자아이들이 돌아오면서
“야 ! 너희들도 좀 씻고 와라. 그래도 물에 씻으니까 훨씬 낫다. 더운 줄을 모르겠어.”
하면서 우리더러 가보라고 하였다. 정말 우리들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물이 얼마나 있어서 남자들이 더럽혀 놓은 물웅덩이가 깨끗해 졌을까 ?’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야 ! 여자들도 가서 좀 씻어라. 옷을 벗고 들어 갈만한 물은 없어도 발목을 적시고 씻을 수는 있는 모양이다.”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가보라고 하셔서 일단 우리들은 시냇가로 가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시냇가에 가자마자 제법 물이 고인 웅덩이를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풍덩”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옷들을 입은 채로 물 속에 뛰어 들어서 서로 물을 끼얹기도 하고, 물 속에 텀벙 잠기기도 하였다.
금세 시냇가는 왁자그르르 우리들의 소리로 채워져 버렸다. 한 동안 정신없이 물장난을 하고 있는 동안에 시간은 벌써 제법 흘렀던가 보다 선생님께서 그만 나오라는 호루라기를 길게 불어 주셨다. 우리는 잔뜩 젖은 옷을 대충 물기를 훑어 내려서 털고 나섰다. 그 정도만으로도 얼마나 시원했는지, 아마도 시원한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의 물 속도 이만큼 시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 옷이 좀 마를 동안에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서 신나는 음악 시간을 하였다. 교실 안에서 부른 노래보다는 너른 들판 한 가운데서 마음껏 소리를 질러 보는 것도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후에 우리는 정말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 많은 논들이 우리가 지나는 대로 깨끗하게 깎여져 들어 누운 것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오후 5시가 되어서 해가 좀 설풋하게 기울자 이제 더위는 좀 가신 것 같았지만, 우리는 상당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보리를 베는 논의 주인아저씨가 우리들이 쉬는 시간에 맞춰서 간식을 가지고 오셨다.
“자, 아이들아 나오너라. 세참 가지고 왔다. 시원한 아이스 바를 사왔어 !”
하시자 아이들은 모두 베던 낫을 내던지고 논둑으로 나왔다. 선생님께서 호루라기를 불면서
“야 ! 다친다. 너무 달리지 마라. 위험하니까. 모두 다 줄 수 있게 사오셨을 거니까 차례로 와도 돼. 염려들 말고.....”
하시면서 안전을 당부 하셨다. 아이들이 몰려 와서 줄을 서자 아저씨가 모두 하나씩 아이스 바를 들려 주셨다. 우리는 너무 반갑고 시원해서 더위가 다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둘째 날의 작업이 끝났을 때는 오후 5시 20분경 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우리는 아침에 약속했던 대로 9,000평이나 되는 논을 모두 베고 나서도, 600평을 더 베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이 한 마지기 가까이씩이나 벤 것이란다. 선생님은 한 마지기가 얼마나 되는 땅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면서 우리에게
“야 ! 너희들 정말 국민학교 6학년이 맞니? 아무래도 너희들은 농군들인가 보다. 너희들이 오늘 벤 논은 9,600평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대략 저 논 한 뙤기 만큼씩이나 벤 거야. 엄청나지 않니?”
하시면서 우리들을 칭찬해 주셨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많은 논을 베었는지 다시 한번 우리가 벤 자리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이 들판에서 보리를 벤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벤 자리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말 들판의 한 부분을 몽땅 베어 버린 것이었다.
“자, 이제 오늘의 작업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지치고 힘이 들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는 시원한 물로 깨끗이 씻고 나서 벽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약 30분만 있으면 다리 아픈 것이 좀 풀릴 것이다. 꼭 그렇게 좀 해라. 알겠지?”
“오늘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했어. 내일을 아무리 많은 부탁이 있어도 우리가 너무 무리하게 해선 안 되겠다. 너희들의 힘에 겨운 일을 시킨 것은 오늘 내가 잘 못 생각 한 거야. 내일은 좀 적게 할 테니까 오늘 잘 쉬고 나오도록 해라.”
