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단종의 슬픔을 품다

2020.04.01 11:09:40

장릉, 단종의 능 사적 제196호

영월에 간다. 장릉에 가 보고 싶었다. 수도권에 있는 왕릉은 그럭저럭 다 가봤다. 장릉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멀어서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 수도권을 벗어날 때는 도로에서 신경이 날카롭다. 다른 차들과 경쟁하듯 달리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제천에 들어서고, 강원도가 가까워지니 운전하기 편하다. 한가롭게 뻗은 지방도로에 차가 뜸하다. 경치도 아름답다. 산봉우리들이 서로 이마를 쳐들고 키 자랑을 하고 있다. 몸뚱이에는 숲을 키우고, 큼지막한 바윗덩어리도 안고 있다. 바윗덩어리들은 울창한 숲속에 나무들 바람막이라도 한 듯, 바람에 깎여 가파르게 몸을 세운 절벽이 되었다.

 

영월은 탄광 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도 줄고 경제도 기울었다고 한다. 고갯길에서 만난 음식점도 입구부터 허름하게 낡았고, 주인 내외도 늙었다. 동네도 무릉도원면이 있고 김삿갓면이 있다. 그 이름이 좀 느리게 사는 흔적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단종의 애잔한 역사는 풍요롭다. 단종의 이야기가 슬픔으로 침식되고, 시간의 풍화 작용을 거치면서 영월을 떠받치고 있다.

 

단종은 자손이 없던 왕실에 귀한 왕손이었다. 할아버지 세종대왕도 특별히 귀여워하고 여덟 살에 왕세손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단종의 운명은 기구했다. 태어나고 사흘이 지나 엄마가 산후병으로 죽었다. 열 살 때 할아버지 세종이 돌아가셨고, 아버지 문종도 몸이 약해 왕위에 오른 지 두 해 만에 하늘로 갔다. 단종의 나이 불과 열두 살에 고아가 됐다. 더위가 막 시작할 무렵 어린 나이에 조선의 왕위에 올랐지만, 그것이 오히려 고난의 시작이었다.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정란을 일으키고 유명무실한 왕이 되었다. 권력을 잃은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았다. 그때 단종의 나이 열 입 곱 살이었다.

 

능에 오르기 전에 단종역사관에 들어간다. 단종의 짧은 인생이 펼쳐진다. 한양부터 영월까지 유배길 도중에 각 장소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어린 왕이 고운 비단옷을 입고 흙 먼짓길을 지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바라보는 장면이 사진처럼 그려 있다. 영정 속의 열일곱 소년 단종의 앳된 얼굴은 정변에 희생된 비운의 왕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유배지에서는 매일 밤 피를 토하듯 처절하게 우는 두견새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생이별한 부인을 그리워하며 한양 땅을 향해 하염없이 바라봤다.

 

단종의 역사관을 보는 내내 권력의 비정함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능 입구에 있는 박충원 낙촌비각을 보자 안타까움이 가라앉는다. 영월부사이던 낙천 박충원이 꿈속에서 단종의 무덤을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단종의 죽음이 강요된 것이었던 만큼 사후 처리도 비참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면 삼족이 멸하는 법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월의 호장 엄흥도는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영월 엄씨의 선산에 암장했다. 이후 단종은 노산대군으로 복위되고 다시 왕의 시호를 받고 추증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장릉을 만들었다. 단종이 죽은 지 200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능을 따라 오르다 소나무를 만난다. 정순왕후의 사릉에서 옮겨 심은 정령송이다. 왕후는 열다섯에 단종을 만나 궁에서 겨우 3년을 보내고 청계천 영도교에서 남편과 헤어진 후 영원히 이별한다. 둘 사이는 후사도 없었다. 혼자된 왕후는 이후 64년 동안 비루한 삶을 살면서도 영월에 있는 남편을 향한 사모의 정을 잊지 않고 살았다. 왕비는 죽어서도 단종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죽어서도 사릉(思陵)이라는 무덤에서 남편을 기다린다.

 

정령송을 지나니 작은 능이 앉아 있다. 건릉을 비롯한 조선 왕릉은 크기에서 위세를 보인다. 위용과 기품을 잃지 않으려고 능석을 늘어놓고 멋도 부린다. 여기는 그런 것이 없다. 능도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다. 능묘에 난간석과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고, 무인석도 없다. 대신에 소나무가 많다. 어떤 이는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졌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아픔과 분노를 삼키다 뒤틀린 것처럼 보인다.

 

햇살 좋은 묘역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직 아침 결인데 서둘러 햇살이 내려와 능참봉 노릇을 하고 있다. 겨울 추위가 매운데 햇볕만은 따뜻하게 능을 감싸고 있다. 호위병처럼 서 있는 소나무들이 겨울바람을 막고, 햇살은 온기로 능을 어루만지고 있다.

 

단종은 비정한 권력에 밀려 소중한 사람을 이승에 남겨둔 채 이곳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채 어른이 되기 전에 어른처럼 멀리 갔다. 생전에 백성을 위한 정사를 펼치지 못하고, 애절한 사연만 남겼다. 하지만, 백성들은 마음을 다해 어린 왕의 삶과 죽음을 품었다. 그때는 시신을 수습할 수 없는 탄압이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눈이 내리고 봄이 오고 낙엽이 지기를 몇백 년 흘렀는데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다.

 

단종은 살아서는 운명이 기구했지만, 죽어서는 백성의 눈물로 승화했다. 지금도 우리의 사랑을 받으며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있다. 넉넉한 세월을 두고 만들어진 봉분의 선이 온유하고 유순해 보인다. 소박한 능선이 비정한 권력의 은유처럼 슬프다. 능을 내려오는 길목에 단종을 위해 몸을 바친 영령을 추모하는 제단이 있다. 영월에서는 매년 단종을 기리는 행사가 크게 열린다고 한다. 아래에서 보니 능을 둘러싼 소나무들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이제 단종은 그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재열 수필가 tyoon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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