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교사들은 체제 순응적인 이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바라고 들어온다고 하지만, 진보적인 프로그램으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 믿는 이들에게 적합한 직역이다. 직접적으로 학교 교육의 틀에 철학과 이상을 담아 실천하고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과 변화가 있는지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부장적 젠더 지배를 타파하고 진정한 성 평등을 이루려 한다면 페미니즘 정당에 투표하고 여성주의 시위에 참가하는 것 이상으로, 학급 운영과 교과 교육과정 재구성으로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교실에서는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고, 이 실험들은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전망과 관점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국민들이 교사들의 이념 편향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교육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움직임은 결국 특정한 이념 지향을 내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처음은 언제나 서툴기 마련이라지만, 첫 담임은 결코 쉽지 않았다. 소규모 학급인 탓에 20~30명 규모를 전제로 한 교사용 지도서의 학습 활동들은 전부 재구성해야 했고, 이전 담임 선생님이 워낙 훌륭한 분이었던지라 내가 웬만큼 몸을 던져 활동들과 이벤트를 기획하더라도 아이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이전 담임 선생님과 비교하곤 했다.
비록 6명밖에 되지 않는 학급이지만, 학급 운영은 임금님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중심이 되는 운영 철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철학은 아주 세세한 규칙들로 뒷받침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일관성과 공정성이 있어야 학생들이 존중하고 따르게 된다. 내 경우는 교사 스스로 공부하고 학생들과의 말다툼을 통해 군신공치와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친구처럼 소통하는 선생님을 상상하며 학급을 운영했다.
그러나 학급 운영은 상상했던 대로 잘 되지만은 않았다. 발표 예절을 갖추지 않은 소통은 토의토론이 아닌 잡담과 소음에 대한 무절제한 방치로 이어졌고, 격의 없는 관계는 말 그대로 예의를 모르게 하고 버릇을 망치는 결과로 이어지는 듯 했다. 더군다나 어린 아이들이라 말의 논리보다는 기 싸움과 눈치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과 함께 민주적이면서 건설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본다. 좋게 대해주면 우습게 여긴다는 생각으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아이들과 기 싸움을 하며 억누르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대학에서 독서 모임을 운영했었고 오랫동안 글을 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 부족과 글쓰기 능력의 결핍이 큰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을 보충한다면 많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는 우리 반 아이들이 책 읽는 습관과 글쓰기 연습을 통해 깊은 생각과 논리적 사고를 배워 교화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발전하여 학교 도서실을 자주 이용하고 교과에서 글쓰기 연습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뜻으로 출발한 모든 일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이상은 현실의 한계에 부딪쳤고, 아이들의 독서량과 글쓰기 능력은 크게 늘지 않았다. 배움과 성장은 이념의 주입과 투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참여하고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는 경험의 제공에서 비롯된다는 작은 교훈만이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