하시면서 피로가 쉽게 풀리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학교에 가서 가방을 가지고 돌아 와야 했지만 너무 힘이 들어서 내일 공부한 한 시간 책만 들고 가면 되니까 그냥 가기로 하였다. 들판에서 우리 마을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는 들판에서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지친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기운이 없어서 터덜터덜 돌아갔다. 선생님도 오늘 일을 끝내고 나서는 혼자서 계산을 해보셨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신 것이다.
사실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시간까지 잔다고 생각하고 잠이 든 것이 그만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났었다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억지로 깨워서 저녁을 한술 떠먹고 다시 들어 눕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손아귀가 아파서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았다. 오빠가 어깨를 주물러 주고, 팔목 운동을 시켜주기까지 하였지만, 아침밥을 먹으려니까 수저를 잘 쥘 수가 없었다.
이런 나의 꼴을 보신 아버지께서 혀를 차시면서
“아니 어린것들에게 얼마나 일을 시켰으면 저렇게 수저질을 못하고 저럴까? 아직 어린 학생들인데 농촌 일손 돕기도 좋지만 어지간히 해야지 아이들이 견디겠어?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저렇게 함부로 일을 시킬 수가 있나? 원.....”
하시는 것을 듣고 나는 만약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면 선생님과 싸움이라도 벌이 실 것 만 같아서
“아버지, 그게 아니어요. 농촌 일손 돕기도 하고 품삯을 받아서 우리들 가을 수학여행을 가자고 우리들이 하자고 그런 것 이예요. 선생님도 우리랑 함께 일을 하시느라고 옷도 땀으로 다 젖고 기운이 없어서 흔들거릴 지경이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어제처럼 많이 하면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이 팔 다리를 쉽게 풀리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어요.”
“저 녀석은 제 아비 말은 안 듣더니 선생님은 감싸고돌면서 하는 짓이 뭐야 지금?”
“ 아앙, 아빠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이랑 싸움이라도 하면 나는 학급에서 쫓겨난단 말 이예요.”
“왜? 네가 일러 바쳤다고 선생님이 혼낼까 봐서?”
“아니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쫓겨나요. 우리가 그렇게 하자고 결정을 했으니까 선생님이 책임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알았으니 어서 밥 먹고 나가서 오늘은 열 마지기씩만 베어라.”
아버지께서 우리들이 하는 일이 못 마땅하셔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한 사람이 열 마지기라니 그러면 어제 학급 전체가 벤 만큼씩을 베어란 말인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미운 소리는 하셨지만,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낫을 잘 갈아서 다치지 않게 새끼로 말아서 잘 싸서 내 운동화 옆에 놔주셨다.
엊저녁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그래도 몸이 개운하여서 얼른 학교를 향하였다. 어제 가방도 안 가져 왔기 때문에 첫째 시간에 공부할 국어 책만 한 권 달랑 들고, 낫을 들었으니 학교에 가는 것인지 일터에 가는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에 지친 우리들이지만 아침에 집 앞에 나서니 아이들은 언제 그렇게 힘든 일을 했느냐는 듯이 여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몸이 약한 윤숙이도 힘든 기색도 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팔이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제처럼 많은 논을 베지 않기로 했다. 어제 너희들이 너무 무리를 해서 몸살이 나서 다들 학교에 못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단 한 사람도 결석을 하지 않고 다 나왔으니 참 다행이구나. 엊저녁에 힘들었지?”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이
“아아니요.”
하자, 선생님은 어깨를 휘돌리는 동작을 하시면서
“그래? 난 엊저녁에 어깨가 아파서 아이들에게 두들겨라, 주물러라 야단을 했는데?”
하시자, 우리들은
“에게, 그 꼬마들이 두들겨서 시원해요?”
