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책임 강조한 英·佛·獨 시민교육

2019.04.03 13:30:00

올해부터 민주시민의식을 중점적으로 교육하는 '민주시민학교'가 생긴다. 이를 위해 교원들의 민주시민교육 역량을 강화하는 연수를 실시하고 학생들의 자치활동 권한을 늘려 시민 의식을 키운다. 중·장기적으로는 시민교과를 신설하는 방안도 검토된다.

 

교육부는 지난해 12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민주시민교육 활성화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민주시민 활성화 계획은 크게 △학교 민주시민교육 강화 △교원의 전문성 신장과 교육 활동 지원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학교문화 조성 △학생자치 활성화 지원 등이 핵심이다. "주체적인 시민이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서로 상생할 수 있도록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교육"이라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학교는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지적, 정의적 자질과 덕목을 직접 가르침으로써 효과적으로 시민성을 육성하기에 적합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공동체적 시민 생활을 실천하고 참여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려도 만만치 않다. 한국교총은 민주시민교육 활성화를 위한 과목 신설에 반대했다. 민주시민교육의 이념적 편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종전의 '인성교육'이 내용 변화 없이 민주시민교육으로 간판만 바뀐것 아니냐는 낮은 평가를 내놨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 시민교과를 만드는 것은 자칫 학교 정치화와 교육 편향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육현장에서 ‘민주시민학교와 비시민학교’로 나뉘어 차별이 발생하고 학생들에게 권리만 강조, 책임은 외면하게 만들 가능성도 지적했다.

 

이번 호에서는 교육부가 핵심 국정과제로 선택한 민주시민교육의 구체적인 내용과 함께 기대와 우려를 담은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싣는다.

 

시민교육의 필요성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똑똑함을 자랑한다. 세계 올림피아드 등 각종 대회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IT와 문화 등 한류 상품은 세계를 선도한다. 전쟁이 끝나고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놀라운 기적을 이뤘다. 그러나 물질의 풍요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소중한 뭔가를 잊고 살았다. 공동체 안에서 남과 더불어 사는 품성과 역량, 바로 시민성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은 유럽의 나라들과 다르다. 일제 식민의 역사가 청산되기도 전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급속한 근대화로 많은 혼란이 있었다. 1980년대 운동으로서의 민주화가 끝나고 2000년대 이후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정착됐지만 정작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인 시민의 의식과 역량은 그만큼 자라나지 못했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운영자인 시민의 성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제도는 무용지물이다.

 

4차 혁명으로 회자되는 기술문명의 전환 시대에 시민교육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시민교육의 핵심인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행동하는 공적 책임의식과 실행력, 사물과 이슈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이성적 비판능력, 연대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창의성과 협업능력 등은 미래 사회의 핵심역량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시민교육의 방향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참고가 될 만한 외국의 사례를 소개하는데 집중하려고 한다. 각기 서로 다른 문화에서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시민교육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교육의 모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영국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근대 시민의 개념을 발명한 나라다. 우리에게 익숙한 의회민주주의의 전형을 만든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시민교육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중에서도 영국 시민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을 꼽자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노블레스에 걸맞은 품격과 매너, 예의를 존중한다. 마치 영국 첩보원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킹스맨’의 대사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처럼 말이다.

 

영국의 시민교육을 이해하기 위해선 민주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빠르다. ‘마그나 카르타’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발전의 긴 여정은 강력한 왕권으로부터 부르주아의 권리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소위 ‘명예혁명’으로 불리는 영국의 민주주의 발전사는 에드먼드 버크로 대표되는 ‘보수의 정체성’으로 요약된다. 오랜 전통과 문화유산은 “어느 한순간, 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로저 스크러튼,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역사·문화적 배경은 영국의 시민교육 목표를 다소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만들었다. 전통과 유산을 강조하며, 그 안에서 파생된 예절과 매너·관습 등을 중시한다. ‘신사의 나라’라는 별칭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종종 접하는 이튼스쿨과 같은 여러 명문학교들은 규율이 엄격하다. 식사를 하러 가거나 쉬는 시간에도 소란스럽게 이동하지 않으며 교실에선 미리 정해진 자기 책상에만 앉아야 할 정도로 형식적 예의를 강조한다.

 

요약하면 영국의 시민교육은 보수의 교육철학을 강조한다는 관점에서 인성교육의 측면이 강하다. 이 가운데 최근에는 시민교육(civic education)이라는 새로운 교과목이 생기면서 현대 사회에 필요한 시민역량을 키우는 것에도 방점을 찍고 있다. 2002년부터 중등학교(Secondary Schools)에서는 필수 교과로, 초등학교(Primary Schools)에서는 선택교과로 시민교육이 포함됐다.

 

시민교육 교과에서는 법적·인간적 권리와 사회적 책임감, 다양성과 상호존중의 필요성 등을 가르친다. 또 의회제도와 정부 형태, 선거를 통한 참여의 중요성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수업시간에는 토론활동이 주를 이루는데, 특정 정당의 정책과 이념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 모든 밑바탕에는 상호존중과 배려, 매너와 예의 등이 깔려 있다.

