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조롱 팥배나무 붉은 열매, 겨울새들의 잔칫상이죠”

2020.12.04 10:30:00

 

서울 둘레길 7-2코스(서울 은평구)에 봉산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있다.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어서 붙은 산 이름인데, 서울 서쪽으로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12월 이 산에 가보면 아직 단풍이 지지 않은 것처럼 온 산이 붉다. 나뭇잎은 다 떨어졌지만 조롱조롱 붉은 열매를 단 팥배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0m가 넘는 팥배나무들이 즐비한데 다들 늘씬하고 단정하다.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 끝마다 10여 개씩 점점이 열매가 달려 하늘은 온통 붉은색이다. 등산객들도 “와~” 하는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봄에 꽃 필 때도 대단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봉산을 팥배(나무)산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낙엽이 진 다음 산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나무가 팥배나무다. 봉산뿐만 아니라 남산·안산·북한산 등 서울과 주변 산에서도 팥배나무가 주요 수종 중 하나이고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우리나라만 아니라 중국·극동러시아 남부·일본에도 분포하고 있다.

 

팥배나무는 등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몰랐어도 사진을 보면 “아, 이게 팥배나무야?”라고 할 정도로 비교적 흔한 나무다. 다만 신갈나무 등 참나무와 경쟁에서 밀려 군락을 형성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봉산에선 큰 숲(5,000㎡)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는 2007년 봉산 팥배나무숲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팥배나무길을 조성했다. 서울 은평구 숭실고~은평터널로5길을 연결하는 1.0㎞ 코스로 약 30분이면 걸을 수 있다.

 

 

배꽃처럼 하얀 꽃, 팥처럼 붉은 열매

팥배나무라는 이름은 열매는 팥을, 꽃은 배꽃을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봄의 끝 무렵인 5~6월, 가지 끝마다 배꽃처럼 하얀 꽃이 듬성듬성 평면으로 가지런하게 모여 핀다. 배꽃을 닮은 새하얀 꽃이 필 때도 좋지만, 역시 팥배나무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수천 개 붉은 열매를 달고 있을 때 그 진가(眞價)를 볼 수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수없이 매달린 붉은 열매를 담는 것은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갖고 싶어 하는 컷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연히 팥배나무 열매는 산새들의 잔칫상이다. 팥처럼 붉고 작은 열매는 겨울에 새들의 양식 역할을 한다. 이가 없는 새가 한입에 먹기 딱 좋은 크기다. 봉산 팥배나무길을 지날 때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시인은 팥배나무 열매를 새들을 위해 ‘나무가 마련한 도시락’이라고 했다.

 

팥배나무 열매를 먹어보면 시큼한 맛 뒤에 단맛도 살짝 있어서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새들이 먹는 것은 사람에게도 해(害)가 없으니 안심하고 먹어도 좋다. 붉은 껍질을 벗겨보면 약간의 노란 과육이 있고 길쭉한 씨가 몇 개씩 들어 있다.

 

요즘 산엔 팥배나무 열매 외에도 찔레꽃·가막살나무·백당나무·청미래덩굴 등 유난히 붉은 열매가 많다. 왜 가을 열매는 붉은색이 많을까. 붉은색은 사람뿐만 아니라 새들에게도 눈에 아주 잘 띄는 색이다. 식물 입장에서는 새들이 열매를 멀리 퍼트려주어야 하니 새들에게 잘 보이는 색을 띠는 것은 당연하다. 새들이 열매를 먹으면 씨앗은 소화시키지 못하고 배설하는데, 식물 입장에서는 씨앗을 멀리 퍼트려주는 것이다.

 

팥배나무꽃은 5~6월 가지 끝마다 하얗게 모여 피는데 꿀이 많아 벌과 나비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팥배나무도 아까시나무처럼 꿀을 생산하는 귀한 밀원(蜜源)식물이기도 하다.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처럼 팥배나무는 ‘곳 됴코 여름 하나니(꽃 좋고 열매 많으니)’인 것이다. 달걀 모양 잎에는 규칙적인 물결 구조가 있고, 10~13쌍의 잎맥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잎과 꽃으로도 구분하기 쉬운 나무이니 한번 눈여겨보면서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다.

 

팥배나무는 숲속 건조하고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란다. 햇볕이 부족해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한 편이다. 그러니 관리하기가 쉽다. 여기에다 봄에는 벌과 나비가, 겨울에는 새들이 찾아오니 도심 공원이나 녹지대에 심기 좋은 나무다. 최근 들어 공원 등에 팥배나무를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앞으로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다만 약점이라면 공해에는 약하다는 점이다. 또 조경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지면에서 첫 번째 가지까지 높이(지하고·枝下高)가 낮은 편이라 가로수로는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나무가 마련한 새들의 도시락, 팥배나무

팥배나무는 꽃이 배꽃과 닮았지만, 배나무·돌배나무 등과 같은 속(屬)이 아니라 마가목과 같은 마가목 속인 점은 좀 의외였다. 팥배나무는 주변 산에 흔한 반면 마가목은 비교적 높은 산지에서 자라는 나무라 비슷한 종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팥배나무는 산 아래쪽에서도 볼 수 있지만, 마가목은 1,000m 이상 올라야 보이기 시작하고 울릉도에서도 자생하는 것은 정상 근처에서 볼 수 있는 나무다. 또 팥배나무는 잎 모양이 둥근 달걀형인 반면 마가목은 작은 잎 여러 개가 깃털처럼 모여 달렸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보는 눈은 역시 다른 모양이다.

 

식물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생식기관의 구조다. 꽃과 열매 모양이 종 구분의 기본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가목꽃을 보면 팥배나무와 비슷하고 열매 모양도 달리는 방식은 좀 다르지만, 색깔도 엇비슷하고 형태로 닮았다. 마가목이라는 이름은 마아목(馬牙木)이라는 한자명에서 나온 것인데, 새순이 말의 이빨과 같이 힘차게 돋아난다고 붙여진 것이다. 울릉도에 가면 산에서 자라는 마가목도 많지만, 가로수로도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울릉도 곳곳에서 마가목으로 만든 여러 건강식품도 파는 것을 보았다.

 

서울시는 1971년 서울을 상징하는 나무로 은행나무를 지정했다. 거목으로 성장하는 은행나무가 수도 서울의 무한한 발전을 보여준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물론 은행나무는 서울 전체 가로수 30만 7,351그루 중 가장 많은 10만8000여 그루(35.1%)를 차지해 서울의 상징 나무로 삼을만하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중국 원산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다. 서울시 상징 나무로 팥배나무를 검토해보면 어떨까. 서울에 흔하고 꽃도 좋고 열매도 좋은 나무 아닌가. 나무가 단정해 팥배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숲속의 건조하고 메마른 땅과 역경 속에서도 잘 적응해 자라는 것이 우리 민족성과 닮은 점도 있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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