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 오후 4시에 추억으로 피어나요

2020.09.07 12:00:00

 

박완서 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이혼녀 문경이 상처(喪妻) 한 대학 동창 혁주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싱글맘으로서 겪는 이야기다.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혁주는 조건이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나자 문경을 버린다. 문경은 혁주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문경은 사내아이를 낳았고 음식점을 차려 나름 안정을 찾아갈 즈음 혁주네 가족이 찾아온다. 혁주의 아내가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문경의 아이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다. 혁주의 아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대목에 분꽃이 나온다.

 

큰엄마(혁주의 아내)가 이렇게 푸념하면서 서로 뒤엉킨 모자를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빼앗아 가지고 싶은 호시탐탐한 눈빛이었다. 문경이는 큰엄마의 그런 눈빛에 전율하면서 아이의 몸과 마음이 그동안 황폐해진 건 저 눈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어렸을 적 저녁 나절이면 한꺼번에 피어나는 분꽃이 신기해서 어떻게 오므렸던 게 벌어지나 그 신비를 잡으려고 꽃봉오리 하나를 지목해서 지키고 있으면 딴 꽃은 다 피는데 지키고 있는 꽃만 안 필 적이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었다.

“그건 꽃을 예뻐하는 게 아니란다. 눈독이지. 꽃은 눈독 손독을 싫어하니까 네가 꽃을 정말 예뻐하려거든 잠시 눈을 떼고 딴 데를 보렴.”

 

혁주의 아내가 아이에게 눈독을 들이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꽃에 비유해 주인공의 심리나 특징, 상황을 적확하고 휠씬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이 박완서 작가의 특기 중 하나인 것 같다.

 

박완서 작가는 2002년 한 독자모임과 만남에서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분꽃이라고 했다. 그 많은 꽃 중에서 왜 분꽃을 가장 좋아하는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설명은 없었고, 이제 작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다만 작가가 분꽃에 친근감을 느끼며 이 꽃을 특별히 여긴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산문집 『두부』에서 작가는 구리 노란 집으로 이사한 해 늦은 봄, 심지도 않았는데 분꽃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내 아득한 유년기로부터 나를 따라다니다가 이제야 겨우 현신(現身) 할 자리를 얻은 것처럼 느껴져 반갑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라며 “오랜 세월 잊고 지냈지만 분꽃은 나하고 가장 친하던 내 유년의 꽃”이라고 했다.

 

 

“가장 친하던 내 유년의 꽃”

최은영의 중편 『쇼코의 미소』에서도 분꽃이 인상적으로 나오고 있다. 소설은 소유와 쇼코라는 한국과 일본의 두 여고생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두 여성은 여고 시절 학교가 자매결연을 한 인연으로 만나 대학, 취업 시기까지 삶의 굴곡과 고민을 나눈다.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이 소설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는 곳은 소유가 우울증에 걸린 쇼코를 일본으로 찾아가 만나는 장면이다. 이 대목에 분꽃이 나온다.

 

그곳에는 분꽃을 심어놓은 작은 마당과 반질반질한 나무마루가 있었다. 쇼코는 퓨즈가 나간 것 같았다. (중략) 쇼코는 두 손으로 마루를 짚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쇼코를 쳐다보지 않고 마당에 핀 분꽃에만 시선을 줬다.(중략) 나는 쇼코의 말에 놀라서 노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노인은 눈에 도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돌려 분꽃을 보는 척했다.

 

이 소설에 분꽃이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은 틀림없다. 분꽃이 의미와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시든 분꽃이 꿈을 내려놓고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두 청춘의 심경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젊은 작가의 소설에서 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꽃이라서 그런지 꽃에 대한 관심이 덜해 여간해선 젊은 작가들 작품에 꽃이 나오지 않는다. 최은영은 요즘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 한명이다. 『쇼코의 미소』도 담담한 필체로 쓴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두 소설에 나오는 분꽃은 재미있는 점이 참 많은 꽃이다. 마당에 분꽃이 피어 있었다면 해 질 녘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분꽃은 해가 뜨면 꽃잎을 오므렸다가 오후 4~5시쯤부터 다시 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 이름이 ‘4시꽃(Four o'clock flower)’이다. 시계가 없던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은 이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저녁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나팔꽃과는 정반대다. 분꽃은 한여름 내내 볼 수 있는 꽃이다.

 

장독대 옆을 지키던 예쁜 분꽃

분꽃의 색깔은 붉은색·노란색·분홍색·흰색 등 다양하다. 한 번은 이 중 노란색이 제일 예쁜 것 같아 노란색 분꽃 씨를 회분에 심어보았다. 그런데 다음 해 기대와 달리 붉은색 꽃 위주로 피어 실망한 적이 있다. 원래 분꽃의 꽃 색 유전은 멘델의 법칙 중 중간유전(불완전 우성)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분꽃은 여러 꽃 색 유전자가 섞이면서 한 그루에서 붉은색, 노란색 꽃잎이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두 색이 같이 있는 꽃잎, 두 색이 점점이 섞인 꽃잎까지 나온다.

 

가을에 분꽃 아래에 검은 환약같이 생긴 씨앗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분(粉)꽃이라는 이름은 화장품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 여인들이 이 씨앗 안에 있는 하얀 가루를 얼굴에 바르는 분처럼 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분꽃 씨앗은 발아율이 아주 높다. 분꽃 씨앗을 심으면 다음 해 봄 십중팔구 싹이 날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 가꾸기도 쉬운 꽃이다. 그래서 가을에 분꽃 씨앗이 보이면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사람들에게 심어보라고 주기도 했다. 싹이 트면 처음엔 콩팥 모양으로 쌍떡잎이 생긴 다음, 달걀 모양으로 끝이 뾰족한 잎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산에 가서 운이 좋으면 꽃송이들이 분꽃처럼 생긴 분꽃나무를 볼 수 있다. 연분홍 꽃 색과 맑은 꽃향기가 참 좋은 나무다.

 

분꽃은 남미 원산의 원예종 꽃이다. 어릴 적 화단이나 장독대 옆에는 맨드라미, 채송화, 봉선화, 나팔꽃과 함께 분꽃 한두 그루가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준 꽃이다. 고향 여자애들은 분꽃 아랫부분을 쭉 빼서 귀걸이를 만들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분꽃이 17세기 전후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약 400여 년간 우리와 함께 해온 꽃이다. 요즘엔 마당이 줄어서인지 전처럼 흔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분꽃을 보면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앞서는 것 같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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