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의 세상 읽기 ⑰]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2019.12.16 10:13:59

연말, 추운 겨울이다. 날이 차다. 바쁠 때이다. 집보다는 밖에 있는 시간이 많다. 평일에도 늦고 주말에도 모임에 나갈 때가 종종 있다. 6살 아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적어 아쉽기도 한 때이다. 작년 겨울에 아들과 둘이서 갔던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과 추사박물관이 생각난다.

 

작년 이맘때, 모처럼 주말의 휴일 어느 날, 5살 아들과 둘이서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면 아이 엄마가 집안 정리를 하는 데 편리하다고 했다. 아이 엄마는 며칠 전부터 생각한 아이 방의 배치를 바꿀 심산이었다. 일종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런데 집 밖은 날이 차고 미세먼지 농도가 높다. 어디로 갈까.

 

봄가을에 자주 가던 집 근처 공원에서 장시간 아이와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실내놀이 시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에는 비싸고 둘만 가기에는 마땅치가 않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과천의 과지초당과 추사박물관이었다. 과지초당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말년을 보낸 유적지이고, 추사박물관은 과천시에서 2013년 6월에 개관한 현대식 박물관이다. 

 

추사박물관은 실내 공간이고 따뜻한 곳이었다. 입장료는 아주 저렴했고, 일요일의 방문객은 거의 없었다. 단체 방문객이 없었던 날이라 1층과 2층의 넓은 전시 공간에 아들과 나 둘뿐이었다. 아들과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그날만큼은 우리 둘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 같았다. 

 

아들과 나는 여러 가지 둘만의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전시된 글씨와 해설 책자 글씨 읽기 놀이. 5살 생일을 지나면서 아들은 글자에 흥미가 생겼고 조금 깨치기 시작했다. 학예사처럼 그림 설명하는 역할 놀이. 아무렇게나 재미나게 하나씩 말하는 놀이였다. 아이는 재잘거리길 좋아하는 나이이다. 

 

지하 1층에는 내가 좋아하는 ‘세한도(歲寒圖)’의 탁본 체험 공간이 있었다. 실습 안내 직원의 설명에 따라, 우리는 먹물을 이용해 화선지에 탁본을 했다. 그리고 추사의 인장 모형 중에서 하나 골라서 낙관 찍는 놀이도 했다. 한나절을 미세먼지 없고 따뜻한 곳에서 아들과 잘 보냈다. 그 사이 아내는 기획한 집안일을 마쳤다. 

 

오후 늦게 아이 엄마와 만난 우리는 인근에서 칼국수를 사 먹고 집으로 갔다. 이만하면 추운 겨울날 미세먼지 농도 아주 높을 때 아들과 둘이서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임무를 무난히 완수한 셈이다. 아내는 나를 보고 엉뚱하고 기발하다고 했다.

 

올해 여름과 가을에 두어 번, 아들과 나는 다시 과지초당과 추사박물관을 갔다. 미세먼지가 없는 깨끗한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추사박물관보다 과지초당이 놀기 좋았다. 초당의 마루에 앉으니 시원하고 마당에 추사가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의 풍경도 좋았다. 아들과 나는 부채로 바람 내기 놀이도 하고, 또 글자를 찾아 읽고 그리는 놀이를 했다. 

 

과지초당의 주련(柱聯) 중 두 곳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요,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네.” 아들은 한글이든 한자이든 대하는 태도가 비슷하다. 이미지로 보고 따라 그린다. 주련에 적힌 글씨들은 추사가 생의 마지막 해인 1856년(철종 7년) 71세에 쓴 예서대련(隸書對聯)의 작품 글귀였다. 

 

예서대련 원본 작품은 지금 ‘간송미술관’에 있다. 원본을 찾아보았다. 예서대련에는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한 말(斗)만큼 큰 황금 인장을 차고, 밥상이 사방 한 길이나 차려지고, 시첩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직 삶이 한창인 필자에게 또 한 번 큰 가르침을 주는 추사의 글씨였다. 간소한 식단을 차려 놓고 아내와 아들딸, 손자와 함께 마주하고 있는 밥상 모임이 촌로의 추사에게는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아! 그렇다. 허리춤에 메주 덩어리만큼 큰 직인을 차고, 수십 명이 도열한 연말 모임에 가서, 그 메주 같은 직인을 서로 흔들어 보인들 무엇이 즐거울까.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며칠 전에 아들에게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일, 딸기를 사서 집에 가야겠다. 

동서울대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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