하고 선생님을 놀리기까지 하였다. 선생님은 학교 안의 사택에서 사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선생님 댁의 아이들을 잘 안다. 2학년짜리 딸아이와 다섯 살, 네 살짜리 두 아들을 두셨는데, 아이들이 너무 귀엽고 우리들을 잘 따라서 가끔씩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 주기도 한다. 아직 세 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밀어 주면서 귀여워서 서로 업어 주려고 쟁탈전이 벌어 지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그런 꼬마들이 두들겨 보았자 선생님의 어깨가 시원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시간 공부를 마치자 벌써 우리들이 작업을 하러 갈 논의 주인이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일손이 없는 노인들만 사시는 댁이어서 우선 해드리기로 약속을 했더니, 혹시 다른 곳으로 갈까 걱정이 되셔서 미리 와서 기다리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왕 일손을 돕는 것이지만 일할 만한 젊은 분이 안 계신 그런 댁의 일부터 해 드리는 게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서 우선적으로 해드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새끼미 마을의 앞들에서 베기로 한 날 이었다. 이 마을의 원호 가족 한 집과 노인들만 있는 집, 그리고 우리 반의 정아네 인데, 할아버지가 농삿일을 하시고 아버지는 몸이 허약하여 일을 못하시는 댁인데, 할아버지께서 앓아 누우셨다고 해서 그 집의 일손을 도와 드리기로 약속을 하였다.
학교에서 동남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산기슭으로부터 흘러내린 듯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그래서 논들이 계단식이고 그리 넓은 것이 별로 없이 한배미가 보통 한 두 마지기씩이나 되는 것들이었다. 300에서 500평 정도의 논바닥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두 세 배미씩 나누어서 들어섰다. 아이들이 힘이 들기는 하였지만, 사흘째가 되니까 낫질을 하는 요령이 생기고 보리 베기에 익숙해져서 점점 더 베는 속도가 빨라졌다.
학교에서 건너와서 우리 동네 정자나무 아래에다가 도시락을 가져다 두고, 논에 들어서서 작업을 시작 한 것이 10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는데,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정아네 집의 논 7마지기를 몽땅 다 베어 버렸고, 원호 가정의 논 다섯 마지기까지 거의 다 베었다. 점심 전에 3,600평이나 되는 논의 보리를 다 벤 셈이 된 것이다. 정자나무 아래 제법 너른 마당이 있어서 점심을 여기서 먹게 되었다. 나는 우리 집에 가서 커다란 주전자에다가 시원한 물을 퍼 가지고 와서 선생님께 드리자
“고맙다. 은자야. 집까지 제법 먼데 일부러 가서 이렇게 시원한 물을 떠오니 고맙구나. 아이들이 얼마나 반갑겠니?”
하시면서, 차례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모두 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에 잠시 쉬라고 하나 아이들은 그 동안에 고누를 두는 아이들, 씨름을 하는 아이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로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선생님께서 정자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으시면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 !”
라고 큰 소리를 하셔서 우리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잠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바로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라고 했던 선생님의 친구가 있었단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의 일이구나.”
하시자 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모두들 선생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30년 전쯤의 일이다. 이 마을에 살던 선생님의 친구가 몹시 집안이 가난하여서 끼니를 제대로 먹고 살 수가 없었단다. 그 무렵에는 모내기를 하면 모내기 나온 사람들의 식구는 모두 다 나와서 모내기하는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지. 부잣집에서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 풍습이었단다. 그래서 그 친구가 아침도 굶고 나와서 기다리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의 밥그릇은 이렇게 커다란 그릇에다가 고봉으로 수북하게 밥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가득 담은 어머니의 밥을 그 친구가 혼자서 다 먹은 거야. 겨우 일곱 살짜리가 말이야. 어머니는 다시 타다 잡수셨지만, 일곱, 여덟 살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어른 밥을 수북하게 한 그릇 다 먹었으니 얼마나 배가 불렀겠니? 배가 남산만 해 가지고 여기 이렇게 기대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은 지금 너희들처럼 뛰어 너는 거야. 이 친구 뛰고는 싶은데 배가 불러서 뛸 수가 없으니까 친구들에게 한 말이..”
선생님이 여기까지 이야기 하셨으니 무슨 말인지 모를 우리들이 아니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서 합창을 하였다.
“얘들아 앉아서 노올자 !”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는 모두들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고 한바탕 웃음보따리를 풀었다. 우리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셨는데, 학교 다닐 적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서 그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우리 학교로 발령을 받아 오셨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이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오후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은 또 다시 시끌벅적하게 놀이를 시작하였다. 정말 나무에 기대어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 하는 얘들도 있었다.
