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고향을 떠나 공부를 하던 윤동주가 고향을 찾을 때면 중얼거리던 노래가 아리랑이라 한다. 처음 듣는 말이지만 실제 윤동주는 아리랑을 부르곤 했나 보았다.
다시 동주를 만났다. 활자가 아닌 다른 형태로 동주를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그동안 활자를 통해 동주는 자주 만났다. 늘 만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활자 속의 동주는 피상적이었다. 부끄러움을 이야기 하고, 부정의 현실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고뇌하는 젊은 지식인 동주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느끼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그러다 동주를 간접적이나마 만나고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건 분명 기쁨이었다.
생각해보면 첫 번째 만남은 설렘 자체였다. 동주가 태어나고 뛰어 놀며 공부하고 기도했던 북간도 명동촌의 동주 생가를 방문했을 때 그의 시 ‘별 헤는 밤’이나 ‘십자가’란 시가 왜 태어난 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직접 보고 느꼈던 경험은 미지의 여인을 상상하며 다가가는 첫 미팅의 그 설렘 같은 것이라 할까? 함께 간 사람들이 왁자지껄 이야기할 때 어둠 속에서 하나 둘 피어나는 명동촌의 별들을 보면서 고향을 떠난 동주가 먼 타국에서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되뇌며 얼마나 쓸쓸한 그리움에 몸서리 쳤는가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5년여가 흐른 지금도 그때 그가 다니던 학교와 그가 살던 곳, 예배를 드리던 예배당의 뾰족한 첨탑을 바라본 기억은 뚜렷한데 아쉽게도 그곳에서 그의 흔적을 담아왔던 것들은 조그만 실수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두 번째 만남은 영화 ‘동주’였다. 영화 속의 동주는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청년이었다. 영화에서 더 반가웠던 것은 동주를 만난 것도 좋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억 저편에 있던 사촌이면서 친구인 송몽규를 만난 것이었다. 조국의 현실에 맞서 싸우자는 몽규와 사색과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던 동주. 활자로 보았던 두 사람의 관계를 영화라는 매체를 보는 맛은 새로웠다. 그러나 화면 속의 동주를 보면서 뭔가 모를 조금의 갈증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기획했던 음악극 ‘윤동주’를 만났다. 윤동주와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음악극 형식으로 이루어진 ‘윤동주’는 일단 형식부터 새로웠다. 극은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와 극, 여기에 교향악단의 연주가 하나된 형태였다. 한 편의 뮤지컬 냄새도 나고 오페라의 냄새도 물씬 풍긴 무대는 동주의 시에 대한 애착과 기독교적인 삶, 그리고 고난과 고뇌 등이 때론 웅장하면서도 잔잔한 파도처럼 펼쳐졌다.
막은 죽음을 알리는 서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윤동주의 시 <비애>로 문을 열었다.
호젓한 세기의 길을 따라
알 듯 모를 듯한 데로 거닐고저!
아닌 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 외로우려니
아~ 이 젊은이는
피라미트처럼 슬프구나
동주의 생가에서 현실감을 느끼고, 영화에서 그의 삶을 바라보았는데 세 번째 만남은 또 다른 색다름이었다. 무대와 나의 거리는 3미터. 그 가까운 곳에서 시작부터 단란한 유년의 동주가 아니라 출구 없는 현실에서 고뇌 가득한 사나이가 광야를 외로이 거니는 동주를 보았다. 관현악단의 쓸쓸함이 베인 연주 속에 합창단 또한 읊조리 듯 피리밋처럼 슬픈 표정을 하고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외로운 심사를 선율에 맞춰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음악극의 곡을 맡기도 한 이용주의 시 <아들의 죽음>이 흘러나왔다.
새벽에 꿈속에서 아들의 눈물을 보았다
아들의 몸은 싸늘해 보였다
하지만 눈물을 닦아주고
물을 먹여 준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 연희전문학교 시절 그리고 일본의 유학과 독립운동 혐의로 친구 송몽규와 함께 체포된 동주는 온갖 고문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차디찬 후쿠오카 감옥에서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생을 마감한 동주는 우리 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늘 시를 통해서만 만났던 동주를 이제 영화로 음악극이라는 형식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시와 삶 그리고 죽음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소망했던 한 청년의 순결한 이상이 그립고 아파서가 아닐까.
그런데 그 그리움과 아픔이 관객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이번 공연한 참가한 전주시립합창단 수석 단원으로 있는 김영지 씨는 윤동주의 공연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뭉클했어요. 처음 악보를 받고 동주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게 피어올랐어요. 물안개처럼 이라 할까. 처음엔 윤동주를 몰랐어요. 그런데 이번 극을 하면서 윤동주의 삶과 시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번 공연의 특별했던 점을 성악을 전공한 합창단의 노래와 연극을 전공한 이들의 몸울림 그리고 오캐스트라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었다. 어찌 보면 전혀 다른 형태의 것들이 만나 멋진 하모니를 이뤄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줬다.
“연극을 하는 분들이 노래를 많이 살려준 것 같아요. 노래로만 전달할 수 없는 감정들을 몸의 표정을 통해 잘 전달되게 한 것 같아요.”
윤동주. 평생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던 청년. 그가 간 지 100년이 되었지만 그는 앞으로 200년 300년 후에도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러울수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살아 우이 곁에 있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