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생존을 위해서는 마산초에서 5.5km를 걸어서 사강리까지 걸어가야 한다. 같은 송산면임에도 포도농원과 공장 부지로만 이루어진 마산리와는 달리 사강리에는 여러 가게들이 있어 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강까지는 가야한다. 편의상 ‘읍내’라고 부르지만, 마산리와 사강리가 속한 송산은 읍이 아니라 면이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5.5km라면 포병학교에서 병과교육을 받을 때는 체력 단련을 위해 뛰어서도 가던 거리였지만, 퇴근하고 쇼핑을 하러 가기에는 아무래도 귀찮고 힘들다. 법·율·장의 진리가 있다는 천축을 향해 순례하던 현장 삼장법사처럼,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뉘엿뉘엿 지는 노을을 뒤로 하며 편의점이 있다 전해지는 송산 중심가를 향해 걸었다.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었을까, 드디어 편의점에 도착했다. 편의점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우니 커피를 마시고 싶은 도시인의 본성이 깨어나 나는 읍내를 헤매었고, 끝내 미미 다방에 이르렀다. 글쎄, 천축국에 도달했을 때의 당나라 삼장법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곳은 나와 시·공간이 다른 철저한 이방이었다.
엄마뻘의 마담은 비음이 잔뜩 들어간 간드러진 목소리로 긴 다리를 꼬고는 더욱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에게 애교를 떨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의 누님들도(60대 정도로 보이는) 할아버지의 주위에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는데 이리저리 사바세계를 구르느라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원숙한 중년의 여성이라기 보단 영락없이 천진난만한 20대 처녀들 같았다.
난 세월의 흐름을 거부하는 이 신선들의 네버랜드를 깨뜨린 불청객이었다.
“젊은이는 누구예요?”
‘젊은이’라는 칭호가 Germany처럼 낯설다. 어쩌면 두 단어 모두 쓰일 일이 없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별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방 현관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들린다. 속세를 거부하는 절집의 풍경소리처럼 청아한 소리가 적막을 자아냈다.
“여기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마담 선생님(?)은 마치 길을 잃은 초등학생이라도 본 것처럼 ‘아무렴, 커피도 팔고말고요’라더니 ‘무슨 커피 줄까’라며 웃으신다.
“아메리카노…… 아니, 그냥 커피 주세요…….”
프림 넣어줄까, 설탕 넣어줄까 물어보기에 대충 설탕만 넣은 달디 단 다방 커피가 대령됐다. 여기까지 관광 온 학생이냐며, 볼 것도 없는 촌동네라고 하시니 기약 없이 당분간 여기 살아야 하는 나도 뭔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된 듯했다. 옆의 누님이 “여기는 젊은 사람들이 오는 곳 아닌데”라며 깔깔 웃었다. 뭔가 다들 팔짱을 끼고 나를 구경하고, 상호 평등하게 재밌는 구경거리가 된 그런 상태였다.
단 커피를 홀짝거리는 것도 잠시
“중·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대학생이에요?”
“사실, 이 근처에 새로 발령 받은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고, 선생님이셨네.”
“그런데 여기 카드 되나요?”
“호호, 여기는 촌 다방이라 그런 거 없어. 현금으로 줘야 돼요.”
커피 한 잔 마시기 쉽지 않네. 앞으로의 학교생활도 호락호락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