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상으로 우수 무렵이면 이미 봄이다. 남녘에서는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복수초를 필두로 매화, 동백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가는 겨울이 아쉬운 이맘때, 장성은 막바지 겨울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장성호와 백암산에서 즐기는 늦겨울
호남고속국도를 탄다. 장성 여행은 광주 조금 못미처 백양사 나들목에서 시작하는 게 여러 모로 편리하다. 지척에 장성의 얼굴인 백암산과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장성호가 손짓하기 때문이다. 장성호는 배색이 잘 된 한 폭의 그림 같다. 늦겨울이 깊숙이 스며든 호수에 오후의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장성호는 붕어, 향어, 초어, 메기, 잉어 같은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장성읍과 북이면, 북하면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다.
요즘 들어 장성호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호수 한쪽을 가로지르는 156m 길이의 ‘옐로우 출렁다리’와 장성호 제방과 북이면 수성리를 잇는 7.5km의 트레킹 코스(수변길)가 입소문을 타면서부터다. 탁 트인 수려한 장성호 수변길은 어른 걸음으로 3시간 정도면 다 밟아볼 수 있는데 ‘대한민국 대표 걷기 길’로 손색이 없다.
장성호를 끼고 백암산으로 들어간다. 백암산은 들머리부터 훤칠한 자태를 뽐낸다. 가히 자연이 빚어놓은 조각품 같다. 매표소에서 백양사까지 이어지는 1.5km의 길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맛이 그만이다. 백양사는 백제시대에 창건한 고찰로 천진암, 청량암, 약사암, 운문암 등 1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경내를 찬찬히 둘러본다. 백암산에 폭 안긴 산사는 고요하다. 대웅전 뒤로 우뚝 솟은 학바위의 자태가 자못 웅장하다. 절집을 둘러싼 여러 문화재도 예사롭지 않고 절 바깥 연못과 누각(쌍계루)의 조화가 참으로 멋스럽다.
쌍계루를 왼쪽에 두고 천진암까지 오르는 길은 비자나무, 단풍나무, 갈참나무, 이팝나무가 우거져 있어 그윽한 맛이 일품이다. 산의 깊은 정기가 온몸을 감싼다. 산기운을 받으며 널찍하게 뚫린 길을 따라 오르노라면 세속에 물든 더러움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몇 번의 심호흡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는다. 청량암을 지나면서 만나게 되는 수천 그루의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3호)에 드니 온몸에 생기가 돋는다.
백암산은 비자나무의 북방한계선으로 촛대봉으로 가는 계곡 주변에 밀집해 있다. 이 비자나무는 고려 때 각진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온다. 약사암을 거쳐 학바위에 오르면 백암산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등산로가 다소 가파르지만 그만한 볼거리를 제공해주니 힘들어도 올라볼 만하다. 백암산의 진면목을 감상하려면 백학봉에서 상왕봉까지 능선을 타야 하는데 험한 바위산이라 등산 장비를 꼭 갖추고 올라가야 한다. 매표소에서 약사암까지는 왕복 3시간 정도 걸린다.
몸과 마음이 즐거운 휴식의 명소
북일면 소재지의 축령산도 백암산만큼이나 이름값을 한다. 산을 가득 덮고 있는 4~50년생 편백나무와 삼나무는 축령산의 얼굴이다. 독림가인 춘원 임종국(1987년 작고) 선생이 평생 일군 전국 최대의 개인 조림지다. 그는 30여 년 동안 축령산 자락 북일면 문암리, 서삼면 모암리 일대 596ha(90만평)에 삼나무, 편백나무, 테다소나무, 리기다소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 80여 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은 장성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축령산은 먼지와 소음에 시달리는 도시민들에게 휴식이라는 선물을 듬뿍 안겨준다. 하늘로 거침없이 치솟은 편백나무와 삼나무는 구불구불 이어진 길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야말로 나무들의 바다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를 물씬 내뿜어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아토피 및 각종 피부병에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중간 중간에 벤치와 쉴만한 공간이 있어 울창한 숲을 벗 삼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평탄하게 이어진 6㎞의 임도(산책로)는 자동차로도 오갈 수 있지만, 이왕이면 삼림욕도 할 겸 천천히 걸어보길 권한다.