 

영국의 시민교육에서 특별한 점 한 가지는 지역사회·지방정부가 주축이 돼 2000년대 초부터 전 국민 대상으로 시민의식을 조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원봉사 경험, 지역 이슈에 대한 참여 등 광범위한 의식조사를 통해 시민의식을 진단하고 이를 높이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는데 반영한다.

 

‘자유와 주체성’ 프랑스

영국과 함께 시민이란 개념을 발명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또 다른 나라는 프랑스다. 하지만 프랑스의 민주주의 발전과정은 영국과는 사뭇 다르다. 오랜 시간 점진적 개선을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혁명을 통해 급진적으로 세상을 통째로 바꾸려는 시도가 많았다. 즉, 영국을 보수정치의 원조라고 부를 수 있다면, 프랑스는 진보정치의 요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점진적 개선을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민주주의 시계를 한 번에 앞당겼다. 그 안에는 무엇보다 자유의 정신이 깊게 배어 있다. 신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예술의 자유 등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프랑스혁명의 제1 정신이었다. 이런 전통 아래 프랑스는 다양한 개성을 인정받고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문화가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시민들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황제정치 등을 겪으며 내란과 혁명을 수없이 겪었다. 그러면서 지식인들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확실히 뿌리내림으로써 구체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막는 것으로 수렴됐다. 그 방식은 바로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프랑스는 아주 이른 시기인 1882년 초등교과에 ‘시민·도덕교육’이 생겼다. 민주주의의 원리, 자유의 개념, 다양성의 철학 등을 가르치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이 교과는 1960년대 이후 잠시 사라졌다. ‘금하는 것을 금하노라’와 같은 6·8 운동의 물결 속에서 시민교육 또한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도구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역시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나라다운 결정이었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학교폭력과 왕따 등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자 1985년 다시 정식 교과목으로 편입됐다.

 

프랑스 시민교육 교과서는 공화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질문과 토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구성돼 있다. 자유·연대·인권·노동·공동선 등이 주요 가치다. ‘시민교육’ 시간엔 역사적 사건과 다양한 사회 이슈를 놓고 토론한다. 교과서도 구체적인 사례와 사진·그래픽 등이 많고 각 주제마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질문들이 제시돼 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3학년이 배우는 ‘시민교육’ 교과서 ‘자유’ 단원에는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그림이 제시돼 있다. 그 밑에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인물의 행동을 찾고 무엇이 잘못인지 생각하도록 했다. 교실에서 떠들거나 놀이터에서 놀이기구를 독점하는 등 구체적 상황을 그림으로 제시하고 자연스러운 토론을 유도하는 교육 방식이다. 초·중학교에서는 ‘시민교육(Education Civique)’으로, 고등학교에서는 ‘시민·법률·사회교육(Education Civique Juridique & Sociale)’으로 불린다.

 

 

‘깨어 있는 시민’ 독일

영국·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민주주의를 수입한 나라다. 스스로 시민의 개념을 발명하고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이식받은 한국과 비슷하다. 독일에선 시민교육을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로 히틀러 때문이다.

 

히틀러는 총통이 됐을 때 90%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권력을 잡은 방식이다. ‘선거’라는 매우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 우리가 민주주의 꽃이라고 말하는 선거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고 독일 국민은 그로 인해 막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이런 반성의 의미에서 독일은 전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깊었다.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까”라는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정치교육이다. 깨어 있는 시민을 만드는 교육, 그것을 민주주의 핵심과제라고 봤다. 그런 고민 끝에 독일에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시민교육을 국가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이끌어 가기로 했다.

 

정치교육은 1976년 제정된 ‘보이텔스바흐 합의’(Beutelsbacher Konsens)의 원칙 아래 진행된다. 그 내용은 △교화나 주입식 교육을 금지한다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서도 역시 논쟁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학생은 어떤 정치적 상황과 그 자신의 이익이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있고 또한 그에 따라 당면한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교육의 핵심목표는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Unvoreingenommen’이란 단어로 압축된다.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교 졸업 때까지 정치교육을 의무로 하고 있다. 과목명에 ‘정치’가 들어가는 이유는 ‘시민이야말로 정치의 주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핵심은 엘리트의 통치가 아니라 능동적 시민들의 ‘협치’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독일이 추구하는 가치, 자유민주주의와 정치질서·인간의 존엄성·개인적 자유 등을 구체적으로 학습한다. 또 독일 시민교육의 큰 특징은 ‘평생교육’ 형식으로 꾸준히 이뤄진다는 점이다. 학교 밖에서는 연방정치교육센터(Bundeszentrale fur politische Bildung)와 지방정치교육센터(Landeszentrale fur politische Bildung), 시민대학(Volkshochschule) 등을 통해 정치교육이 이뤄진다.

 

독일의 이 같은 시민교육은 90년대 이전까지는 깨어 있는 시민을 만드는 교육으로, 90년대 이후에는 통일 독일의 출범과 함께 다문화와 다원성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성격이 변화했다. 2015년 난민 사태 때 독일 시민들이 난민의 유입을 감정적으로는 꺼려하면서도 정책적으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며 메르켈 총리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도 이 같은 오랜 시민교육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윤석만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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