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재구성해 성취기준에 맞는 활동 구성
1년에 10권 이상 읽고 여러 종류 글쓰기 체험
인프라 없는 농촌학교 제약… 읽기‧쓰기로 극복
[한국교육신문 김예람 기자] “자유학기제 하면 학력이 저하된다, 놀기만 한다고 걱정하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학력으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감수성, 창의력 등 다른 기준으로 학생들의 발전을 봤으면 좋겠어요. 수업이 조금만 달라져도 아이들이 잠재력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이글이글(異글異글) 클러스터 다양한 글쓰기로 리터러시 능력 키우기’를 연구한 김영희 경북 풍각중 교사는 교직생활 17년 동안 꾸준히 글쓰기 수업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김 교사의 글쓰기 수업은 자유학기제를 만나면서 더욱 날개를 달았다.
4일 오후 2학년 교실. 이날은 핸드폰, 세탁기, 나무젓가락, 화장지 등 우리 삶과 밀접한 물건들이 지구를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다룬 책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를 읽고 협동 설명문을 발표하는 수업이 진행됐다. 학생들은 ‘한국의 멸종위기종’, ‘휴대 전화와 컴퓨터에 들어가는 금속 물질 콜탄에 대해’ 등 팀별로 주제를 정해 2절지에 보기 쉽게 정리하고 문제점, 우리가 할 일 등 맡은 부분을 차례로 발표하고 질문을 받았다.
멸종위기종 보호를 위해 우리가 할 일에 대해 발표한 김지원 양은 “얼마 전 우리나라가 세계최초로 반달가슴곰 인공수정에 성공했다”며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노력은 물론 무분별한 사냥을 금지하고, 생태터널이나 생태다리 조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반달가슴곰의 개체수가 왜 줄어들었는지, 멸종위기종 보호를 위해 한국이 특별히 노력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지 등을 질문하고 활동지에 새롭게 알게 된 점을 써 나갔다.
김 교사는 이런 수업이 학생들을 자발적 참여자로 만든다고 강조했다. 발표를 하기 위해 스스로 교과서를 찾아보고, 궁금한 점이 생기면 질문하고 정리하면서 활발하게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느끼는 효과도 분명했다.
김지원 양은 “얼마 전 자신의 꿈을 시로 쓰는 수업을 했는데 장래희망이 ‘심리치료사’여서 제 자신을 ‘문’에 비유하고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면 기다리다가 힘이 돼 주겠다는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김 양은 “그때 시를 쓰면서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간 느낌이 들었고 애착도 생겼다”며 “교과서에서 정해진 답만 찾는 수업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덧붙였다.
김 교사는 “단순 문자해독 능력을 키우는 것을 넘어 어떤 대상과 주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읽고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클러스터 글쓰기의 목표”라며 “융합, 체험, 독서, 읽기, 말하기 등 모든 것을 ‘글쓰기’라는 주제로 묶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풍각중 학생들은 적어도 1년에 10권의 책을 읽고 다양한 글쓰기를 체험한다. 이를 위해 김 교사는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핵심성취기준에 따른 글쓰기 활동을 구성했다. ‘비유와 상징’ 단원에서는 ‘사진 속 추억에 대한 시 쓰기’, ‘문학과 갈등’ 단원에서는 ‘자신이 겪고 있는 갈등상황을 소설로 바꿔 써보기’와 같이 직접적인 쓰기 활동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은 후에는 등장인물 1명을 정해 얼굴을 그려 가면을 쓰고 팀원들과 인물의 입장이 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을 연극으로 표현해보는 등 듣기와 말하기 활동과도 연계되도록 했다.
김 교사는 클러스터 글쓰기가 학생들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장시키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건의문 작성하기’ 단원에서 학생들이 직접 학교를 돌며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찾고 프로젝트 건의문을 작성하면 필요한 것을 실행으로 옮겼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오래된 사물함이 새것으로 교체되고, 찢어진 축구골대 그물망이 새것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확실한 동기를 느끼게 됐다는 이야기다.
교사가 기대하지 못했던 자발적인 움직임도 나타났다. 봉사활동 제도화에 대해 찬반토론을 한 학생들이 스스로 돈과 쌀을 걷어 인근 고아원으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것이다. 김 교사는 “주입식 수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학생 주도로 벌어지고 있다”며 “수업시간에 아무리 은유법, 직유법이 무엇인지, 1인칭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무엇인지 외우게 하는 것보다 직접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면서 느끼는 것이 더욱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교직 5년차 시절 우연히 문제 학생을 지도하다가 글쓰기의 놀라운 힘을 체험한 이후 글쓰기 수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하던 아이가 역할극 시간에 소품으로 사용된 비비탄 총에 몰래 총알을 채워 장애인 친구에게 마구 쏴 등교정지를 받은 사건이 있었어요. 가해 학생에게 매일 반성문을 받았는데 단순한 반성문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인권이나 장애와 관련된 책을 읽고 피해자 친구의 입장이 돼 일기를 써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반성문에 ‘엄마 나를 왜 이렇게 낳아주셨나요’라는 문장이 쓰여 있더군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던 아이가 피해 친구의 입장이 돼 보니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 거죠. 아이는 ‘미안하다’고 뉘우치며 울었어요. 그 사건을 계기로 ‘쓰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죠.”
그는 매년 진행하고 있는 ‘부모님 자서전 쓰기’ 활동도 효과가 아주 크다고 자부했다. 자서전을 쓰기 위해 부모님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을 물어보면서 가족 간에 대화도 많아지고 부모님과의 관계도 개선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 어머니의 가출로 마음에 상처가 큰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해 세상에 대한 비관이 가득했죠. 그런데 부모님 자서전 쓰기를 하면서 엄마의 입장이 돼본 학생은 여자로서 엄마의 상처를 이해하게 됐어요. 친구의 발표를 듣는 동안 교실은 울음바다가 됐죠. 이후 학생은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졸업 무렵에는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하더군요. 어쩌면 쓰기의 핵심은 자존감 회복, 치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풍각중은 전교생 50명 남짓의 농촌 소규모학교다. 학교 주변에 사교육 시설이 없어 학생들이 의지할 것은 오직 학교수업 뿐이다.
자유학기제가 본격화되면 주변 인프라가 적은 농어촌 학교들은 제약이 많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이에 대해 김 교사는 “자유학기제의 기조가 진로체험 중심에서 최근 교실수업 변화로 옮겨가면서 오히려 장점이 더 커졌다”고 밝혔다. 한 반 인원이 15~20명뿐이어서 토의토론 수업을 진행하면 모든 학생들이 적어도 한 마디씩은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어 심도 있는 수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모든 학생을 김 교사가 가르치다보니 글쓰기 활동도 유기적으로 진행할 수 있고 모든 학생의 포트폴리오를 관리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김 교사는 과정중심의 평가를 보다 간소화했으면 한다고 제언했다. 자기평가, 동료평가 등 모든 수업에서 평가서 작성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때로는 교사도 학생도 평가를 부담스럽게 느낀다는 것이다. 더 많은 교사들이 교실수업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라도 생활기록부 작성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사실 자유학기제를 통해 다양한 체험을 하고, 감수성과 창의성을 한껏 기른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책을 한 권도 못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깝습니다. 수능위주의 대입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변화는 어렵겠죠. 그럼에도 저는 학생들에게 ‘잠재력’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심어줬다고 자부합니다. 대입, 취업, 자녀교육 등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찾아오는 글쓰기가 필요한 순간에 언제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준비가 돼 있을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