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나 지금이나 초중고 학생들에게 크게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어린 학생들이 장래 희망하는 직업으로 교사가 단연 선호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때 직업 선호도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곤 하였다. 경험이 많지 않고 또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에게 미치는 교사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마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거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효능을 증거하리라 믿는다.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부모님이라고 대답하는 어린이들이 많은 것과 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작 선호의 당사자인 교사는 스스로 얼마나 만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열정을 다할까? 또한 자신이 교사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당당하게 신분을 드러내고 있을까? 필자 또한 교사로 살아가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에 얼마나 주저 없이 답하는지 성가신 물음의 시간을 가져본다.
다음의 일화를 보자. “자신이 쥐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청년에게는 무척 심각한 정신적 문제였다. 장기간 입원 치료 후 그는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퇴원 수속을 밟고 병원을 나서던 청년은 혼비백산 사색이 되어 의사에게로 뛰어왔다. 병원 입구에서 길고양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의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당신은 이제 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잖습니까?” 청년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당연하지요. 그런데요, 저놈의 고양이가 문제입니다. 저 고양이가요, 제가 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잡아먹겠다고 덤벼들면 어쩌겠어요?”
썰렁한 이야기에다 무거운 의미를 내포하는 일화다. 이는 진정한 자아 정체감이란 무엇일까를 성찰하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의 시선을 얼마쯤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 정체감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 벗어나 누가 뭐라고 해도 ‘나다움’을 깨닫고 그 연장선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선생님들과 수업 나눔을 하다 보면 그 특성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가르치는 ‘아기 엄마형’, 친구처럼 편하고 거리감이 전혀 없어 아이들이 쉽게 접근하는 ‘또래 친구형’, 카리스마와 자신감으로 열변을 토하는 ‘군대 지휘관형’, 매끄러운 목소리로 어려운 개념도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스타 강사형’, 수업 분위기가 자못 엄숙하고 무게가 실리는 ‘성직자형’, 털털한 성격에 무엇이든 수용할 것 같은 ‘이웃 아저씨형’…….
그렇다면 어떤 유형이 가장 교사답고 훌륭할까? 각각의 유형이 가지는 장점을 잘 받아들이면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속한 유형의 장점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무지개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 색깔의 물감을 다 섞으면 거무튀튀한 색이 되고 만다. 맛있는 음식도 한곳에 뒤섞으면 잡탕이 되고 만다. 겨울과 봄이 뒤섞인 환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쥐 같기도 하고 새 같기도 한 박쥐 역시 귀여움을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떻게 자아 정체성을 유지해야 할까? 10년, 20년 전부터 몸에 익혀온 교수-학습 방법을 고수하는 것은 ‘나다움’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군대 지휘관형’이든 ‘스타 강사형’이든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굳어진 특성이자 유형이다. 그것이 교사로서 진정한 나다움이나 정체성일 수는 없다. 이 선생님은 토론수업의 선두주자이고 그 선생님은 협동학습의 달인이며 저 선생님은 문제해결 학습에서 앞서간다는 식의 교수-학습 방법상 특성과 특기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이 다양한 학습 방법을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책무가 아닐까?
이제 우리는 각자의 교직 인생에서 어느 한 해를 교수법 혁신의 원년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제안하고자 한다. 세상도 변했고 교육과정도 변했고 학생들도 변했다. 혹 자신의 수업 형태만 10년째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일이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가 확실한 정체감을 갖지 않으면 우리 교사를 ‘쥐’라고 여길 ‘고양이들’이 나타날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