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교사를 위한 변론,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2019.11.05 10:30:00

‘386세대’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전후다. 당시 누군가 재미삼아 컴퓨터 등급을 가리키던 386에 빗대 만든 말이 언론을 타고, 일상어가 되고 말았다. 이들은 어느덧 우리 사회 주류를 형성하고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586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넥타이부대로 되 된 변혁의 상징은 이제 변혁의 대상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기는 모양새다. 불꽃같던 정열은 어느덧 희미해져가고 얼음처럼 차가웠던 이성은 세월의 온도를 이기지 못한다.

 

교육계의 586은 고단하다. 5.31 교육개혁이후 숱한 교육정책의 변화과 정년단축, 연금대란, 명퇴열품, 교권 추락, 학교붕괴 등 숨돌릴 틈 없이 보내왔다.

 

한국 현대 교육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하지만 어느덧 꼰대와 아재라는 소리에 익숙해져 가고 학생들은 물론 후배 교사들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나마 교장, 교감이나 장학관 등 관리직으로 진출한 경우는 사정이 좀 나은편. 조직의 리더로서 아직은 역할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겉으론 견고해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도전과 시련을 ‘짬밥’과 ‘눈치’로 버텨내기는 마찬가지다.

 

386에서 586으로 버전이 높아진 50대. 2019년 그들이 겪고 있는 교단의 현실은 어떨까. 이번 호에서는 90년대 교단에 들어와 격동의 한국교육을 온몸으로 받아낸 50대 교사들의 삶과 고민을 생각해본다. 민주화와 함께 교육개혁의 주체가 돼, 누구보다 뜨거웠던 586. 한국교육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나이주의’라는 벽을 넘어 끊임없이 도전하는 ‘586 교사들’을 조명해 본다.

 

시월의 어느 토요일, 서울시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수석교사와 함께 하는 중등 수업 나눔 한마당’에 교사 250여 명이 참가했다. 수업에 대한 나눔과 대화가 이루어진 이 날 행사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했는데, 단연 50대 교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젊음과 패기의 상징이었던 386이 어느덧 중년에 이르러 다양한 책임을 요구받는 586이 되었다. 적게는 20여 년, 많게는 30여 년을 교직에 몸담아온 지금의 586 교사들은 달라진 학교 환경과 교육 여건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청바지는 안 돼요.”

처음 교직에 들어선 것은 민주화 열기가 후끈하던 1989년, 서울의 여자중학교였다. 발령 첫날, 7명의 초임교사가 나란히 교장실로 들어갔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 교장선생님께서는 ‘교사다운 옷차림’을 당부하셨다. 청바지 착용과 장신구 패용을 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만일 똑같은 말을 지금의 초임교사들이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는 그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 교장선생님께서 재직하신 동안 당부하신 내용을 잘 지켰다. 하지만 지금은 50대인 나도 청바지를 자유롭게 입는다. 여름이면 민소매를 입은 교사를 학교에서 만나는 일도 흔하게 되었다. 어느 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출근하신 젊은 선생님을 보면서 ‘너무 짧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뜨끔했다. “나도 어느새 꼰대가 됐나.”

 

독서하는 교무실에서 모니터 작업장으로

교무실에서는 20대부터 40대 교사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근무했다. 그리고 ‘하늘 같은’ 부장선생님들이 계셨다. 부장님들은 독서를 정말 많이 하셨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손에 책을 잡고 계셨다. 그때 생각했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읽고 싶은 책 마음껏 읽어봐야지.”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부장이 된 나에게 학교에서 차분한 독서란 언감생심이다. 공문 처리하랴, 원격 연수 들으랴, 한 순간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그 옛날 선배 교사들이 차 한 잔 놓고 도란도란 말씀 나누던 모습은 이제 희미한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그때는 기획이라서? 지금은 부장이라도!

4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때 학교에서 기획이 되었다. 기획의 역할은 부장을 도와 부서 업무를 중심적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전자결재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에는 결재판을 들고 일일이 부장·교감·교장선생님을 차례대로 만났다. 기안 내용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수정·보완 지시를 듣고 고쳐가면서 직접 날인을 받았다. 내 수업하랴, 학생 상담하랴, 청소 지도에 종례를 하다 보면 어떤 때는 결재 받는 일이 하루 이틀로도 부족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이스가 도입되었을 때에 정말 기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수년 전부터 시작된 학교 업무정상화는 부장에게 더 많은 짐을 얹어주었다. 돌이켜보면 과거 기획이던 시절에는 일벌레로 살았고, 지금은 부장이 되어서도 자기 몫은 하고 살라고 요구받고 있다. 당연하지만 가끔은 억울하다.

