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구름처럼 풍성한 조팝나무꽃

2020.05.06 11:00:00

 

4~5월 산기슭이나 밭 가에서 흰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는 꽃이 있다면 조팝나무꽃일 가능성이 크다. 서울 청계천 등 공원이나 화단에서 새하얀 가지들이 너울거려도 조팝나무꽃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조팝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의 산과 들에서 흔히 자라는 나무다. 흰색의 작은 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는 가지들이 모여 봄바람에 살랑거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흰 구름이나 솜덩이처럼 생겼다. 봄에 시골길을 가다 보면 산기슭은 물론 밭둑에도 무더기로 피어 있고, 낮은 담장이나 울타리를 따라 심어놓기도 했다. 풍성한 꽃이 보기 좋아 공원에 조경용으로 심어 놓은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바람이 불 때 함께 오는 조팝나무 꽃향기는 참 좋다.

 

조팝이라는 이름은 하얀 꽃잎에 노란 꽃술이 박힌 것이 좁쌀로 지은 조밥 같다고 붙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영어로는 ‘신부의 화관(Bridal Wreath)’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졌다. 그러고 보니 조팝나무꽃을 보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5월의 신부를 연상할 수도 있겠다. 이팝나무도 꽃이 피면 꼭 이밥(쌀밥)을 얹어놓은 모양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옛사람들은 조팝나무에서나 이팝나무에서나 밥을 연상한 모양이다.

 

작가 이혜경의 단편 <피아간(彼我間)>에서는 조팝나무꽃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틈새> 수록작 중 하나로, 2006년 이수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소설은 주인공 경은이 주위에 불임 사실을 숨긴 채 입양 신청을 해놓고 임신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 주요 줄거리다. 주인공은 자신이 낳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개월 수에 맞게 위장 복대를 차면서 남편을 제외한 주위 사람들을 속인다. 여기에 주인공 아버지의 임종을 전후로 드러나는 가족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교차하면서 핏줄 또는 혈연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경은은 결혼 전에 격주로 주말에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할 정도로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했다. 구색 맞추듯 아이까지 꼭 낳아야 한다는 생각도 갖지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을 장애인 시설에 데리고 간 것은 ‘어디에 머리 두고 살아가는지’, ‘내 가족, 내 핏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안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경은은 장애인 시설을 나오면서 동행에 대한 답례로 남편에게 조팝나무 향기를 선물한다.

 

목을 감고 대롱대롱 매달리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타박타박 걸어 나오는 봄날, 야산 어귀엔 조팝나무가 축복처럼 하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경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여기예요. 여기가 향기가 가장 짙은 곳이에요. 야산이 들길과 만나는 지점, 그곳에만 이르면 무슨 세례라도 주는 듯 맑은 향기가 끼쳐왔다.

 

 

인류에게 고마운 식물

봄바람이 불어올 때 밀려오는 조팝나무꽃 향기는 상쾌하면서도 달콤하다. 남편은 꽃향기를 깊이 들이마신 뒤 감동한 듯 “우리, 나중에 아이 낳아 키우고 나면, 시간 날 때마다 이런 아이들 돌보러 다니는 것도 좋겠다”고 말했고, 경은은 비로소 그와의 결혼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경은은 나름 바르게 살려고 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에 냉소를 보내지만, 불임의 여파는 경은 자신도 주위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게 없도록 만든다. 계속되는 유산에 입양을 원하지만, 어른들의 완강한 반대로 거짓 임신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경은은 ‘생명이 아니라 거짓을’ 키워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괴롭다. 더구나 입양을 신청할 때 ‘험한 일 겪은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해서 생겨난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면, 경은도 속물적 기대와 우려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드러나고 있다. 경은의 생각들이 하얀 조팝나무꽃이 시들듯이, 현실 속에서 점차 빛이 바랜다는 것이다.

 

조팝나무는 대개 큰 무리를 이루지만, 작은 꽃송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섯 장의 꽃잎과 노란 꽃술을 볼 수 있다. 꽃이 질 때는 마치 눈이 온 것처럼 땅을 소복하게 덮는 것도 보기 좋다. 조팝나무의 번식은 주로 삽목을 이용하고, 또 심으면 금세 큰 포기로 자라나므로 포기나누기도 할 수 있다.

 

고전소설 토끼전에도 조팝나무가 나오는데, 자라가 토끼 간을 구하기 위해 육지에 올라와 처음 경치를 구경하는 대목에서다.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나오는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現身)하고, 조팝나무에 비쭉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오.’

 

무엇보다 조팝나무는 인류에게 매우 고마운 식물이다. 전 세계 인구가 하루 1억 알 넘게 먹는다는 진통제 아스피린은 ‘아세틸살리실산’이라는 물질로 만드는데 이 성분이 바로 버드나무와 조팝나무에 들어 있다. 1890년대 독일 바이엘사는 조팝나무 추출물질을 정제해 아스피린을 만들었다. 아스피린이라는 이름은 조팝나무의 속명(屬名) ‘스파이리어(Spiraea)’와 아세틸의 머리글자인 ‘아’를 붙여 만든 것이다.

 

조팝나무를 시작으로 초여름까지 조팝나무 자매들이 차례로 핀다. 진한 분홍빛 꽃이 꼬리처럼 모여 달리는 꼬리조팝나무, 흰 꽃잎에 가운데만 연분홍색인 참조팝나무, 15~20송이가 모여 반원 모양으로 꽃이 피는 산조팝나무와 공조팝나무 등이 있다. 산조팝나무와 공조팝나무는 꽃 모양이 비슷한데, 산조팝나무 잎은 둥글둥글하고 공조팝나무 잎은 길쭉하다. 공조팝나무는 중국 원산으로, 원예용으로 공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공원에서는 일본조팝, 삼색조팝나무도 흔히 볼 수 있다. 활처럼 휘어진 줄기에서 꽃이 줄지어 피는 모습이 마치 말의 갈기 같은 갈기조팝나무도 인상적이다.

 

작가 이혜경은 조팝나무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작가의 다른 단편 <작은 골짜기>에도 중년 남자가 고등학교 때 마음을 둔 여학생을 ‘꿈결 같은 조팝나무꽃’에 비유하는 대목이 있다.

 

이혜경은 문단에서 ‘웅숭깊은 시선과 곰삭은 문체’로 개인들이 겪는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진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묘사가 섬세하고 수없이 다듬은 흔적이 역력하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신발만 보면 물어뜯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내가 쓴 글만 보면 뜯어고치려는 본능으로 문장을 고치고 제목을 고친다”고 했다.

 

필자가 사는 곳 인근에서도 해마다 봄이면 조팝나무꽃이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다. 바람 잔잔할 때 사진이라도 몇 장 찍어야겠다. 경은이 속물적이지 않은 삶을 다짐하며 장래 남편에게 선물한 조팝나무꽃 향기도 다시 음미해보고 싶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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