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일찍이 독립운동에 눈떠
최초의 여기자로 기층 민중의 고단한 현실 발굴
‘여학교 교장은 여자로’ 신념… 女權 신장에 앞장
해방 이후 독립운동·근대여성 역사 기록으로 남겨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최은희는 1904년 황해도 백천에서 ‘백 간이 훨씬 넘는 고대광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말을 빌면 “개화에 앞장선 혁명가요, 풍운아”인 아버지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향리에 3개의 학교를 세울 만큼 개화를 받아들인 선각자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시기의 다른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어린 시절에 ‘총각’으로 불렸다. 고향인 창동(彰東)소학교 여학교에 입학하면서 출생지인 은천면(銀川面)의 이름을 따서 은희(銀姬)라는 이름을 비로소 얻었지만, 학교에서 다시 은희(恩喜)로 고쳐줘 이것이 평생의 이름이 됐다.
이처럼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배제와 차별은 그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집안의 족보를 본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를 알아차린 아버지는 오빠들에게나 읽힐 책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좌절을 안겼다. 나중에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여름방학에 집으로 온 그녀에게 아버지는 집안의 가보로 내려온 옥돌 도장함을 준다.
“가문을 지키지 못할 딸이지만, 네 동생은 아직 어리고…”라며 말끝을 흐리는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의 아버님 흉중을 헤아릴 길이 없다”고 말한다. 어리고 병약한 그의 남동생은 17세의 나이로 조사(早死)했지만, 집안을 이을 후손의 앞날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딸에게 가보를 물려주는 아버지에게서는 스러져가는 가부장제의 쓸쓸한 잔영이 배어난다. 아버지의 이러한 회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그녀는 자서전에서 부계인 ‘탐진 최 씨의 상조(上祖)들’을 여러 장에 걸쳐 상세하게 적어 뒀다.
최은희는 자신의 학생 시절은 “소녀다운 기분도 없었고 낭만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저 열심으로 공부하고 우리의 힘을 모사 유사지추(有事之秋)에는 국권 회복을 조금이라도 돕겠다는 결심 뿐”이었다는 것이다. 1980년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하면서 그녀는 “나는 지금 생각해도 내가 공부를 하려 학교를 다녔는지 배일 운동을 하러 학교를 다녔는지 분간할 수 없다”고 적었다. 실제로 그는 1919년의 3·1운동에서 다니던 경성여고보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구한말 관립 한성여학교의 후신으로서 경성여고보는 식민지 여성 교육 전범으로서의 중요성을 지닌 만큼이나 이 학교에서 만세 시위는 일제의 여성 교육을 부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1917년부터 최은희는 당시 기독교 중앙감리교 전도사이자 나중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와 연락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강연회와 좌담회 등에 참석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28일 최은희는 박희도에게서 3·1 독립선언서 한 장을 전달받고 내일 정오에 전체 학생들과 탑골공원으로 나오라는 말을 듣는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결사대원들과 함께 선언서를 펼쳐 본 최은희는 “우리가 갈망하던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서로 손들을 붙잡고 감격과 흥분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고 술회한다.
학교에 의해 잠긴 기숙사 문을 강제로 부수고 만세 시위에 참여해 경복궁을 향해 가는 시위 도중 흰 두루마기에 학교 모자를 쓴 제일고보 남학생이 권련을 빨면서 지켜보는 모습을 본 그녀는 그대로 뛰어올라 보기 좋게 뺨을 갈겼고, 불의의 습격을 당한 그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남학생들이 달려들어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엎어 놓고 때려줬다. 당시 졸업반이었던 그녀는 졸업 증서를 주려는 교장에게 마룻바닥에 침을 뱉고 돌아서며 일본 연호를 쓴 졸업장 따위는 받지 않아도 좋다고 교장실을 뛰쳐나올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하고 기개가 있는 여성이었다. 석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만세 시위에 참가해 징역 6개월에 2년의 집행유예를 받아 출감했다. 특별 복권된 이후 도쿄 유학을 가서도 최은희는 학교의 특별 행사나 학급 회합에서 자랑스럽게 한복을 입고 다녔다.
도쿄의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에서 공부하던 그녀는 1924년 여름방학에 귀국했다가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 여기자로 조선일보에서 일하게 된다. 서울에서 이광수를 방문한 그녀는 그의 부인인 의사 허영숙(許英肅)이 황금정(지금의 롯데호텔 부근)에 사는 부호의 집에 왕진한 이야기를 듣는다. 노산으로 산고를 겪은 부호의 부인이 무사히 해산했는데도 왕진료가 비싸다는 이유로 지급을 미루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최은희는 자신이 해결해 보겠노라고 나서서 이튿날 그 집에서 온종일 버틴 끝에 마침내 왕진료를 받아내고 말았다. 요즘 언론계 말로 하자면 이른바 ‘뻗치기’를 한 것이다.