오후엔 비가 내릴 듯이 구름이 끼어서 작업하기엔 좋았지만, 어른들은 이제 비가 올 가봐 걱정들을 하셨다. 그렇다고 베기로 한 논을 다 베지 않고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보리를 베어 나갔다. 오전 보다 훨씬 더 일을 하기가 쉽고, 시원하였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어제 보다 도 더 많은 실적을 올렸다. 오늘을 10,000평이 넘는 논의 보리를 베었다. 11,400평을 베었는데도 어제 보다 40분이나 빨리 끝났다. 더 벨 논만 있었으면, 아마도 40마지기는 베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논을 베고 나자 동네 어른들이 나오셔서 혀를 내두르셨다.
“아니? 이 아이들이 하루에 11,000평을 더 베었단 말이야? 그럼 거의 한 사람이 한 마지기씩을 베었는데? 그럼 어른들과 같은 거 아니야? 아이구 놀래라. 원 아이들이 뭐 이렇게 일을 잘해?”
하시는 분은 바로 이 동네 이장님이셨다.
“야 ! 너희들 이젠 저희들이 어른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게 생겼는데?”
하시면서 앞에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제 너무 힘들어 하길레 오늘은 조금 적에 하겠다고 했는데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이 베었는데도 이렇게 일찍 끝났는데요.”
하고 이장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자, 오늘 일은 여기서 마친다. 너희들이 너무 일을 잘해서 이장님이 이렇게 칭찬을 하셨는데, 난 너희들이 지칠까봐 걱정이다. 집에 가서 잘 씻고 다리도 좀 주물러야 한다. 팔과 어깨도 주무르고 푹 쉬도록 하여라.‘
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너무 일찍 끝나서 섭섭한지 한바탕 놀이를 하다가 떠났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보리 베기를 한 것이 열흘 동안이나 되었고, 그 동안에 번 돈이 64,000원이나 되었다. 320마지기<96,000평>나 되는 논의 보리를 우리가 다 베어낸 것이다. 완전히 우리 고장의 논보리의 1/3은 우리가 베었다고 소문이 났다.
이렇게 열흘씩이나 보리를 베고 나니 아이들은 코피를 쏟는 아이들도 있고 모두들 지쳤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을 보면서
“아무리 나가고 싶어도 안 된다. 난 너희들이 스스로 벌어서 수학여행을 가겠다는 결심을 보고 지금까지 함께 일을 했지만 , 이젠 나도 지쳐서 더 이상 안 되겠다. 너희들 벌써 코피를 쏟은 아이가 몇 이냐?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4일간은 작업을 나가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더 이상 내 보낼 수 없어. 이젠 안 나간다. 알겠나?”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기가 죽었다. 날마다 돈이 불어나는 것이 좋아서 계속 하자고 하였지만, 지친 아이들이 많아서 더 이상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선 나도 지쳐서 이제 그만 했으면 싶었다.
그 동안 못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는 체육 음악 같은 시간은 줄이면서 우선 국, 산, 사, 자 4과목의 공부를 계속 하였다. 오후 5시가 되도록 하루 열 시간이라도 좋다고 공부에 매달린 우리는 4일 동안에 열흘 동안의 모자란 공부 진도를 거의 다 맞추었다. 우리는 매달마다 월말 일제 고사를 보아서 그 점수만 가지고 성적을 내었기 때문에 안 배우고 시험을 볼 수 없어서 무척 바빴다. 월말이 다가왔었기 때문에 일제고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작업을 하느라고 시험 범위까지 배우지도 못해서 서둘러야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 자습시간까지 공부 시간으로 해서 간신히 시험 범위까지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 첫 주에 5월말 일제고사를 치르고 나자,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조금 내렸다. 이 비가 오자 농촌은 진짜 야단이 났다. 지금까지 논에 물이 없어서 갈지도 못하고 논둑을 붙이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니까, 논을 갈고 논둑을 붙여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일에 매달려서 단 한 사람도 일손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또 다시 우리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모내기 농촌일손 돕기 운동]을 펼쳐라 는 지시가 잇달아 내려 왔다. 하긴 그 때만 하여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대부분이 농사에서 얻던 시절인데 이렇게 날씨가 가물어서 전 국민이 나서서 가뭄대책을 서두르다가 비가 왔으니, 온 나라의 모든 힘을 다 모아서 모내기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만약에 위에서 이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농사일을 돕기 위해서 농번기 방학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