휴양림을 관통하는 임도 끝에는 30여 가구 100여 명이 모여 사는 금곡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원래 개발 안 된 오지였으나 축령산이 관광지로 부상하고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되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어버렸다.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고인돌, 연자방아, 당산나무, 초가, 다랑이 논 등은 저 5, 60년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금곡마을은 편백나무 숲길의 출발 지점으로 탐방객들을 위한 민박집도 여러 채 있다.
장성을 빛낸 인물 홍길동과 박수량
축령산에서 15분 거리인 황룡면 아곡마을엔 ‘홍길동 테마파크’가 조성돼 있다. 장성이 홍길동의 고향으로 알려지면서 군(郡)에서 생가를 복원하고 테마파크로 꾸며놓았는데 볼거리가 쏠쏠하다. 홍길동은 소설의 주인공이면서 역사상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홍길동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엔 홍길동 관련 자료(책자, 연구논문, 문학작품 등)가 다수 전시돼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캐릭터화한 상품들도 보이고, ‘4D 영상관’에선 장성군이 제작한 홍길동 애니메이션 ‘홍길동 2084’와 ‘렛츠고 활빈당’을 상시 상영한다. 테마파크 안에 있는 캠핑장과 한옥펜션(청백당)도 인기다. 텐트를 칠 수 있도록 나무데크가 깔려 있고 이동형(고정형) 카라반 20여 대도 갖춰놓았다.(예약 문의: 휴파크 www.hupark.com)
홍길동테마파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박수량 백비(白碑)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아곡 박수량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1514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을 두루 거치며 명예와 재물을 탐하지 않은 청빈한 공직자로 살았다. 선생의 올곧은 성품은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않고 달랑 비만 세워둔 데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오늘날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황희정승, 고불 맹사성과 함께 감사원이 선정한 3인의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서원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올라있는 필암서원(국가 사적 제242호)도 장성 답사에서 꼭 둘러봐야 할 곳이다. 남도를 대표하는 전통서원으로, 호남 지방 유학의 큰 인물인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립교육기관이다. 서원이 대체로 그렇듯 필암서원도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일단 평지에 세워져 편안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서원은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형태)의 모습을 보여준다. 건축물 하나하나에 스민 기교와 배치는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확연루는 필암서원의 정문이자 중심 건축물이다. 수업을 받는 ‘청절당(淸節堂)’, 제향 공간인 ‘사당(우동사)’, 그 뒤로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 ‘서재’와 어우러져 그 가치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청절당에서는 이따금 학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청절당 처마 밑에 걸려있는 ‘필암서원(筆巖書院)’현판은 영조 때의 학자 윤봉구의 친필이라 전한다. 또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현판은 동춘 송준길이, 확연루(廓然樓)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 동쪽에 있는 경장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문서와 인종이 하서에게 하사했다는 묵죽도(墨竹圖), 하서 유묵 등 60여 점의 귀중한 자료가 보관돼 있다. 김인후 선생의 유품을 전시한 전시관도 있다.
필암서원에서 진행하는 선비문화 체험 행사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겠다. 필암서원을 시작으로 관내의 장성향교, 고산서원, 봉암서원을 두루 돌아보는 행사다. 이와는 별도로 3월부터는 서원답사와 함께 장성의 대표 문화유산인 황룡 전적을 비롯해 요월정원림, 박수량 백비 등을 돌아보는 프로그램도 기획돼 있다.
장성 여행은 황룡강변의 요월정 원림에서 마무리하자. 이곳은 조선 명종 때 공조좌랑을 지낸 김경우(1517∼1559)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산수와 풍류를 즐기며 은거하던 곳이다. 정자와 원림의 조화가 빼어나 언제 찾아도 그윽한 정취를 풍긴다. 정자 주변으로 배롱나무들이 옹골차게 가지를 뻗어 운치를 더한다. 이 배롱나무들은 여름에 선홍색 꽃망울을 살포시 터뜨려 황홀한 풍경을 빚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