 

성과상여금의 비애

동료 50대 남자 부장교사는 얼마 전 성과상여금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해 우리 학교에선 1년 차 신참 교사가 최고 등급을 받았다. 반면 그 부장교사는 가장 낮은 등급을 받았다. 이 때문에 초라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했다. 부장교사 푸대접은 내 주변만의 일이 아니다. 대체로 부장교사들은 수업시수가 적다 보니 성과급에서 불리한 경우가 있다. 성과급 정량평가는 대체로 4가지 영역 즉, 학습지도·생활지도·전문성계발·담당업무가 기준이 된다. 이들 영역 간의 중요도와 배점에서 수업시수와 담임 부분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고릿적 시절 이야기라 힐난할지 모르지만, 지금 50대는 정말 죽자 살자 일했다. 담임 업무에 수업까지 주당 22~23시간을 거뜬히 해냈고, 게다가 동아리활동까지 꽉 채워서 한 주를 보내곤 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성과상여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젊으니까 군소리 없이 궂은일을 도맡아야 했고 수업과 업무에 치이는 게 일상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이제는 억울해도 참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교육계는 연구 중, 50대는 혁신 중

공교육에서의 수업방법 개선과 과정중심 평가에 대한 요구가 극명해진 것은 모든 교사의 당면 과제이면서 50대 교사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고 있다. 필자 역시 수업방법 개선을 위해 질문이 있는 교실, 거꾸로 교실, 토의토론 학습, 프로젝트 학습 등에 대한 각종 연수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수차례 반복해서 들었다. 덕분에 다양한 학생중심 활동수업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과정중심평가가 화두로 떠올랐다. 자유학년제를 실시하면서 과정중심평가의 필요성에 공감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교한 기술을 배우고 적용해야하는 또 다른 시간과 노력을 요구받고 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지금 50대 교사들의 교직생활은 늘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예컨대 각종 연수의 흐름만 봐도 그렇다. 90년대부터 학교업무에 컴퓨터 보급이 확대되면서 지금의 50대 교사들은 컴퓨터 활용능력을 익히느라 분주했다. 이어 워드자격증을 따고 엑셀 연수를 신청해서 들으며 학교 업무를 해냈다. ICT 기반 수업이 확대되었을 때에도 50대는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게다가 50대 교사가 중심이 되는 수석교사단의 수업나눔과 교과 멘토링 활동을 보면 50대의 경험과 능력이 교육의 큰 원동력이 되었음을 자신한다.

 

50대 교사, 그들만의 고민은

인생은 반환점을 돌았고 교직생활은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하지만 여유보다는 걱정이 많은 것도 사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안간힘으로 버텨낸다.

 

대부분 50대 교사들은 부모님의 도움 없이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교사의 꿈을 이뤘다.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며 열정과 사명감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은 연로한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자녀들의 독립도 지원해야 한다.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학교에서는 어떨까? 승진에 대한 고민, 부장 역할에 대한 갈등, 젊은 교사들과의 가치 충돌, 학생들과의 세대차이 등을 겪으며 자신의 진로를 고민한다. 나이 든 교사에 대한 젊은 학부모들의 불평도 들어야 하고, 어린 학생들과의 언어문화 차이로 불필요한 오해와 비판을 받기도 한다. 분명 나이가 들수록 교사로서 더 나아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세태는 그들을 몰라준다.

 

그래도 젊음이 물러난 자리에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들어온다는 말처럼 학생들을 더 넓게 이해하고 더 많이 아껴줄 물리적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것은 50대만의 보너스다.

 

상아탑에 머물 것인가, 거리로 나갈 것인가 고뇌하던 대학 시절을 뒤로하고 80년 후반에 새로운 교육의 패러다임을 주장하고 실천하며 단결력을 보였던 386 세대 교사들, 그들은 중년의 위치에 서서 편안하고 안정적인 50대를 꿈꾸었던 과거를 기억한다. 하지만 현실을 여전히 치열하다. 현직에서 그들은 미래사회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한다. 수업에 대한 자기 성찰과 연구, 그리고 변화된 학교환경에 적응하고자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주저할 겨를이 없는 바쁜 50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상희 서울동원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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