그녀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계기는 이 일에서 비롯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상재 사장, 안재홍 등이 주필이 돼 대대적 개혁을 하고 있었는데 부인 기자의 등용도 그 하나였다. 그러나 여자들이 쓰개치마를 벗지 못하고 길에서 남자와 마주치면 길옆으로 비켜주던 시대에 “활발하고 담대하고 기민하고 글줄이나 쓸 줄 아는 젊은 여성” 기자를 구하지 못하던 차에 이 일을 계기로 이광수가 추천을 한 것이다. 당시의 여기자로서는 가장 오랜 기간인 8년을 재직하면서 그녀는 정치부, 사회부, 학예부를 거쳐 학예부장까지 역임함으로써 전문직 직업여성으로서의 선구 역할을 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부인견학단을 조직해 공장과 감옥, 학교 등을 견학하고 현상 변장 탐방 기자를 하는가 하면 기근 구제 여류 음악회를 주최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민간 신문 최초로 ‘가정란’을 3면에 신설하고 ‘첫 길에 앞장선 이들’을 찾아 26회에 걸쳐 연재하는 등 서울의 구석구석을 무대로 생생한 기사를 발굴, 보도해 가정 부인에게 유용한 상식과 여성의 위상, 여권신장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가 하면 무선전화 공개 시험 방송에서 아나운서를 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비행하는 이채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1925년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 때에는 각 사회단체와 부인단체, 각 권번의 기생들로 부인구호반을 조직해 왕십리에서 아흐레 동안 주먹밥을 먹고 구내 벤치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구호 활동에 주력했다. 서울의 빈민굴이나 아편굴, 유곽이나 대구의 창녀굴과 같이 식민 지배의 최저변에 위치한 기층 민중의 고난과 비참한 현실을 발굴해 이를 일반에 널리 알리고자 했다. 자서전에서 적었듯이 삼천리강산을 무대로 고달픈 줄도 모르고 타고난 정열을 발휘한 것이다.
1927년에는 근우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창립과 함께 서기와 중앙집행위원·재무부장을 역임하면서 4년 동안 일했다. 1930년 근우회가 해체된 이후에는 별다른 단체 활동을 하지 않고 결혼한 이후 1932년 병으로 신문사에서 퇴임했다.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 14년 동안 그녀는 가정에 전념하고 사회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일제 말 전시 동원의 협력과 친일의 시련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 대부분의 지식인 여성과는 달리 해방 이후 친일파 문제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했다.
해방 이후 그녀는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데, 크게 보아 이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여성의 권리 향상과 남녀평등을 위한 운동이고 두 번째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활동, 마지막으로 국방 후원을 위한 캠페인의 조직이다. 대한부인회와 대한국방부녀회, 그리고 여자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마지막의 활동은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앞의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 보면, 첫 번째의 영역에서 그녀의 활동은 교육계에서 시작됐다.
입으로만 여권을 부르짖지 말고 쟁취할 각오로 일해야 한다는 지론에서 그녀는 “여학교 교장은 여자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의자 점령하기 운동을 조직했다. 특수 사립학교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초등학교나 여학교에서 여자 교장을 채용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여권실천운동자클럽을 조직해 세 명의 관립 여자 교장(여자사범학교의 손정규, 무학여고의 차사백, 경기여고의 고황경)을 탄생시키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6년 8월에는 클럽의 추천과 교섭으로 최초의 공립초 여교장으로 교동초 교사 오정화가 삼청초 교장으로 임명됐다. 나아가서 그녀는 여성의 입각운동이나 여성군수 임명을 청원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4·19 이후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조선일보에 기고한 ‘부인시론’을 통해 그녀는 “깡패 기질이 농후한 남자 중·고등학교 교장”에 대신해 여자 교장을 임명하고, 애국애족에 불타는 숨은 여성 인재를 대폭 등용하라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는 어머니날을 제정하기 위한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바쁘고 고달픈 어머니들이 다만 하루라도 모든 시름 다 잊어버리고 활짝 웃는 얼굴로 유쾌한 날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피난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백과사전을 참조해 가며 1952년 대한부인회에서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했다. 1955년 이승만에 의해 관제화 되면서 어버이날이 되자 그녀는 “독특한 어머니의 공과 덕과 은혜를 감사하기 위한 날을 관에서는 무슨 의미로 아버지를 끌어들여 어버이날 또는 가정의 날이라 하여(…)술에 물 탄이 물에 술 탄이 처럼 싱겁고 향기 없고 절실함이 없는 뒤범벅 개떡을 만들어 놓았다”고 개탄했다.
1950년대 후반 이후에는 독립운동의 역사와 기억의 보존을 위한 활동을 주도했다. 1958년 3·1절 기념행사의 하나로 정부 공보실이 주관한 3·1운동 사건 사료 공모에 응모해 당선된 원고를 ‘근역(槿域)의 방향(芳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각 학교에 배포해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르치는가 하면 1967년에 들어와서는 서울 시내에 3·1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나머지 생애에서 무엇을 조국에 바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그녀는 “망각 속에 사그라져 가는 그날의 분노와 저항을 되새기고 그날을 기려 정의와 조국, 자유와 독립의 상징인 민족의 날로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독립공원의 조성”을 제안했다. 3·1운동 기억의 장소 조성은 그녀가 많은 애정을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이었지만, 구체화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그녀는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과 한국근대여성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70 노년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10년에 걸친 각고 끝에 전3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1979년에 출간한 ‘조국을 찾기까지’가 그것이다. 1984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용인공원묘지에 묻힌 그녀의 묘비에는 1984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의 ‘횡설수설’과 이튿날 자 조선일보 ‘만물상’이 새겨져 있는데, 전자의 칼럼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이기도 했던 최여사는 단순한 기자에 그치지 않고 20세기의 우리 사회를 폭넓고 치열하게 살다간, 우리나라 여성의 ‘불꽃’과 같은 상징적인 존재”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