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교과 전담교사를 맡게 되었다. 담임을 맡았던 작년보다는 여유로운 아침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침마다 어학실로 놀러 오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통근시간이 자가 운전으로 한 시간이 넘는지라 지각하지 않기 위해 일찍 출근하는데, 이 아이는 나만큼 일찍 와서 어느새 어학실에 달려와 놀아달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이 녀석은 ‘선생님 의자에 앉으면 안돼요’라고 말하는 내게 ‘아니에요, 돼요’라고 말하며 내 의자를 차지하고는 밀어 달라고 하고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어 의자에서 자기를 밀어내려는 나를 놀이 대상으로 삼았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어학실로 놀러오는 이 녀석 탓에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 아침을 먹는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마산초등학교는 포도밭과 농가뿐인 주변에서 덩그러니 육지의 섬처럼 솟아있다. 주변에는 상가는커녕 민가도 몇 채 없다. 학교 버스가 아니면 도보로 오갈 수 없는 곳이다. 모든 등하교가 학교 버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등하교 지도는 편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학교에 오는 순간 학교 밖으로 놀러 나갈 수 없어 영락없이 갇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여자 아이는 학교 버스보다 한참 먼저 학교에 와 있어 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학실에 올 수밖에 없던 것이다. 교무실 문 앞까지 따라오며 놀아달라고 칭얼거리고, 선생님은 맨날 일 아니면 회의라고 회의는 도대체 언제 끝나냐며 끝나면 반드시 놀아줘야 한다는 성화에 나는 지친 몸으로 소꿉놀이나 몸싸움을 해줘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여자 아이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어학실로 달려와 다람쥐 같은 얼굴로 ‘선생님, 나 전학 가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어학실의 모든 사물이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갑작스런 이별을 맞은 슬픔이라기보다 질주하듯 자라는 아이들과 다 자란 어른의 멈춰선 시간은 완전히 다른 시각 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교사란 무엇이 됐든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학생들에게 전수함으로 학생들의 삶에서 자신의 필요를 제거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존재다. 그래서 결국 교사란 이별을 위한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많이 놀아줘야 한다는 여자 아이를 나는 떼어놓지 못했고, 교무실 문 앞까지 와서 소란스럽게 하는 녀석 때문에 교감 선생님께 교사가 어린 아이와 친구처럼 놀아주느라 통제하지 못해선 안 된다는 꾸지람까지 듣고 말았다. ‘마지막 날이니까 간식 주세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운전도 서툴고 근처에 매점도 없다는 핑계로 나는 제대로 된 간식조차 줄 수가 없었다.
이 아이는 마산초등학교보다 더 넓고 거친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소규모 공동체에서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가족 같은 포근함과는 다른 질서가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익명성과 차가움이 낯선 환경 속에 떨어진 그 녀석을 더 외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마산초는 학생 수가 적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회성을 기르지 못할까 무서워 보내지 않는다는 동네 택시 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강한 아이니까, 무엇이든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성격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지,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 든다. 어쩌면 어학실에서 놀 친구를 기다렸던 것은 나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