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서 피는 꽃, 복수초

2020.02.05 10:30:00

 

소설가 박완서는 나이 67세인 1998년부터 2011년 별세할 때까지 구리 아치울마을 노란집에 살았다. 1980년부터 오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집과 비슷한 집을 짓고 말년을 보낸 것이다.

이 집 마당엔 꽃이 많이 피고 졌는데, 작가는 지인들에게 “우리 집 마당에 백 가지도 넘는 꽃이 핀다”고 자랑했다. ‘복수초 다음으로 피어날 민들레나 제비꽃, 할미꽃까지 다 합친 수효’였고, ‘흐드러지게 피는 목련부터 눈에 띄지도 않는 돌나물꽃까지를 합쳐서 그렇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그 개수를 다 셀 수 있었을까. 작가는 “그것들은 차례로 오고, 나는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꽃들이 피었을까. 작가의 산문집 <호미> 중에서 ‘꽃 출석부 1’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아마 3월이 되자마자였을 것이다. 샛노란 꽃 두 송이가 땅에 닿게 피어 있었다. 하도 키가 작아서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그러나 빛깔은 진한 황금색이어서 아직 아무것도 싹트지 않은 황량한 마당에 몹시 생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곧 큰 눈이 왔다. 아무리 눈 속에서도 피는 꽃이라고 알려져 있어도 그 작은 키로 견디기엔 너무 많은 눈이었다. (중략) 놀랍게도 제일 먼저 녹은 데가 복수초 언저리였다. 고 작은 풀꽃의 머리칼 같은 뿌리가 땅속 어드메서 따뜻한 지열을 길어 올렸기에 복수초는 그 두터운 눈을 녹이고 더욱 샛노랗게 더욱 싱싱하게 해를 보고 있었다.

 

복수초는 작가의 마당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꽃소식을 전하는 꽃이다. 해마다 2월 중순쯤 신문에 복수초가 눈을 뚫고 핀 사진이 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남해안이나 제주도에서는 엄동설한인 1월에도 복수초가 피기 시작해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월 이미 페이스북 등에는 막 피기 시작하는 복수초 사진이 올라오고 있다.

 

박완서 작가는 황금색 이 꽃을 중학생 아들의 교복 단추에 비유했다. ‘꽃 출석부 2’에서 저만치 샛노랗게 빛나는 복수초를 보고 “순간 (중학생 아들의) 교복 단추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작가 8주기를 맞아 29명의 후배 작가가 쓴 콩트 모음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에서 김숨은 “눈 속에서 노란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복수초를 알려주신 보름달보다 환히 웃으시던 박완서 선생님”이라고 썼다.

 

중학생 아들 교복 단추를 닮은 노란 복수초

나에게 ‘복수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남 여수 향일암 부근에서 피는 복수초다. 해마다 2월 중순쯤이면 야생화 모임에 번개모임 공지가 뜬다. 여수 향일암으로 변산바람꽃 보러 가자는 내용이다. 향일암 조금 못 가서 다래 덩굴을 치우며 자갈밭 샛길을 좀 오르면 낙엽 사이로 하얀 꽃 무리가 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연두색 암술, 연한 보라색 수술에다 초록색 깔때기처럼 생긴 기관이 꽃술 주변을 빙 둘러싼 변산바람꽃이다. 곳곳에 두세 송이씩 널려 있고, 십여 송이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곳도 있다. 이곳은 육지에선 가장 먼저 변산바람꽃이 피는 곳이다. 꽃다운 꽃과는 첫 만남이라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변산바람꽃과 세트로 등장하는 꽃이 복수초다. 향일암 일대에서도 유난히 크고 선명한 복수초가 있다. 차를 타고 성두리 쪽으로 가다 해변 조금 못 미쳐서 차를 세우고, 숲길을 따라 2~3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햇빛이 비치면 마치 어두운 숲속에 등잔을 켜놓은 것처럼 환하다. 이 복수초 무리를 보면 왜 복수초를 황금잔에 비유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박완서가 묘사한 장면, 그러니까 눈을 뚫고 피는 복수초는 야생화 마니아들이 꼭 한번 사진에 담고 싶은 장면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지적처럼, 정확히 표현하면 ‘눈 속에 핀 복수초’가 아니라 ‘꽃 핀 복수초 위로 내린 눈’을 담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것은 복수초가 열을 발생시켜 눈을 녹이기 때문이다. 실제 활짝 핀 복수초꽃 안의 온도는 바로 옆 50cm 떨어진 곳보다 7도 이상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복수초는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20~30장 정도 꽃잎 사이에는 노란색 수술이 가득하고, 그 수술 속에 도깨비방망이처럼 돌기가 난 연둣빛 암술이 자리 잡고 있다. 미처 봄이 오기도 전에 꽃망울을 땅 위로 올리지만, 6~7월 결실을 맺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꽃이다.

 

복수초는 개명(改名)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꽃이다. 복수초는 한자로 복 복(福) 자에 목숨 수(壽) 자 즉, 복을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새해에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선물로 복수초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새해를 시작할 때(설날) 피는 꽃이라고 원단화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복수가 복과 장수보다는 앙갚음한다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고 일본 이름을 베낀 것이니 우리 고유의 이름인 ‘얼음새꽃’이나 ‘눈색이꽃’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많다. 각각 얼음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 눈을 녹이며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새해마다 복수초를 보고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든, 한해의 으뜸으로 보든, 눈 속에서 뚫고 나오는 기상을 살피든 그 문화의 뿌리는 일본인데, 이름만 한글식으로 바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북한은 복수초를 ‘복풀’이라고 부른다.

 

 

하늘을 향해 한 송이씩 피어나는 노루귀

복수초와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 노루귀다. 박완서의 같은 책 중 ‘꽃 출석부 2’에 나오는 글이다.

 

복수초를 반기고 나서 역시 작은 봄꽃들이 있던 자리를 살펴보니 노루귀가 희미한 분홍색으로 피어 있다. 그 조그만 것들이 어쩌면 그렇게 순서를 잘 지키는지 모르겠다. 그 작고 미미한 것들이 땅속으로부터 지상으로 길을 내자 사방 군데서 아우성치듯 푸른 것들이 돋아나고 있다. 작은 것들은 위에서 내려앉은 것처럼 사뿐히 돋아나지만 큰 잎들은 제법 고투의 흔적이 보인다.

 

노루귀는 초봄 야생화의 대명사인데 어떻게 박완서 작가 집 마당까지 진출했는지 궁금하다. 숲속에서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 여러해살이풀이다. 3~4월 잎이 나기 전에 먼저 꽃줄기가 올라와 끝마다 앙증맞은 꽃이 한 송이씩 하늘을 향해 핀다. 꽃 색은 흰색·분홍색·보라색 등이다. 귀여운 이름은 깔때기처럼 말려서 나오는 잎 모양, 꽃싸개잎과 줄기에 털이 많이 난 모양이 꼭 노루의 귀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작가가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노루귀가 찾아간 것일까. 작가의 맏딸 호원숙씨는 “엄마는 꽃을 좋아하셔서 마당의 꽃 가꾸기에 정성과 시간을 쏟으셨다”며 “꽃이 피었을 때 엄마가 가장 그립다”고 말했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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